소외 원인, 노동의 결과가 주체와 무관할 때

東洋宗敎(동양종교)ㆍ哲學(철학), 소외극복에 시사하는 바 커
疎外(소외)는 內的(내적)요인, 外部(외부)로 돌리면 해결책 없어


  人間(인간)이 疏外(소외)(Alienation)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 이다.
  멀리는, 희랍 고대의 哲人(철인) 플라톤이 Idea와 Eros를 이야기 할 때, 이미 소외의 문제는 자각되고 있었다. Idea는 보편적이며 超越的(초월적)인 실재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그 안쪽에는 ‘완전한 인간’에 대한 이상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 ‘완전한 인간’에 대한 이 상념 또는 관념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요, 어떤 他者(타자)에 대한 인상에 의해서 얻어진 것도 아니다. 다라서 이는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자기 스스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적인 自我(자아)의 생활 속에서 우리는 완전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本來的(본래적)인 自我(자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일상적인 자아가 불완전하다고 느껴지고 생각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個別性(개별성)에 국한된 존재이며, 이에 따른 對立(대립)과 갈등을 모면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므로서다. 따라서 本來的人間(본래적인간)은 이러한 한정성과 그에 따른 갈등을 넘어선 존재일 것이 요청된다. 다만 우리의 감각적 知覺能力(지각능력)이나 悟性的(오성적) 思惟能力(사유능력)에 의해서는 본래적 자아가 인식될 수 없다. 그러므로 Platon은 想起(상기)(Anamnesis)의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Idea의 세계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想起(상기)하고 회상하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미 인식되었고 경험되었던 사실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본래적으로는 Idea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존재이었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肉體(육체)의 감옥에 갇힘으로써 온전한 인식능력을 망각하게 되었고 ‘統合(통합)된 온전한 人間(인간)’은 분열된 육체적 存在(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 온전하였던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Eros이다.
  이렇게 볼 때, Platon에 있어서의 인간(人間)의 소외(疎外)란 다름 아닌 인간(人間)의 육체적(肉體的) 존재(存在)에로의 전락(轉落)을 뜻한다.
  즉(卽) 본래(本來)의 고향을 잃고, 스스로의 진상(眞想)을 망각한 채로, 육체의 무거운 집을 지고 헤매는 상태가 다름 아닌 인간(人間)의 소외(疎外)이다.
  東歐文化(동구문화)의 또 하나의 뿌리인 기독교的(적) 전통에 의하면, Adam이 낙원으로부터 추방될 때, 人間(인간)의 소외의 문제는 싹트게 되었다. 善惡(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과실을 먹지 말라고 神(신)이 命(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긴 것은, 신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며, 이는 신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라는 점에 그 핵심적 의미가 있다. 이때부터 人間(인간)의 소외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Jesus가 스스로를 낮추어 Incasnation을 통하게 우리의 역사 속에 나타나서 인간의 죄를 대신 보다 갚고 神(신)과의 再和解(재화해)(reconciliation)를 이룩하였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전에는 人間(인간)의 소외는 근원적인 해결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정통적인 기독교의 기본적 믿음이다.
  이처럼 Plato의 심오한 사상과 기독교적인 믿음은 결합되어 plotinus의 宗敎的(종교적) 哲學思想(철학사상)을 이룩하였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一者(일자)(To ben)로부터 유출된 것인데, 최초로 世界的(세계적) 理性(이성)(Nous)이 나왔고, 다음에 개별적 영혼이 나왔으며, 다음에 물질적 존재들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一者(일자)로부터 벌어진 것일수록 불완전한 것이며, 가까울수록 완전한 것인데,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은 一者(일자)와의 合一(합일)에 있다고 한다. 또한 一者(일자)와의 合一(합일)을 위해서는 宗敎的(종교적)명상과 道德的(도덕적)훈련을 통해서, logos에 일치된 생활을 할 것이 요청된다고 한다. 그런데 一者(일자) 그 자체는 어떠한 有限的(유한적) 屬性(속성)으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一者(일자)’라는 개념도 꼭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함으로서, 궁극적 존재에 대한 부정적 說明方法(설명방법)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그 뒤의 神學思想(신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위에서 본, 哲學(철학) 및 宗敎思想(종교사상)의 共通點(공통점)은, 人間(인간)은 超克(초극)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本來的(본래적)인 존재로부터 전락한 존재라는 데에 있으며, 疎外(소외)란 다름 아닌, 本來的(본래적)인 自我(자아)나, 根源的(근원적)이며 궁극적인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을 意味(의미)한다고 보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古典的(고전적) 思考方法(사고방법)은 近世(근세)에 이르러 도전을 받게 되며, 이에 따라 소외의 의미도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즉 Hegel은 아직 전통적인 철학사상과 종교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않았지만, 종교적 신앙이나 靈感(영감)또는 道德的(도덕적) 修鍊(수련)에 의지하기 보다는, 人間(인간)의 思辨的 思惟(사변적 사유)(Speculatione thinksing)에 깊이 의존하여  人間(인간)과 世界(세계)를 이해하고 說明(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人間(인간)과 世界(세계)를 絶對 精神(절대 정신)(aleslute spirit, Idea)의 辨證法的(변증법적)인 自己發展(자기발전) 現象(현상)이라고 보았다.
  즉 그는 자연적 현상이나 인간이 정신현상 속에 보여 지는 모순들은, 반드시 否定的(부정적)인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絶對精神(절대정신)의 자기전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절대정신은 자기를 定立(정립)하기도 하지만, 이와 모순되는 對自的(대자적)존재를 설정할 수도 있다고 한다. 다음에는 定立(정립)과 反立(반립)(卽自(즉자)와 對自(대자))을 변증법적으로 止揚(지양)(Aufheben)하여 한 차원 더 높은 자아가 정립된다. 이와 같이 무한히 발전하여 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며 자연의 진전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역사와 자연적 현상은 절대정신의 合法則的(합법즉적)인 활동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Hegel의 철학사상은 인간에 의해서 自覺(자각)되는 모순과 대립 갈등 및 疎外(소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모순과 소외를 합리화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전통적인 西歐(서구)의 종교적 신앙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神學(신학)에 있어서 골치 아픈 문젯거리가 되는 죄의 문제와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理性的(이성적)해답을 제공하여 줌으로서 어느 정도 공헌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Hegel과는 달리, 서구의 전통적인 사유방법이나 신앙태도의 근본적인 변혁을 시도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Feuerbach ai marx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Feuerbach는 아직도 고대의 희랍사상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가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은, 고대 희랍사상 가운데에는 自然(자연)에 관한 깊은 洞察(통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이나 관념을 강조하는 철학 사상만이 너무 지나치게 인간사회의 모든 文化(문화)를 지배한다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人間(인간)의 肉體(육체)를 罪惡視(죄악시)하는 사상에 同意(동의)할 수가 없었고, 物質的存在(물질적존재)가 반드시 정신적 존재보다도 낮은 次元(차원)의 것이라는 사상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物質的(물질적) 存在(존재)를 一次的(일차적)인 것으로 하여,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 方法(방법)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으며, 이는 그라 最初(최초)로 생각해 낸 것은 아니고, 희랍고대의 哲人(철인) Lenkippos u Demokitos의 思想(사상)속에서 이미 그 先驅的(선구적)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marx에 이르러서는 事情(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그는 아마도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思想家(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特(특)히 古代(고대)의 Herakleitos나 近世(근세)의 Hegel 思想(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제로 삼은 것은, 人間(인간)은 本性(본성)에 관한 것도 아니며, 인간이 어떻게 하면 궁극적인 초기 産業社會(산업사회)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에 주목하였다. 즉 기계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이를 소유하지 못한 者(자)와의 不平等(불평등)한 관계를 문제로 삼았다. 따라서 그게 있어서 소외는 이미 人間共同(인간공동)의 문제가 아니고 노동계층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만의 문제였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더 이상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존재도 아니고 宗敎的(종교적)존재도 아니었다. 오직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또한 노동에 의해서 얻어진 생산품들에 의해서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넓혀가는 존재였다.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은 物質(물질)이 된 대상 속에 形象化(형상화)된 노동이다. 그런데 이것이 노동하는 자와 관계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갈 때, 노동자는 전락된 者(자)가 된다. 이것이 곧 疎外(소외)이다. 즉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노동의 결과가 노동자와 무관한 것이 되는 것을 노동자의 소외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소외는 노동자가 自覺(자각)한 疎外(소외)는 아니고, 그가 생각해낸 소외이다. 그는 과연,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그 자신을 노동하는 자 속에 포함시켰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가 처음에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모든 인간은 노동에 종사해야 되며,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이러한 삶이 인간적 삶이며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사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이상주의자로 머물지는 않았고, 사회이론의 실천가가 되었고, 곧이어 혁명가가 되었다. 그는 노동계층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처지를 자각할 때를 기다릴 수 없었으므로, 이들을 조직하고 선동하여, 그들과 대립되는 계층의 사람들과 투쟁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소외의 원인은 모든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으면서 그의 제자 레닌과 스탈린을 거쳐서 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거대한 전체주의사회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노동계층에 속하는 다수가 아니었고, 소수의 의식적인 지식인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들이다.
  Marx가 敵(적)으로 간주한 자본가나 소수특권층 대신에 Ideology의 거대한 기계(構造物(구조물))와 전략전술의 무기들로 무장한 소수가 다수의 노동자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들 사회에는 國民(국민)에게 깊고 넓은 영향을 줄 敎會(교회)나 聖職者(성직자)는 없지만, 唯一無二(유일무이)한 堂(당)이 있으며, 당의 노선을 결정하는 핵심인물들이 있다. 아마도 이들 핵심인물들에게는 소외란 그리 문제될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명령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다수의 지식인과 노동자들에게도 소외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소외란 이미 인간의 보편적인 內的(내적)문제가 아니다.
  막스가 본 疎外理論(소외이론)의 근본적 오류는 소외의 원인을 어떤 특수한 사회적 계층에 돌리고 있다는 데에 있다.
  疎外(소외)의 問題(문제)는 人間(인간)의 自覺的(자각적) 能力(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內的(내적)인 問題(문제)이다. 그럼에도 이의 原因(원인)을 他(타)에 돌린다면, 결국 人間(인간)을 끝없는 투쟁에 내모는 결과가 될 뿐, 疎外(소외)의 問題(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길은 막히게 된다. 그러므로 現代(현대)의 精神分析學者(정신분석학자)들은 한결 같이 그 原因을 人間의 內面的(내면적) 갈등으로 보며 超自我(초자아)와 日常的(일상적) 自我(자아)의 갈등, 또는 상징적으로 內面化(내면화)된 無意識的(무의식적) 志向性(지향성)과 日常的(일상적)인 自己(자기)의 生活(생활)과의 不調和(부조화) 및 모순으로 分析(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實存哲學者(실존철학자)들도 實存(실존)의 자각을 통해서, 日常的(일상적) 自我(자아)의 虛構性(허구성)이 깨달아질 때,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낯선 자임을 비로소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疎外(소외)의 問題(문제)라고 한다.
  까뮈의 ‘異邦人(이방인)’은 바로 실존이 자각으로부터 깨달아진 자기 자신의 모습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Jaspers의 좌절하고 난파하면서 이를 직시하고 초극하는 실존도 바로 인간 상호간의 交通(교통)을 통해서 本來的(본래적)인 자아로부터 소외된 자아를 깨달아 包括者(포괄자)와 다시 융합되는 과정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외의 문제는 인간 공동의 全人的(전인적)인 內的問題(내적문제)이며 사회의 계층과 계층 간의 利害(이해)의 대립에서 야기되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소외의 超克(초극)을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다음의 문제이며, 이의 해답을 위해서는 東洋(동양)의 종교와 사상이 示唆(시사)하여주는 바가 적지 않으나 이는 다음의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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