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회상

文化史上(문화사상) 一大光明(일대광명)의 성취기
中代前後(중대전후) 사회상 새롭게 硏究照明(연구조명) 돼야
新羅佛敎(신라불교)의 내용, 수준은 매우 獨步的(독보적)


  1,
  일반적으로 사회상을 더듬는 과제는 큰 난점이 있다. 원래 보통사람의 보통 일은 예나 지금이나 기록되지 못한 것이 예사이며, 또 제반 資料(자료)의 그런 면의 종합 분석은 별로 안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올라간 신라의 경우 그 점에서 더욱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신라사회의 최대 강점인 上下(상하)의 和合的(화합적) 특성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신라 帳籍(장적)에 보인 中下代(중하대)경 농촌사회의 편모를 그 인식문제만 언급하려고 한다.
 

  Ⅱ,
  三國(삼국)중 신라는 立地(입지)가 타 제반 기초조건이 가장 불리한 편이며, 특히 선진국의 압력 속에 늘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이러한 약점이 逆(역)으로 내부의 人和(인화) 단결 쪽에 작용하여 끝내는 天時(천시)나 地利(지리)의 장점을 앞지른 최대의 성과로 귀결될 수 있었다.
  신라는 처음부터 고구려, 백체에 비하여 獨走(독주)보다는 연합적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즉, 始祖(시조)설화에서부터 村長(촌장)의 합의에 의하여 王(왕)에 추대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朴(박), 昔(석), 金(김) 3姓(성)이 交立(교립)되는 것도 그렇고 4세기 奈勿麻立干(내물마립간)부터 金氏王朝(김씨왕조)의 고정을 본 후에도 점진적으로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었다.
  法興王(법흥왕)때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은 파란 곡절을 겪게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王權(왕권)과 귀족세력이 조화타협을 보면서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文物(문물)제도의 수입 운영에서 늘 볼 수 있는 특색의 하나는 다른 나라처럼 王(왕) 내지 귀족 등의 독선에 흐르는 폐단이 적고 또 탄력성이 있는 점이다. 신라는 上下(상하) 모두가 고구려 백제의 외압 극복을 제 1우선으로 삼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음 진흥왕 대에 가서도 그런 몇 가지 상황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참으로 흥성할 수 있게 된 점인데 정치가 불교를 이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불교진흥이 정치비약을 가져오게 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즉, 佛金利(불금리)의 첫 도입, 번역된 불경의 대부분이 수입을 통하여 불교에의 근원적 접근과 앞으로 原典工夫(원전공부)의 특출한 활성화를 도모한 사실이다.
  또 國統制(국통제)나 黃龍寺(황룡사) 창건 등으로 護國(호국)정신을 몰아세우는 한편, 花郞(화랑)제도를 개편하여 원칙이 통하고 上下(상하)가 일체화를 이루는 참 교육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니 이 화랑교육이야말로 가장 큰 강점이자 대표적인 和合(화합) 사례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새로운 국가적 개편이니 만큼 종래의 민간적 전통은 무시됨직한데 신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舊(구)조직과 새 官廳(관청) 조직원리를 잘 결합시켜 半官半民(반관반민)의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제도로서 육성해 나갔기 때문에 통일 후 國學(국학)의 완비가 있게 된 후에도 병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花郞(화랑)이라는 眞骨(진골)자제가 6두품 이하의 王京民(왕경민)자제와 上下身分(상하신분)을 초월하여 뜻 맞은 사람끼리 어울려 一國(일국)의 청소년조직을 이루고 거기에 당대 知性(지성)인 승려가 지도교사가 된 시스템은 가위 이상적인 발상과 전개라고 할 만하다.
  더욱 이들이 가장 발랄하고 감수성이 좋은 하이틴 시절에 집중적으로 名山大川(명산대천)을 敎場(교장)삼아 道義(도의)연마와 歌舞(가무)를 즐기며 智德體(지덕체)의 종합교육을 받게 하였으니 그 實效(실효)는 당연히 놀라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심인물인 花郞(화랑)은 개인적으로도 특별수련을 더하였으며 종교적 수단과 방법을 원용하여 현장에서 愛土(애토), 愛鄕(애향), 愛國(애국)정신은 물론, 天文(천문) 地理(지리)를 익히게 함으로ㅆ 그 相乘(상승)효과는 확실히 無敵(무적)의 戰士團(전사단), 특출한 國仙道(국선도)가 되어 三國(삼국)중 단연 으뜸의 성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또 和白(화백)회의나 골품제도는 귀족사회만의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사회적 보장과 규제를 통하여 당시 나름의 질서화와 세력유지를 합리적으로 추구한 것이었다.
 

 Ⅲ,
  신라는 또 불교문화의 전개에서 和合統一(화합통일)의 특성을 많이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원래 自己文化(자기문화)의 토대 위에 외래문화를 잘 소화 섭취하여 문화사상 一大光明(일대광명)의 성취기를 형성하였는데 당시 전제왕권하의 귀족사회라는 한계를 넘어선 성과로 이어진 점은 오늘날 재평가를 요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계문화의 중심구실을 한 唐(당)과 활발히 文物(문물)교류를 하는 가운데 三國(삼국)의 문화를 한 차원높인 원리가 바로 융합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신라불교는 처음 敎學(교학)의 발달이 대단하였지만 唐(당)처럼 각 종파로 분립되기 보다는 서로 겸통하고 淨土敎(정토교)나 密敎(밀교)같은 신앙운동과도 합치되어 내용이 풍부하고 수준의 높이와 널리 퍼짐에 있어 매우 독보적이었다. 이리하여 신라불교가 중앙과 지방, 상층 하층에 화합적으로 통한 성격은 문화기층의 두께 위에 유‧불‧도 3교의 會通(회통)적 문화체계를 이룸으로써 동양 최초의 성공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의 君王(군왕)과 僧(승)‧ 郎(낭)은 일반적으로 정신적 自覺(자각)이 컸던 것 같다. 특히 승려들은 화랑과 더불어 準據的(준거적) 리더가 되어 전면에 나섰으나 그 성과는 고구려‧백제를 앞지른 것이 되었다.
  더욱 한 經(경)에 구애되지 않고 前後(전후) 어느 때 보다도 불경공부의 성과를 책으로 많이 남기며 평등을 강조하는 열반경 이하 如來藏(여래장)사상에 투철하고 또 보살戒(계)에 마음을 쏟아 利他的(이타적) 自律(자율)에 힘쓴 모습은 높이 평가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圓光(원광)을 비롯한 고승들의 3敎(교) 會通的(회통적) 이론과 방법의 토대 위에 元曉(원효)나 義湘(의상), 그리고 圓測(원측)같은 세계 史的(사적)수준의 학자, 이론가, 사상가, 실천가가 수없이 배출되기 된 것이니 이들이 한결같이 和諍(화쟁), 圓融無碍(원융무애), 폭넓은 새 唯識論(유식론)을 전개 하에 신라의 조화 통일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通社會(통사회), 時代的(시대적)으로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신라가 佛國寺(불국사)라는 신념이 상하에 일반화되고 中代(중대)의 번성과 문화의 광채는 그 가운데 들어난 것이다. 大王岩(대왕암)과 感恩寺(감은사), 佛國寺(불국사)와 石窟庵(석굴암), 그리고 奉德寺鍾(봉덕사종) 등등 萬古(만고)의 걸작은 다 그런 과정의 깊은 신앙과 정진 등 특별한 연유를 가지고 이루어진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이 中代(중대)를 도출하고 古(고) 신라를 大(대) 신라로 비약시킨 三國統一(삼국통일)전쟁과 성취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즉, 毘曇(비담)의 亂(난)후 金庾信(김유신)등 새 귀족세력이 지방세와 제휴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과도 합세하여 大業(대업)을 달성시킨 점은 새삼 주목을 요하는 것이다. 외세개입이나 반도지역 위주의 통일은 일시적, 적략적인 것으로 內實(내실)보다 외형을 우위로 보아온 일부 경향은 마땅치 못한 견해였다고 할 밖에 없다. 上下(상하)의 절실한 의지와 요구, 조화 합치의 상승폭발 등 내적 조건의 성숙 없이는 외세의 협조나 외정의 성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위를 도외시하고서는 金庾信(김유신), 金春秋(김춘추) 등의 탁월한 지휘, 솔선수범, 그리고 승려, 花郞(화랑)의 殺身成仁(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이해하기 어려우며 上下(상하)일치의 난국 대처 없이는 7년 전쟁 끝의 唐(당)세 축출이 어려웠던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Ⅳ.
  신라는 통일 후 이른바 律令體制(율령체제)라는 統一(통일) 政治(정치), 經濟(경제), 文化(문화)질서를 각가지로 추진했는데, 三國民(삼국민)의 합세, 地方(지방)세의 中央(중앙)통합 등을 바탕으로 王權(왕권)의 事制化(사제화), 王民(왕민)의 近接(근접)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丁田(정전)이 주어지고 祿俸制(녹봉제)가 실시되게 되지만 그 결과적인 농촌사회의 모습은 단적으로 신라 村落文書(촌락문서)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 文書(문서)는 일반적으로 농민지배 方式(방식)을 찾는데 많이 이용되고 있지만 당시 사회상으로 戶(호), 口(구), 土地(토지)분배, 力役(역력)관계 등을 잘 볼 수 있다.
  특히 自營(자영)농민이 촌락단위로 많은 땅을 갖게 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구의 감소 현상이 나타나고 男子(남자)인구가 적어 力役(역력)의 무거움과 그로부터의 도피현상을 볼 수 있는 등 엇갈림이 있다. 또 下下戶(하하호)가 많고 거기에 노비도 배속되고 寄食(기식)인구도 있는 등 中代(중대)보다는 下代(하대)의 모습이 두드러진 인상을 준다. 이로써 보면 이 文書(문서)의 年代(연대)는 전성기 755년보다 내려잡은 815년 쪽이 많지 않을까. 이른바 신라 번영의 상징을 ㅗ기와집에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는 서울 경주의 소비적 모습을 많이 들지만 이것은 실은 下代(하대)의 정경을 기록한 것이니 건전했을 中代(중대)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가 번영의 극에 속화 타락되고 律令(율령)도 下代(하대)귀족의 독선을 규제하는 내용이 크게 들어난 것처럼 일방적 착취, 소비형상이 처음부터 그런 것 같지는 않는 것이다. 이리하여 中代(중대)전후의 사회상은 더 많은 연구의 축적과 새로운 방향설정에 의하여 조명될 과제로 남는 것이라 할 밖에 없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