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어의 범람…말에 대한 재인식 싹텄으면


  이제 東國人(동국인)은 적지 않다. 점심시간을 전후한 캠퍼스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이상 또한 적지 않은 말들이 오가는 것 같다. 동악에 넘실거리는 풍부한 추억이 담긴 말들이 오고 감에 있어선 상당히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서로 얘기하는 사람 개개인에게서 말의 중요성이 그대로 묵살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거친 말이 오가는 경우를 일례로 들 수 있겠으나 여기서 새삼 이를 언급함으로써 쉬이 고쳐질 성격의 문제가 아님은 일반화된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예로서는 여학생들간의 대화에서도 서로의 이해가 대립될 때 토라져 서로 말을 기피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말의 참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말이란 자주하고 대내외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세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가지고 있는 감정과 혼자서 공부한 것을 자기 내면화만 시킴으로써 전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때 말의 중요성은 묵살된다고 여긴다.
  ‘차라리 밀 없는 항아리는 막을 수 있지만 코 아래 가로 놓인 입은 막기 어려우니라’고 ‘明心寶鑑(명심보감)’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거니와-이 말은 내부에 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겠지만-말의 중요성을 각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기억해 두면 좋겠다.
  마하트마 간디는 1주일 중 하루는 禁言日(금언일)로 정해놓고 그날은 모든 일을 글로 써서 했다고 한다.
  점차 속도의 시대를 달리고 있는 우리는 속출되는 많은 造語(조어)와의 만남 속에서 이해가 상충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써야 하고, 말을 함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해 괜시리 현학하는 식의 넋두리는 하지 말아야겠다. 말에도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볼 때 우리 동국인들은 말을 아름답게 하는데 앞장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겠다.
  책속에 진리가 있다. 책은 글로 만들어진 것이고 글의 아버지는 말이다. 그러므로 곧 ‘말은 진리다’라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겠는가.
  동국의 친우들이여. 우리는 동국의 脈(맥)을 찾을 때가 되었다. 가장 원초적이고 바탕이 되는 것부터 알고 차츰 사회에로의 접근이 필요하며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대한 異見(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이 원초적, 바탕이 되는 것들은 말(言(언))뿐만 아니라 많이 산재해있다. 이것을 각자 집안에서 정리하여 만든 것이 家訓(가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성인으로서 아니 東國人(동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말의 조탁(彫琢)에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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