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릴없이 돌아왔다. 수녀원에서 몇십분을 머물게 될 지 몇 시간을 머물게 될지 모르면서도 벌써부터 그 시간들이 곤혹스럽게 여겨졌다. 돌아나와서 밤 열차를 탈 수 있을 것인가도 의문이었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심하고 쌀쌀했다. 털썩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 그 여자가 말했다.
  “혹시 방이 필요하시면 요 뒤에 청춘여관을 찾으세요.”
  그 말속에 여자가 필요하시면 이란 뜻이 들어있나하고 쳐다보았다. 내 속을 짐작했음인지
  “아이 참 군인 아저씨두, 내가 방 빌려 쓰는 경여관이기는 하지만 그런 뜻 아니라 기중 깨끗한 여관이라서 그래요.”
  아무려면 어떠랴 싶어
  “만약 밤차로 떠나지 않으면 청춘여관으로 가지요. 댁을 찾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9호실이 제 방이에요”
  선선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풍대리 차가 올 때까지 친구해드리고 싶지만 들어가봐야 해요. 여관집 마누라가 싫어하거든요”
  생각지도 않던 호의였다.
  “괜찮습니다. 못 들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감사합니다”
  그 여자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더 기다려서야 차가 왔다. 차가 둘러가는 산 언저리에서부터 이내가 서서히 깔려 지나온 길이 푸르스름한 어스름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자네가 차라리 제대를 연기하고 통합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크레졸 희석액에 손을 씻으면서 안 소령이 말했다.
  ‘살 수 있는 가망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포도넝쿨처럼 내 간을 잠식하고 있는 종양의 사진을 무덤덤하게 내려다보면서 내가 물었을 때
  “어떤 대답을 원하는가? 나도 확실한 대답은 할 수 없다. 다만 그리 희망적인 상태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병실로 돌아오는 긴 복도에는 사선으로 깔린 햇빛이 밟혔다. 병실은 서향창을 가지고 있어서 해질 녘이면 눈을 감아도 환하게 눈앞이 밝아져 아물거렸다. 목구멍을 넘어오는 피비린내가 역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살 수 있으리란 건 헛된 희망임에 틀림없었다. 죽는 순간까지 후송병원의 침대 위에서 누워 있을 것인가, 사회로 복귀하여 부족한 약 때문에 좀 더 생명을 단축시킬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미리 써낸 답안지에 승복하는 것처럼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별다른 동요 없이 현실적이고 사무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내 자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랐어. 많이 다쳤는지 걱정이야. 더운 철인데 기브스를 감고 있다니 얼마나 힘들겠어? 빨리 회복되기를 바래…
  언제나 다정하고 정겨운 목소리 그대로의 편지였다. 그 날은 낙하훈련이 있는 날이라 긴장을 한 탓인지 편도선이 부은 듯 목이 깔깔했다. 사각형으로 묵직하게 접힌 낙하산 뭉치를 지급받을 때 저쪽에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 이 줄 하나에 내 생명이 왔다갔다 한다는 걸 몰라? 어디다 시떠운 수작이야’
  동료 하나가 벌겋게 얼굴이 달아있는 품으로 보아 누군가 지급된 그의 낙하산을 무심코 건드렸던 모양이다.
  그것은 공공연한 금기사항이었다. 수만 피트 상공에서 고무기구 하나로 허부적거리며 내려와야 하는 이들에겐 그 낙하산이 생명과 등가물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남의 낙하산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상대방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귀청이 찢어질 듯 요란한 기내에서 맞은편에 앉은, 초죽음이 된 스스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조장이 예기된 수화(手話(수화))로 명령을 하면 일초에 한명씩 기내 밖으로 열린 문으로 뛰쳐 내려야만 했다. 이 훈련이 처음이 아니지만 기다림의 순간마다 입안에 침이 말라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다. 개중에는 자신의 담력을 내보이기 위해 간혹 여유를 위장하며 씨익 웃는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난 그들의 웃음을 볼 적마나 차라리 거울을 코앞에 들이대주고 싶었다.
  짜아식, 지금 네 표정 웃고 있는 그 꼬락서니를 네가 한번만 본다면 아마 부끄러워져서 다시는 그따위 웃음을 짓지 않을 테지.
  이런 말을 삼키며 숨을 고르게 들이켰다. 조장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우리들의 주의를 요구했다. 우리들은 일어섰다. 단 하나의 길이 열리면 수만피트 아래의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선택이었다. 글쎄 단 하나의 방법을 택하는 것도 선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따위를 묻기도 전에 내가 뛰어내릴 차례였다. 기실 차례란 무의미했다. 몇 초간의 기다림이 주는 시간의 하중(荷重(하중))을 견뎌내지 못해 남의 어깨를 밀치면서 먼저 달려 나가는 판국이었으니까. 나는 등에 멘 낙하산을 한번 추스렸다. 고막을 거쳐 골을 후벼파도록 덜덜거리는 상대방의 고함소리마저도 들을 수 없는 기체 내에서 벗어나면 막막한 정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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