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개혁사상

봉건 經濟秩序(경제질서) 부정ㆍ자본주의 맹아 思想(사상) 고취
형시고하된 朱子學(주자학)… 現實(현실)대응 能力(능력)상실 의미
봉건 論理體制(논리체제)의 해방과 개혁모색


  이 원고는 ‘東國(동국)18輯(집)’에 발표된 ‘실학의 근대지향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췌, 수록한 것입니다. <편집자 註(주)>

  實學(실학)은 17~18세기에 虛學(허학)ㆍ空學化(공학화)한 朱子學(주자학)에 대하여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실용적인 ‘實(실)’의 學(학)을 하자는 학문이었다.
  實學(실학)의 발흥은 16세기 이후, 朝鮮王朝(조선왕조)의 封建的(봉건적)인 질서가 점차 해체(黨爭(당쟁)ㆍ戰亂(전란)등으로 제도의 붕괴)되면서 近代化(근대화)의 요인(곧, 수취체제의 개편에 따른 貢人資本(공인자본)의 성립, 상ㆍ수공업의 발달로 인한 商品(상품)ㆍ貨幣經濟(화폐경제)의 발달, 영농법 발달과 신분질서의 변화, 西學(서학)의 보급,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상하게 된 富農(부농)ㆍ商手工業(상수공업)층 및 서열계층에 의한 서민문화의 발달 등)이 싹트기 시작한 사회 환경 속에서 그러한 새로운 요인을 더욱 발전시켜 가려는 의지와 노력을 기울인데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實學(실학)은 비록 주자학적인 잔재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으나, 그 封建論理(봉건논리) 및 社會經濟體制(사회경제체제)에서의 해방과 改革(개혁)을 모색하려는 ‘近代志向(근대지향)’, ‘民族志向(민족지향)’ 적인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다. 실학자들이 시대변천에 대응하기 위하여 實事求是(실사구시), 經世致用(경세치용), 利用厚生(이용후생)등을 내세운 것은 그러한 학문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근대역사에 큰 영향을 준 實學思想(실학사상)의 近代指向的性格(근대지향적성격)을 다음에 요약해 보겠다.

1, 富國强兵策(부국강병책) 주장
  實學者(실학자)들은 16세기 이후에 쇠퇴된 조선왕조를 재건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혼란과 빈곤, 침체로부터의 극복, 그러한 사상적 대응책에서 나온 것이 富國强兵論(부국강병론)이었다. 柳馨遠(유형원)으로부터 丁若鏞(정약용)에 이르기까지 그들 經世思想(경세사상)의 기저에는 田制(전제) 및 세법개혁에 의한 국가재정의 충실과 兵制(병제)의 정비, (兵農一致(병농일치)사상) 기술혁신에 의한 산업재건(資本主義的(자본주의적) 萌芽(맹아)) 등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었다.
  먼저 富國論(부국론)을 보면 이는 이용후생론과 기술개혁론이 주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實學者(실학자)들의 이용후생론은 儒學(유학)본래의 이른바 ‘正德利用厚生性和(정덕이용후생성화)’라는 이념에 위배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곧 儒學(유학)에서 ‘正德(정덕)’→‘利用厚生(이용후생)’의 순으로 正德(정덕)을 중시하여 이를 1차적 개념으로 한데 대해, 실학자들은 정덕보다는 ‘이용후생’을 더 중시하여 이용후생을 1차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朴趾源(박지원)은 그의 저서 ‘燕巖集(연압집)’에서 ‘이용한 후에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한 후에 정덕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며, 朴齊家(박제가)도 利用厚生(이용후생)에 의한 民生(민생)과 국가재정의 구제 없이는 正德(정덕)을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 하고, 이 문제에 대한 士大夫(사대부)의 무관심을 비판하고 있다.
  利用厚生學派(이용후생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그 전의 논리인 중세적인 陰陽五行說(음양오행설)을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朴趾源(박지원)은 그의 ‘虎叱文(호질문)’에서 陰陽五行說(음양오행설)을 비판하고 ‘洪範羽翼序(홍범우익서)’에서는 五行(오행)을 實用(실용)위주의 利用厚生論(이용후생론)으로 발전시키었다.  朴齊家(박제가)도 이를 비판하여, 지금 ‘곡식을 가는 곳이 한 곳도 없으니, 水利(수리)가 없는 것이다. …또 寧海(녕해)지방의 銅(동)을 녹이지 못하니 쇠가 쇠가 아니고 불이 제 구실을 못하며, 통행하는데 수레가 없고 집짓는데 벽돌이 없다.’고 하여 五行(오행)중의 水(수)는 물의 水利(수리)로, 火(화)는 불의 火利(화리)로, 그리고 金利(금리)ㆍ木理(목리)ㆍ土利(토리)로 利用(이용)토록 역설 하였다.
  實學者(실학자)들에 의하여 利用(이용)이 중시된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利用(이용)의 ‘用(용)’은 곧 ‘器(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종래 用(용)이나 器(기)는 道(도)나 體(체)의 下位(하위)개념으로 ‘君子不器(군자불기)’를 이상으로 하는 유교적 이상에서는 가히 학자가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실학자들은 오히려 그 用(용)이나 器(기)를 학자들의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技術改革論(기술개혁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洪大容(홍대용)은 ‘湛軒書(담헌서)’에서 ‘오직 器機(기기)를 만들어서 이것으로써 측정하며, 數(수)를 청하여 그들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자’고 대담한 건의를 하였으며, 崔漢綺(최한기)는 西法(서법)의 습득을 강조하여 ‘先行後知(선행후지)’의 실증적 경험론을 바탕으로 인간 능력의 효율성을 개발하려고 하였다. 이밖에 金正喜(김정희)도 서학의 ‘用器(용기)의 術(술)’을 익힐 것을 역설하였다. 그들의 목적이 빈곤과 침체된 산업을 재건, 民力(민력)과 富國(부국)을 이루려는데 두었음은 물론이다.
  다음 그들의 强兵論(강병론)에 대해 살펴보면, ‘兵農一致(병농일치)’, ‘産軍一致(산군일치)’ 론에 입각, 兵制(병제), 兵器(병기), 築城法(축성법), 軍事施設(군사시설), 軍糧(군량), 군사기술 등의 개선, 보완책에 역점이 두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倭亂(왜란)ㆍ胡亂(호란)의 2차에 걸친 戰亂(전란)으로 노출된 國防(국방)책의 문란을 바로 잡아 이를 再建(재건)하려는 것이었다. 柳馨遠(유형원), 朴齊家(박제가), 洪大容(홍대용), 丁若鏞(정약용)등은 그런 이론가로서 이름이 높다.

2, 資本主義的(자본주의적) 萌芽思想(맹아사상) 고취
  주자학적인 경제관의 특색은 農業(농업)을 근본으로 하여, 人欲(인욕)과 利潤(이윤)추구의 자유, 企業(기업)의 자유 등을 억제하고 있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李瀷(이익)의 저서 ‘藿憂錄(곽우록)’ 錢論(전론)에서조차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 사상은 利用厚生派(이용후생파)(北學派(북학파))에 의하여 극복되어 資本主義(자본주의) 萌芽(맹아)사상을 고취하게 되었다. 柳壽垣(유수원), 洪大容(홍대용), 朴趾源(박지원), 朴齊家(박제가), 李圭景(이규경), 崔漢綺(최한기), 丁若鏞(정약용) 등은 그러한 이론을 정립한 인물들이다.
  丁若鏞(정약용)은 먼저 인간의 개별성을 강조하고 人欲(인욕)을 인정하였다. ‘鄭茶山全集(정다산전집)’ 詩文集(시문집)에서 그는 ‘周子(주자)는 無慾(무욕)을 주장하였으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몸이 있으면, 구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므로 食欲(식욕), 色欲(색욕), 物欲(물욕)등이 있는 것이다. 아주 無欲(무욕)한 사람이라면 善(선)도 惡(악)도 하지 못하고 文學(문학)도 産業(산업)도 못하는 棄物(기물)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利潤(이윤)추구의 自由(자유), 職業(직업)의 自由(자유), 居住移轉(거주이전)의 自由(자유)를 역설하여 ‘백성들이 利(이)를 쫓는 것은 물이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自由競爭(자유경쟁)체제가 갖추어 지면 ‘위에서 命令(명령)을 내리지 아니하더라도 백성들의 田地(전지)가 균등하게 될 것이며 위에서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貧富(빈부)가 균등해질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래야만 경제ㆍ사회안정이 이룩될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茶山(다산)의 이상과 같은 주장, 곧 人欲(인욕)과 利潤(이윤)추구의 自由(자유), 직업의 자유, 이전의 자유, 자유경쟁체제에 의한 경제안정을 꾀하려던 것은 근대 자본주의 이론에 아주 흡사한 것이었다.
  朴齊家(박제가)는 茶山(다산)의 이러한 人欲論(인욕론)을 ‘容奢論(용사론)’(필자의 견해임)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소비가 생산을 자극 발전시킨다는데 주목하여 검소한 것 보다는 차라리 소비를 자극하는 사치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容奢論(용사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실학자들은 생산을 중지, 상품생산 진흥책에 진력 하였다.
  이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농ㆍ공ㆍ상업의 진흥책과 技術改革(기술개혁), 四民皆勞(사민개로), 柳壽垣(유수원)이 말한 생산공장신설, 그리고 이른바 ‘省費(성비)’, ‘劣力(열력)’에 의한 산업의 합리적 운영 등으로써 상품생산을 증산하는 것이었다.
  한편, 實學者(실학자)들은 重商主義的(중상주의적) 海外通商論(해외통상론)을 제기하였다.
  朴齊家(박제가)는 ‘北學議(북학의)’에서 ‘지금 나라의 큰 병폐는 가난이라 하는데, 가난은 무엇으로 구제할 것인가 하면, 중국과 通商(통상)하는 길 뿐이다’하여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交易(교역)하는 것은 天下(천하)의 通義(통의)’라고 지적하고, 그 구체적 방안으로 日本(일본), 琉球(유구), 安南(안남) 및 西洋(서양)상인들이 와서 交易(교역)하고 있는 中國(중국)의 逝江(서강), 廣州(광주), 交州(교주) 등에 우리나라 상인을 보내어 교역할 것을 정부에 建議(건의)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단계적 해외무역을 구상하여, ‘국력이 조금 강해지고, 民業(민업)이 안정되면, 당연히 海外(해외)의 다른 나라(日本(일본), 西洋諸國(서양제국))와도 通商(통상)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최초의 자립적인 開國論者(개국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金(금)ㆍ銀(은)을 중히 여기어 國富(국부)를 貴金屬(귀금속)으로 평가하려는 重金主義(중금주의), 重商主義的(중상주의적) 貿易觀(무역관)을 제시하였다. 곧 朴齊家(박제가)는 外國(외국)에서 消費財(소비재)(月日消磨之物(월일소마지물)가 들어오고 金(금)ㆍ銀(은)(山川有限之具(산천유한지구), 千年不壤之物(천년부양지물))이 나가는 무역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茶山(다산) 또한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밝혀, 淸(청)과의 무역에 있어 金(금)ㆍ銀(은)을 수출하고, 비단을 수입하여 오는 것은 ‘나라에 不利(불리)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3, 民族文化(민족문화)의 價値觀(가치관) 부여
  實學(실학)의 근대적 民族志向性(민족지향성)은 民族文化(민족문화)에 대하여 價値觀(가치관)을 부여하고 있는데서 볼 수 있다. 우리 文化(문화)의 독자성에 대한 自覺(자각)으로 李瀷(이익)은 ‘本國史(본국사)’교육을 강조하였고, 洪大容(홍대용)은 ‘孔子(공자)가 九夷(구이)에 살았다면, 內外(내외)가 바뀌어져 域外(역외)를 중심으로 春秋(춘추)를 지었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安鼎福(안정복)은 ‘東國通鑑(동국통감)’ 序文(서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일을 소홀히 하고 우리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 일을 알지 못하는 진실로 가련한 일을 한탄’하여 이 책을 쓴다고 하고 있다.
  實學(실학)은 조선후기에 붕괴된 사회정치제도와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 民富(민부)와 國富(국부)를 이루려는 학문이었다.
  實學(실학)에는 朱子學的(주자학적) 封建秩序(봉건질서)를 완전히 청산치 못한 한계가 있었으나,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그 秩序(질서)를 부정, 近代化(근대화)를 하려는 意識(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비록, 實學(실학)은 당시 보수세도정권에 의하여 박해를 받아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 近代志向的(근대지향적) 성격은 開化思想(개화사상), 東學思想(동학사상), 民權思想(민권사상), 3ㆍ1獨立精神(독립정신)으로 이어져 한국 近代思想(근대사상)형성에 기저를 이루게 하였으니, 그 의의는 참으로 높다 하겠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