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하게 말했으므로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실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위로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힘을 가진 것은 단 한분 계시지. 우리들은 아무런 능력도 업소”
  나는 다소 허탈한 심정으로 웃어보였다.
  “제가 다녀갔다는 말을 로사수녀에게는 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렇게 하겠소. 그럼 살펴가시오”
  시계바늘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내 감정의 시계가 칠흙 같이 캄캄한 밤을 지나고 있었다. 걸어나오면서 돌아다보았다. 만약 지금 딩동댕동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내가 죽어가면서 이 순간을 조금은 아름답게 회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은 처참한 기분이었다. 제에길할. 그렇게나 크고 엄청난 神(신)의 손길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어. 억지로 눈물을 참고 오다가 친구나 형제에게 다친 상처를 보여주며 으앙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아이 같은 심정이겠지.
  몇 시간 전에 지나온 길이었는데도 형편없이 낯설었다. 두려움까지 밀려왔다. 언젠가 상공에서 맛보았던 초조로움인지도 몰랐다.
  9호실이 제방이에요.
  그 여자를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욕의 냄새를 숨기지 않고 그녀의 음성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퇴, 하고 입안의 침을 모아 뱉었다.
  “그 힘을 가진 것은 단 한분 계시지. 우리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소”
  엿먹어라 늙은 신부야. 로사 수녀는 좋은 아이라고? 그러나 시원하게 욕을 퍼붓는다 해도 우울한 가슴을 씻어 내릴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참하게 떠오르는, 이미 동정이 아닌 나의 욕망이 슬픈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다시한번 이제는 상당히 먼 불빛으로 깜박이는 수녀원과 성당을 바라보았다.
  -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 지니라ㅡ.
  아름다우나 관념적이고 창백한 식물의 말. 그리고 이미 땅 속에 묻힌 자들의 자위. 나는 신부 앞에서와 같이 고개를 저었다.
  “40분이나 있어야 돌아가는 차가 있을 건데….”
  표를 끊어주는 가게집 안주인이 말했다. 40분이나 무위롭게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차 외에 다른 트럭이나 군용찝차라도 지나다니지 않습니까?”
  “글쎄요. 눈이 엔간해야지요. 왜 그냥 걸어 나가시게?”
  “그러다 아무거나 세워 타고 가지요 뭐”
  먼지가 보얗게 쌓여 손이 검게 묻어나는 병 콜라를 반쯤 마시다가 그대로 두고 일어섰다. 높새바람 푀엔현상, 게다가 진눈깨비까지 흩날리고 있었다. 가게집 여자의 말대로 고르지 않은 일기 탓인지 차가 한 대도 지나지 않았다. 속력을 내어서 달리다가 만약 나를 그냥 지나 버린다면? 풍대리 골짜기에 나 혼자 매몰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핏기 있는 몸뚱이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 퍽 기쁘게 여겨졌다. 내 옆에서 별 다른 단서 없이 쉽게 죽어나가던 녀석들이 걸어온 길에도 이와 똑같은 진눈깨비와 절망이, 사랑과 미움이 엇갈려 범벅되어 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또한 내가 죽고난 다음 내 침대를 차지하고 죽어나가는 녀석들도.
  …로사수녀.
  이제는 너의 이름을 잊었다 로사수녀. 네가 걱정하던 부러진 다리는 멀쩡히 나았으므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다가 헛되이 돌아간다. 차를 기다리는 정류장의 허름한 의자에서 너를 그리워했다. 어머 저런, 많이 아파? 하고 깜짝 놀랄 네 모습이 혹은 아 너무 많이 말랐어. 밥은 제대로 먹는거야? 하고 따져 묻는 네 모습이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너 역시 검은 두건의 뒷모습을 보이며 고요히 웃었을 것이라는 점을 비로소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나….
  헤드라이트가 깜박거리며 버스가 달려왔다. 꽤 걸어온 모양이었다. 혹시나 버스가 나를 그냥 지나칠까 싶어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흔들었다. 버스가 끼익 마찰음을 내며 멈추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텁텁한 차안의 훈기로 인해 내가 꽤 떨면서 걸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으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비몽사몽 헤매며 나는 여기가 어딘가 싶어 눈을 번쩍 떴다. 창 안의 세계에서 밀려난, 그래서 창 밖에 바람 부는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나를 계속 따라오는 병든 남자의 얼굴이 차창에 우울하게 매달려 있었다. 결국은 따라오기에 지쳐 창안의 세상을 포기하고,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죽어서 뻣뻣하게 굳어가고 식어갈 얼굴. 그러자 그 얼굴은 내가 평생 쓰다가 버릴 가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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