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철학적 기저

理氣論(이기론)에 압도돼 歷史現象(역사현상)으로만 보기 쉬워
“實(실)은 實踐躬行(실천궁행)의 윤리적 自覺(자각)이 전제되는 것”


  봉건왕조 朝鮮朝(조선조)에서의 實學(실학)의 탄생은 世界史的(세계사적) 요청에 의한 서민 계급의 대두, 성장을 배경으로 가능했다. 따라서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과 비판으로부터 출발했고, 가치관을 비롯한 생활전반에 걸친 근대적 개혁 사상을 표현했다. 實學(실학)의 탄생 배경과 발전, 역사적 意義(의의), 그리고 지금까지 계승돼 온 精神(정신)을 살펴본다. <편집자 註(주)>

Ⅰ,
  實學思想(실학사상)에 關(관)한 論議(논의)는 實學(실학)이라고 할 때 實字(실자)와 또 경위에 關(관)하여 多樣(다양)하게 展開(전개)되어있다. 그러나 近來(근래)의 實學思哲(실학사철)에 對(대)한 硏究結果(연구결과)는 어느 정도로 實學(실학)이 당면하고 있었던 實學槪念問題(실학개념문제)와 그의 哲學的(철학적)기초에 關(관)한 肯定的(긍정적) 태도가 선명한 위치에 선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實學(실학)의 硏究(연구)가 經世致用(경세치용), 利用厚生(이용후생), 實事求是(실사구시), 等(등) 세 분야의 特物(특물)을 가지고 論(논)해 왔으며 이러한 세 分野(분야)의 역사적 필요성에 관한 역사현장으로서의 實學(실학)을 主張(주장)하는 理論(이론)이 다분히 우세하게 表出(표출)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近來(근래)의 實學(실학)에 關(관)한 반성은 實學(실학)이 失學(실학)으로서 적어도 ‘學(학)’的(적) 體系(체계)로 가지기 爲(위)해서는 그 理論的(이론적) 肯景(긍경)이 뚜렷해 져야 한다는 再熙明(재희명)의 要求(요구)가 强(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만약 實學(실학)을 단순히 歷史現象(역사현상)으로만 취급한다면 그것은 마치 14,5世紀頃(세기경)의 西歐(서구)에 있었던 文藝復興(문예부흥)이 하나의 思潮(사조)로서 歷史現象(역사현상)이었지 學問(학문)으로 定立(정립)되지 못했던 것과 같이 한 時代(시대)의 思想的(사상적)경향이지 그것이 곧 學問(학문)은 아니었던 것과 같다.
  따라서 實學(실학)을 ‘實學(실학)’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한 時代(시대)의 歷史(역사)현상으로 定義(정의)하기에는 미흡한감이 없지 않다. 만약 歷史(역사)현상으로 理解(이해)하려면 ‘實學(실학)’이라 하지 말고 ‘實學的(실학적) 思潮(사조)’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타당하지 않을까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實學(실학)이 文字(문자)그대로 實學(실학)이라는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實學(실학)이 가질 수 있는 哲學的(철학적) 基底(기저)를 考察(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勿論(물론) 實學(실학)이 과연 哲學的(철학적) 기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筆者(필자)는 實學(실학)의 哲學的(철학적)기저는 있으나 아직 거기까지 硏究(연구)의 成果(성과)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哲學的(철학적) 기저의 可否(가부)가 論議(논의)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Ⅱ,
  일반적으로 實學(실학)이라고 할 때, 實(실)을 虛空(허공), 文(문), 華(화) 權(권)의 대립되는 말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實字(실자)의 뜻에 대하여서는 實證(실증), 實用(실용), 實定(실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이것을 思想性(사상성)을 내포한 개념으로 유도하여 科學性(과학성), 自由性(자유성), 現實性(현실성)을 뜻한다고 하기도 하고 여기에 精神(정신)의 機能面(기능면)으로 批判精神(비판정신), 實證精神(실증정신), 實用精神(실용정신)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實學(실학)의 特徵(특징)의 하나로서 근대 지향적이고 민족적 性格(성격)으로 소위 ‘近代化(근대화)의 先驅的(선구적) 役割(역할)’로 규정지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近代(근대) 指向的(지향적)이고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을 가져온 특성을 든다면 근대지향이 왜 안 되었고 민족적 자각이 왜 촉발되지 않았는가? 하는 원인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본다면 朝鮮朝(조선조) 후기의 實學(실학)은 朝鮮朝(조선조)라는 封建體制(봉건체제)를 부정하고 생각할 수 없고 그 봉건체제는 또한 性理學的(성리학적) Ideology를 곧 연관시키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朝鮮朝後期(조선조후기)의 實學(실학)은 儒學(유학)의 범주로 벗어나서 설명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性理學(성리학)과의 관계가 解明(해명)되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實學(실학)을 改新儒學(개신유학)이라고 부르는 일부 학자들의 理論(이론)이 可能(가능)할 수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어떤 儒學(유학)을 改新(개신)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朝鮮朝(조선조)의 統治理念(통치이념)의 理論的(이론적) 기초이었던 性理學(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反省(반성)을 의미하고 그것의 改新(개신)을 말한다. 그러면 性理學(성리학)의 어느 面(면)을 反對(반대)했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Ⅲ,
  性理學(성리학)이라고 해서 獨出(독출)한 학문은 아니다. 소위 孔子敎(공자교)로 儒學(유학)이라고 할 때, 그러한 儒學(유학)을 根本儒學(근본유학)이라 하고 이 근본유학이 역사적 변천과정에서 變化(변화)된 儒學(유학)의 하나로 性理學(성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性理學(성리학)은 시대적으로 唐代(당대)에 발전된 佛敎思想(불교사상)과, 老莊思想(노장사상)에 반대하고 漢民族(한민족)의 주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민족적 자각에서 異敎(이교)인 佛敎(불교)와 비정통인 老莊(노장)을 극복하고 漢族(한족)의 文化的(문화적) 우수성을 고양하기 위하여 佛敎(불교)와 老莊思想(노장사상)을 수용하여 형성한 宋代(송대)에 발생된 儒學(유학)의 새로운 이론이다.
  성리학은 周子(주자)의 太極圖說(태극도설)에 비롯하여 朱子(주자)의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에 의하여 集大成(집대성)되었다. 그리하여 性理學(성리학)은 太極論(태극론), 理氣論(이기론), 心性論(심성론), 修養論(수양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성리학은 理論的(이론적)으로 보아 우리의 現實論理(현실논리)의 可能根據(가능근거)는 自然卽天(자연즉천)에서 찾아 天(천)과 人(인)의 合一(합일)을 形而上學化(형이상학화)하는데 이기론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성은 理(이)라고 하여 이 理(리)는 論理的(논리적) 관념의 근거로 보아 그것을 仁(인)ㆍ義(의)ㆍ禮(예)ㆍ智(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四性(사성)은 곧 天理(천리)로서 變化(변화)될 수 없는 것으로 純善(순선)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純善(순선)이 人間(인간)의 本性(본성)이기도 하는데 이의 發現(발현)이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는 惡(악)이 나오는 것은 氣(기)의 작용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氣(기)로 잘 조정하고 본래의 理(리)를 들어내기 위하여서는 居散(거산), 窮現(궁현)의 格務敎知(격무교지), 誠意正心(성의정심)을 요구하여 人間(인간)의 내면적 自覺(자각)을 촉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人間(인간)은 內面的(내면적) 존재로 靜的(정적)인 自己省察(자기성찰)을 가장 높은 가치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內面的(내면적) 自己省察(자기성찰)만이 인간의 참다운 모습만은 아니다. 人間(인간)의 그러한 自己省察(자기성찰)의 궁극적 極處(극처)에 이른 이를 聖人(성인)이라 하였고 그러한 성인의 경지는 個人的(개인적) 安心立命(안심입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社會的(사회적) 擴充(확충)으로 外正(외정)의 道(도)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통적 儒學(유학)의 지향하는 바 修己治人(수기치인), 內聖外王(내성외왕)을 성리학에서도 표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이러한 實踐思想(실천사상)의 이론적 근거인 이기론과, 格物敎知(격물교지), 議意正心(의의정심)이 너무나 內面化(내면화)되면서 주관화 되는 경향이 생기게 되고 급기야는 空理空論(공리공론)에 치우치는 空疏性(공소성)을 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인 修己(수기)로 觀念化(관념화)되고 따라서 治人(치인)의 면인 經世的(경세적)인 面(면)이 소홀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朝鮮朝 性理學(조선조 성리학)에서는 더욱 두렷이 드러나고 그 병폐가 가혹할 정도로 심각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소위 조선조 후기의 經世致用(경세치용), 實事求是(실사구시)가 새로운 時代的(시대적) 要求(요구)로 계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實學(실학)은 소위 성리학의 공소성에 對(대)한 비판으로 실제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政治的(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政治的(정치적), 社會的(사회적), 經濟的(경제적) 現實(현실)은 언제나 時代(시대)에 따라 變(변)하게 마련이다.
  이 變化(변화)의 時代(시대)에 그것이 더욱 必要(필요)하다고 하기 위해서는 다만 現實(현실)에 依(의)해서만 아니고 性理學(성리학)의 根本(근본)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實學(실학)의 哲學的(철학적) 基底(기저)가 되리라는 것이다.

Ⅳ,
  本來(본래) 修己治人(수기치인)이란 그것이 別個(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兩面性(양면성)이다. 自己自身(자기자신)을 닦으면 다른 사람도 본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나는 治人(치인)은 사람을 다스린다는 不平等(불평등)의 槪念(개념)으로 理解(이해)하지 않는다. 修己(수기)와 治人(치인)이 同時的(동시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修己(수기)가 治人(치인)하기 위한 功判的(공판적)인 目的(목적)에서가 아니고 人間(인간)의 內面的(내면적) 自覺(자각)에의 동경에 의한 天命的(천명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治人(치인)은 다스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본받는 다는 뜻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修己(수기)야 말로 ‘實(실)’이 있어야 한다. 그 實(실)이란 實踐躬行(실천궁행)의 의미이고 윤리적 실천의식이 强(강)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性理學(성리학)은 自家(자가)의 학설만을 고집하고 옹호하려는 사태로 경색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茶山(다산)은 이러한 실태를 개탄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성리학을 한다는 사람은 理氣(이기), 性情(성정), 本然(본연), 氣質(기질), 理發(이발), 氣發(기발) 등의 논쟁만 일삼고 산에 들어 앉아 고상한 헛소리만 도둑질 하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山林(산림)이라 존경한다. 배는 비었으면서 고담준론만 일삼고 버티고 있으니 堯(요)임금, 舜(순)임금, 周公(주공)이나 孔子(공자)의 학문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였다. 따라서 茶山(다산)은 根本儒學(근본유학)의 이념과 크게 어긋난 이유를 漠代(막대)와 宋代(송대)의 유학에서 찾고 있다. 漠代(막대)의 태고학이 學而不思(학이불사)에 미흡하고 宋代(송대)의 성리학이 思而不學(사이불학)에서 결여되었기 때문에 근본유학을 올바로 살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實學的(실학적)범주에 들어가는 많은 學者(학자)를 알고 있다. 즉 이수광(1963~1628), 柳馨遠(유형원)(1622~1673), 朴世堂(박세당)(1629~1703), 李瀷(이익)(1681~1763), 安鼎福(안정복)(1712~1791), 洪大容(홍대용)(1731~1781), 朴趾源(박지원)(1737~1805), 朴齊家(박제가)(1750~?), 丁若鏞(정약용)(1762~1836), 金正喜(김정희)(1786~1856), 崔漢綺(최한기)(1803~1879) 등이다. 과연 이들 중에 그때의 성리학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그들의 철학적 체계로 세웠는가를 탐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經世致用(경세치용), 利用厚生(이용후생), 實事求是(실사구시)를 주장하면서 그러한 현실적 병폐의 是正(시정)으로서만 저러한 주장을 편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럴만한 그들의 이론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곧 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것을 발견해야 하리라.
  우리는 오늘날 性理學(성리학)의 理(이)ㆍ氣論的(기론적) 體系(체계)에 압도당하여 사실 理氣論的(이기론적)인 해석이 아니면 哲學的體系(철학적체계)로 理解(이해)하지 않으려는 理氣論(이기론)의 權威(권위)에 盲從(맹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理氣論(이기론)은 모든 존재에 관한 槪念的(개념적) 理解(이해)에 어느 정도 적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圖式的 方法(도식적 방법)이 곧 모든 存在(존재)의 眞相(진상)을 이해시킬 것이라는 것도 하나의 先入見(선입견)이요, 眞理(진리)를 가리는 장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이 理氣論(이기론)의 권위로부터 해방하여 根本儒學(근본유학)이 素朴(소박)하게 주장했던 修己治人(수기치인)의 一元性(일원성)을 깊이 반성하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實學(실학)의 哲學的(철학적) 基底(기저)가 이제부터 더욱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實學(실학)이 참다운 實學(실학)으로서 歷史的(역사적) 現象(현상)을 超越(초월)하는 本質的(본질적)인 實學(실학)이 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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