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적 서민세력성장이 배경

“개화사상과 안이하게 연결시킬 수는 없어”


東亞史(동아사)에 있어 實學(실학)
  東亞史(동아사)에 있어 17C~19C에 이르는 기간은 학술史上(사상) 중대한 변화의 추세를 보여준 시기다. 朱子學的(주자학적) 역사관 세계관에 대한 근대지향적 실학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에의 추구가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저 시기는 동아의 세계전쟁 이었던 임진란을 겪고 난 뒤, 과거에의 반성과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위한 노력이 學人(학인)들에 의하여 진지하게 계속되어 그 결과 조선조의 실학 청조의 고증학 그리고 일본의 蘭學(난학)의 성립을 각각 보게 된 것이다.
  이들은 官學(관학)으로서 이미 형식화 된 주자학이 현실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자, 이를 虛學(허학)으로 비판하면서 3國(국)을 각각 실학을 제출하였는바, 시기적으로 앞뒤의 차가 있고, 내용에 다소의 차이가 있지마는 모두 내실을 귀히 여기는 실학으로서의 성격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이제 실학자들의 四民平等觀(사민평등관)을 통하여 그 사회관을 살펴보고 華夷一也觀(화이일야관)을 통하여 그 세계관을 고찰해 봄으로서 동아사에 있어서의 실학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四民平等(사민평등)의 사회관
  실학은 일반적으로 서민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성립하는바 서민문화는 또한 서민세력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의 경우, 宋代(송대) 朱子學(주자학)에서는 지주와 佃人(전인)관계에 있어 地主(지주)우위의 ‘主義(주의)의 分(분)’을 강조하고 있으나, 明末淸初(명말청초)의 士大夫學(사대부학)에 와서는 佃人(전인)의 신분상승으로 ‘長幼(장유)의 分(분)’내지는 ‘兄弟(형제)의 分(분)’으로 존비의식이 전환된다. 佃人(전인)의 신분상승이란 서서히 실시된 租稅(조세)의 銀納化(은납화)와 함께 銀經濟(은경제)의 유통에 의한 사회적 변동으로 나타난 역사현상이다.
  이리하여 성장하는 서민적 기풍에는 주자학의 道學的(도학적) 가치관이 태평세월을 구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仁義(인의)를 강조하여, 私利(사리)나 情欲(정욕)을 죄악시하던 윤리관이 점차 설득력을 잃어갔을 뿐 아니라, 오히려 私利(사리)가 정욕을 떠나 따로 仁義(인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黃宗義(황종의)는 그의 유명한 ‘明夷待訪錄(명이대방록)’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각기 私(사)와 利(리)를 추구하는 것이 자연’이라 천명하는가 하면, 燕巖(연암)은 <虎叱文(호질문)>에서 역시 그러한 도학적 가치관의 허구성을 통렬히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士農工商(사농공상)의 四民觀(사민관)은 주자학에 있어서는 士(사)를 농ㆍ공ㆍ상과는 준별하여 四民(사민)의 으뜸으로 하였으나, 明末淸和(명말청화)의 학자들에 있어서는 견해의 차이가 크다. 陽明學(양명학)의 泰州派(태주파)를 연 王良(왕양)도 盬丁(고정)이었으며 그 완성자인 李卓吾(이탁오)의 聖人觀(성인관)(人間觀(인간관))에는 이미 士庶(사서)의 구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의 남녀의 평등함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조에 있어서도 星湖(성호)의 士農會一論(사농회일론)이라든지 나아가 楚亭(초정)의 士商同一論(사상동일론)은 벌써 四民(사민)의 평등관을 배태한 것으로서 전통적 四民觀(사민관)에 비하여 현저한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明來(명래) 士人(사인)의 실용적 저술로서 李時珍(이시진)의 <本草綱目(본초강목)> 宋應星(송응성)의 <天工開物(천공개물)>을 비롯하여 徐光啓(서광계) 李之藻(이지조) 등은 당시에 중국에 있는 제스윗드 교단의 신부들과의 협력으로 <坤與萬國全圖(곤여만국전도)>, <幾何學原本(기하학원본)>, <農政全書(농정전서)>등을 간행하여 士(사)의 농공상을 위한 실학의 기치를 올렸으며, 또한 명청교체기를 살았던 3대 사상가 黃宗義(황종의), 顧炎武(고염무), 王夫之(왕부지) 등은 공소한 이학은 나라가 망하는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 함을 실감하고 經世致用(경세치용)의 학을 제창하였다. 경세치용의 원리는 경서에서 구하고, 그 실행방법은 사서에서 구하는 실증적 방법을 썼다.
  이러한 착실한 연구방법은 드디어 淸朝(청조) 考證學(고증학)의 문을 열게 되었거니와, 아무튼 고증학의 의도하는 최상의 목적은 유교정신을 宋(송)ㆍ明(명)의 주관주의적 심성의 문제로 돌릴 것이 아니라, 원래의 경세적 정신을 되찾자는 데에 있었다.
  시기적으로는 중국보다 다소 늦게 꽃핀 조선조의 실학은 주로 英(영)ㆍ正朝期(정조기)를 중심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北學派(북학파)학자 홍대용ㆍ박지원ㆍ박제가로 대표되는 이들은 하가와 당파를 초월하여, 율곡의 <聖學輯要(성학집요)> 柳馨遠(유형원)의 <磻溪隧錄(반계수록)> 李瀷(이익)의 <星湖僿說(성호사설)> 등 經世(경세)의 學(학)을 宗(종)으로 하여 과감하게 北學論(북학론)을 주장하였으며 茶山(다산)에 이르러 조선조의 실학은 집대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華夷一也(화이일야)의 세계관
  洪大容(홍대용)은 <燕記(연기)>, 朴趾源(박지원)은 <熱河日記(열하일기)>, 朴齊家(박제가)는 <北學議(북학의)>를 각각 써서 北學(북학), 즉 淸朝(청조)의 선진적인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당시 尊明排淸(존명배청)적인 기운이 만연하고 있던 사대부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임진란과 두 차례의 胡亂(호란)을 경험한 조선조의 學人(학인)사이에 특히 주자학이 官學(관학)으로서 위치를 굳혀온 풍토에서 慕華(모화)사상에 경도된 나머지 北伐論(북벌론)마저 대두하고 있던 때에 淸朝(청조)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北學論(북학론)은 당시로서는 확실히 과감한 주장으로서 주자학적 세계관의 탈피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주자학적 세계관이란 華夷觀(화이관)을 말한다. 朱子(주자)는 천지 만물이 5種(종), 즉 中華人(중화인)ㆍ夷狄(이적)ㆍ동물ㆍ식물ㆍ광물로 구성된다고 하며, 夷(이)는 中華人(중화인)과 동물의 중간적 존재로서 그들은 中華(중화)를 중심으로 하고 四方(사방)에 둘러져 있다는 그의 中華(중화)사상은 중세적 우주관인 天圓地方說(천원지방설)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북학파학자들은 이 천원지방설을 타파함으로써 거기에 근거한 중화사상 자체를 깨트릴 수 있었음은 주목할 사실이다. 金鍚文(김양문)(1658~1735)은 <易學圖解(역학도해)>를 저술하여, 地動天靜說(지동천정설)을 주장하였으며, 홍대용은 地圖說(지도설)은 물론 지구의 자전설을 창시하였다.
  (물론 이보다 앞서 16C 중엽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하였으나, 이단으로 금지되어 아직 동양에 소개되지 않았다.) 그의 ‘毉山文答(의산문답)’에는 道學者流(도학자류)에 비유한 虛學(허학)에 대하여 실학을 대표하는 實翁(실옹)이 그 허구성을 논파하는 자리에서 地轉說(지전설)을 과학적 지식의 문제로 끝내지 않고 上下從屬的(상하종속적) 華夷(화이)의 세계관을 파충한다. 즉 “중국인은 중국으로서 正界(정계)로 삼고, 서양으로서 到界(도계)를 삼으며 서양은은 서양으로서 正界(정계)를 삼고 중국으로서 到界(도계)를 삼는다.… (세계는) 橫界(횡계)도 없고 到界(도계)도 없으며 다같이 正界(정계)인 것이다”고 하여 華(화)와 夷(이)를 상대화시켜 버림으로서 화이사상의 논리기반을 허물어버린다. 여기에 ‘華夷一也(화이일야)’의 새로운 세계관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조 실학자들의 화이관과는 달리 중국에는 문화중심의 화이개념이 있다.
  이는 公羊學派(공양학파)의 주장으로서 夷狄(이적)도 문화만 가지면 華(화)가 될 수 있다는 설이다. 淸(청)의 雍正帝(옹정제)는 이 설을 수용하여 주자학적 화이의식을 뿌리 뽑고자 曾靜(증정)의 逆謀(역모)사건을 일으켜 華夷一也(화이일야)를 역설하였다.
  그의 이론은 지리적인 中原(중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출생지가 비록 변방이라 할지라도 文化(문화)만 갖추어있으면 華夷之別(화이지별)이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 구분과 문화의 유무가 일체화 되어 있던 주자학적 화이론을 부정하고 문화에 강조점을 두어 청조지배를 합리화 시키려는 정책적 의도에서 취해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비슷한 무렵에 華夷一也(화이일야)의 새로운 해석이 양국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天日地方(천일지방)설에 근거한 四方(사방)의 기독교적 세계질서가 비슷한 시기에 사상가들에 의하여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사실도 단순히 오비이락이라고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무렵 세계는 점차 하나로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당시의 東亞三國(동아삼국)은 대체로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었으나, 상호교섭을 원하는 민간의 염원은 그대로 방치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니, 密貿易(밀무역)이 성행하였던 所的(소적)이며, 지리상의 발견이 역시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제스윗드교단의 선교사가 포튜갈 商船(상선)을 타고 來華(내화)하고 서양의 潮流(조류)뿐만 아니라, 和蘭(화란)의 학술이 일본에 전해져 소위 蘭學(난학)이 성립한 것도 華夷一也(화이일야)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형성과 有關(유관)하게 진행되어 간 것이었다.
 
실학의 의미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은 일정한 시대와 사회의 소산이었다.
  하기야 어느 학문치고 실학 아닌 것을 창시 연구할 리는 없지마는 동아史(사)에 있어서의 17C에서 19C에 이르는 시기의 실학은 이른바 실학으로서의 객관성을 지닌다. 물론 청조의 考證學(고증학)이나 日本(일본)의 蘭學(난학)을 실학이라고 凡稱(범칭)하는 데에는 다소의 문제가 없지도 않겠으나 그것이 지닌 근대지향적 실증적 내지는 실용적 성격을 감안하면 호칭문제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실학에 대한 역사학적 평가에 있다할 것이다.
  본고에서 살핀 바와 같이 실학이 성립하게 된 데에는 당시 사회적 변동에 의한 서민층의 대두와 세계사적 상호교섭의 움직임 등이 당대의 지성인으로 하여금 四民平等(사민평등)의 사회관과 華夷一也(화이일야)의 세계관을 확립하게 하였던 것이며, 이를 또 역설적으로 말하면 실학자들의 평등의식과 새로운 화이관이 근대적 사회와 그 세계를 창출하는데 전위적 역할을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실학을 개화사상과 안이하게 접합시킬 수는 없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는 명말청초의 경세사상이나 고증학은 아편전쟁으로 새로운 자기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학을 개화사상과 잘못 연결시키면 서구화가 곧 근대화라는 도식을 긍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학이 성립하는 역사적 배경을 따지고 또한 그것의 역사적 배경을 따지고 또한 그것의 역사적 기능을 올바로 구명하면 거기서 우리는 실학의 정신내지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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