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학정성과 권태로 구성된 홀로 죽어가는 존재

人間(인간)외면한 학문, ‘知的(지적) 自慰行爲(자위행위)’ 불과
有限者(유한자)의 ‘無限(무한)에 대한 追求(추구)’가 인간학의 理想(이상)


  나 자신으로서의 나, 人間(인간)의 존재가치를 밝히고자 철학은 생겨났다. 철학뿐 아니라 모든 예술, 종교 또한 人間(인간)이 人間(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흔히 自我喪失時代(자아상실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이때에 人間(인간)다운 人間(인간)으로 남기 위한 방법 모색으로 철학적 인간, 종교적 인간인 우리를 한걸음 떨어져 관조해본다.
  <편집자 註(주)>

 
  1, 인간의 한계성과 무한계성
  시간적으로 볼 때 사람은 극히 짧은 순간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 그리하여 옛날의 성인들은 “인간의 삶이란 한 마당의 꿈”이라고 하였고 플라톤은 “비존재로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육체의 탈을 벗은 다음에야 영원한 이데아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의 삶이 절대로 짧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너무나 많다. 도리어 귀찮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극히 역겹게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 인생이며, 가능하면 빨리 영원한 없음의 상태로 가고픈 심정을 가질 수도 있다. 짧은 인생이 아니라 너무나 지겨운 오랜 시간의 삶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 볼 때 인간은 극히 제한된 거리를 왕래하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 물론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샅샅이 답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놀음일 수밖에 없다. 손오공이 아무리 뛰어도 손바닥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경우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 이외에도 의식의 시간과 공간이 있다. 그리고 의식의 시간으로는 영원을 살 수도 있고 의식의 공간으로는 9만리 천공을 날 수도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순간에서 영원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정신적으로는 태평양을 마음대로 건널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태어난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시도-를 부단히 감행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2, 存在(존재)의 신비
  인간이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동물이 아니다. 극히 복잡하고 극히 델리케이트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관심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탐구하고 애벌레로 변했던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하늘을 훨훨 날을 수 있는 나비가 되느냐를 탐구한다. 그리고 인간사회라는 집단은 어떻게 운영되며 어떤 원칙에 의하여 경영되어야 하느냐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탐구는 “어떻게(how)”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지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신비로운 것은 도대체 이런 것들이 “왜(why)"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미스터리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의 존재들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철학자들은 존재론(ontology)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인정했으며, 실존철학의 거장인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도 “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이 존재하느냐?”(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라는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라는 신비는 왜라는 신비를 따를 수 없다. 어떻게 나무가 산소동화작용을 하느냐는 질문도 굉장히 신비롭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신비한 작용을 하는 나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야말로 신비 중에 신비가 아닐 수 없다. 탈레스로부터 시작되는 희랍의 철학자들이 자연과 세계와 우주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어느 철학자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영원불변의 아르케는 물이라고 하였고, 다른 철학자는 불이라고 하였고, 또 다른 철학자는 물과 불과 흙과 공기라고도 말했다.

  3, 인간학의 대두
  그러나 자연과 세계와 우주에 대한 탐구는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자연을 탐구하는 주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엄연한 사실도 있지만, 인간이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 이외에도 의식의 시간과 공간을 다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희랍의 자연철학이 소피스트로부터 시작되는 인간철학(Philosophy of man)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호기심이 있는 탐구의 대상은 곧 인간이며 이런 뜻에서 모든 학문은 곧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학(Science of ma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관련이 없는 철학, 인간을 전제로 하지 않은 문학,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수학은 학문이 아니라 지적인 자위행위-이것은 마르크스의 표현이다-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떠난 학문, 예술, 종교는 말장난이거나 독단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영광된 하늘나라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세계로 내려왔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석가가 깨달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 사바세계로 내려왔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예수와 석가를 논의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
  인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알면 세계를 아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은 난세포 동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연구하려면 인간의 모든 측면-심리적, 철학적, 생리적, 역사적, 사회적, 윤리적 측면들-을 동시에 연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경이 코끼리 만지는 식의 단편적인 정보의 수집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을 이렇게 총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존재이며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추구하는 인간학은 전체적인 조명을 할 수 없는 인간이 전체적인 조명을 하려고 발버둥치는 몸부림인 것이다.
  무관에 대한 유한자의 추구. 소경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코끼리라는 실재 전체를 파악하려는 몸부림. 그것이 곧 우리들이 추구하는 인간학의 이상이며 현실이다.

  4, 철학적 인간, 종교적 인간
  필자가 ‘哲學的(철학적) 人間(인간), 宗敎的(종교적) 人間(인간)’(범우사, 1983)에서 제시하려는 것은 바로 인간을 철학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철학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이 인간의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를 알지 못하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주장은 ‘세포를 모르면 인간을 논하지 말라’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單純化(단순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는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생리적, 역사적 측면과 병행하여 철학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이 인간의 인격 형성에 극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인간의 철학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참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전통적으로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그 자체가 이미 철학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을 일단 ‘생각’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생각과 창조적인 생각-비록 그것이 틀린 생각일지라도-이 곧 철학자의 생각이다. 지나간 철학자들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공부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하려는 사람. 그가 곧 진정한 철학자이다.
  둘째로 철학적인 생각은 비판적인 생각이다. 비판이 없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을 비판만 하는 사회는 이성이 숨 쉬는 개방된 사회-철학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 폐쇄적인 사회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으로부터는 언제나 나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철학적인 생각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인간의 앎의 방식과 한계성을 추구하는 認識論的(인식론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인간의 당위성의 근거와 기준을 추구하는 論理學的(논리학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우선 이 글에서는 인간의 철학적인 측면을 윤리적인 관점에 국한시켜서 논의를 전개해보겠다.
  인간은 되는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동물이 아니다. 인간은 일정한 방향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된다고 믿는 동물이다.
  인간은 언제나 당위성(Ought)을 의식하고 사는 동물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어떤 일을 하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을 꼭 해야 되겠다고 작정을 해야 된다고 말했으며,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보다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으며, 마르틴 루터 킹 박사는 1964년 12월 11일 노벨 평화상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인간의 현재 상태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당위성을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윤리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인간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철학적인 생각의 일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당위성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 자신 이외의 다른 문제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파스칼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상태는 불안과 불확정성과 권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은 “반드시 혼자서 죽어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를 믿고 열망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여기서 다른 존재는 출세나 명예가 될 수도 있고, 영원불변의 진리가 될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불타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함을 믿으며, 허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실재를 희구한다. 인간은 무상하기 때문에 영원을 갈망하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를 찾는다. “밤이 되면 무신론자까지도 절반은 하느님을 믿게 된다”는 영(Edward Yung)의 말과 “곤경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있을 수 없다”는 커밍스(William T. Cummings)의 말도 이러한 인간이 가진 신앙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을 연구해야 하는 학문은 인간의 모든 모습을 관찰해야 한다. 인간의 事實的(사실적)인 모습(factual state)도 살펴보고, 당위성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평가적인 모습(evaluative state)도 살펴보고, 다른 물체나 존재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belief state)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우리들이 주장하는 인간학은 철학과 종교학을 필요로 한다. 사회학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연구하고, 역사학은 인간을 역사적 동물로 연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을 ‘있는 그대로’(as he is)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윤리학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당위적’(as he ought to be)으로 보는 것이며, 종교학은 인간을 ‘신앙적’(as he believes)으로 보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허수아비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어떤 믿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그의 사람됨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성서는 “믿음은 태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했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성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선포했다. 기계화되고 소외된 현대인은 모두 사랑을 열망한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으며, 믿음이 없는 곳에는 소망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바가바드기타는 “신앙을 가지고, 감정을 억제하고,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를 얻을 것이요, 지혜를 얻으면 평화를 얻으리라. 그러나 무식하고 신앙이 없고 의심하는 사람은 멸망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5, 인간을 위한 哲學(철학)과 인간을 위한 宗敎(종교)
  ‘철학적 인간, 종교적 인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일부는 필자의 더러운 점을 그대로 폭로하는 ‘自傳的(자전적) 人生論(인생론)’이며, 제 이부는 철학적 생각으로 인간을 조명하는 ‘哲學的(철학적) 人生論(인생론)’이며, 제 삼부는 믿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을 조명한 ‘종교적 人生論(인생론)’이다. 그런데 많은 독자들이 제 일부는 재미가 있는데 제 이부와 제 삼부는 전혀 재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어느 평자는 마치 구성진 흘러간 노래와 현대 가수들의 발랄한 음악의 제 일부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없이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려주려는 제 이부와 제 삼부에서 독자는 “좌절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鄭鎭弘(정진홍) “종교와 학문 사이를 흐르는 정직한 고뇌” ‘종로서적 사보’, 1983년 봄호, 9.48) 그리고 그는 필자를 “인간적이면서도 학자적이고, 학자적이면서도 인간적이려는 줄타기를 하고 있는 어릿광대”라고 말했다.
  그러나 철학과 종교는 반드시 인간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우리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철학인이어야 하고, 철학인이기 이전에 인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되지못한 사람은 철학을 할 수 없으며, 철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이 될 수 없다.”(9, 18)
  그러면 누가 철학인인가? 인간은 모두 철학적이다.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언제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곧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의 피안에는 언제나 종교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생각한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모두가 종교인이다. 여기에 바로 인간과 철학과 종교의 변증법적인 밀접한 관계가 성립된다.
  “인간을 저버린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인간과 관련을 맺음으로서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인간을 위한 행위일 때만 그 존재 가치를 더욱 빛낼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과감하게 ‘브라만이 곧 아트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이 곧 하늘’(人乃天(인내천))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종교만이 모든 진리를 독점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석가만이 니르바나의 길을 가르쳐 주었고, 예수만이 하늘나라의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이미 석가와 예수의 참뜻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듄(Carrin Dunn)은 ‘석가와 예수의 對話(대화)’라는 저서에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석가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aprecursor)이며, 불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석가의 진정한 후계자(atrue successor)”라고 말했다.(P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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