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쌍탑미술

雙塔(쌍탑)의 근거, 敎理現象(교리현상)에 기인
佛國寺(불국사) 多寶(다보)ㆍ釋迦塔(석가탑) 대표적 쌍탑양식


차례
1. 연재를 시작하며
2. 新羅佛敎(신라불교)
3. 新羅美術(신라미술)
4. 新羅佛塔(신라불탑)
5. 新羅歌謠(신라가요)
6. 新羅(신라)남산유적
7. 新羅金石文(신라금석문)
8. 新羅古墳(신라고분)
9. 新羅(신라)화랑도
10. 新羅社會相(신라사회상)(골품제도를 中心(중심)으로)


(1)
  新羅佛塔(신라불탑)의 가장 두드러진 양식적 특징이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 될 수 있다. 그 첫째는 韓國佛塔(한국불탑) 全型樣式(전형양식)의 완성이요, 다른 하나는 쌍탑의 출현이다. 이들 가운데 前者(전자)의 경우는 한국불탑의 일반론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므로 이곳에서는 일단 論外(논외)로 하겠다. 다만 쌍탑의 출현은 삼국 이래의 전통적인 伽藍配置(가람배치)에 일대 변화를 주는 것이며 동시에 신라적 특수한 사항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해명이 요청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 쌍탑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에서 앞으로 더욱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단순히 교리적 배경에서 찾아온 신라만의 특수한 사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는 7세기 중엽 이후 신라 伽藍配置(가람배치)에 따르는 획기적인 변화에서 야기되는 것이냐, 아니면 삼국통일이라는 시대적 격동기에서 오는 사회 경제사적 측면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이 같은 몇 가지 관점은 어느 것 하나 명확한 해답을 우리에게 바로 제시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와 같은 發生史的(발생사적) 淵源(연원)은 신라 조형예술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를 던져줄 것이므로 이에 대한 주목이 요청된다.
  삼국시대 塔婆美術(탑파미술)의 공통분모란 한결 같이 목재를 기본으로 하는 高層樓閣(고층누각) 형식의 木塔(목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목탑의 유행은 곧 바로 목재의 취약성을 보상하기에는 너무나 큰 경제적 손실을 자초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영원을 지향하는 종교적 念願(염원)에 부합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같은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완은 서기 6백년 경을 전후한 시기에 반도의 서쪽 백제땅에서부터 출발된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익산 彌勒寺址(미륵사지), 또는 부여 定林寺址(정림사지)석탑의 출현이다. 이들은 이미 철저한 목탑양식을 石材(석재)로써 飜案(번안)한데 불과한 것이므로 석탑을 통하여 목탑의 양식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은 그 거대한 양탑이 동서에 상대해 있고 다시 최근 그 양탑 사이에 木塔址(목탑지)가 추정되고 있는 특수한 가람배치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독립된 塔院(탑원)으로 파악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문제 삼는 쌍탑가담설과는 이미 거리가 있다.
  이들 쌍탑의 존재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의 故土(고토)에서도 확인된 바 없고 오직 통일 이후 신라적 수용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반도 내에서 쌍탑의 출현은 신라 미술만이 지닌 특수한 현상으로 일단 받아들이고자 한다.

(2)
  물론 삼국불교의 전진기지였던 중국대륙에서도 쌍탑의 건축구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철저한 多層樓閣(다층누각) 형식의 塼塔(전탑) 계통이었다. 이에 비추어 신라의 경우는 삼국통일 직후부터 方形(방형)을 기본으로 하는 四天王寺(사천왕사)(679년), 望德寺(망덕사)(685년) 등 목조 쌍탑의 건립과 함께 곧 신라 典型樣式(전형양식)의 석조쌍탑을 완성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즉 신라 東海口(동해구)의 感恩寺(감은사)(682년), 千軍里寺址(천군리사지)(8세기전반), 佛國寺(불국사)(751년), 葛項寺(758년), 등의 대표적인 동서 3층 석탑을 비롯하여 이후 9세기의 석조 쌍탑들은 현저한 변화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十-一支(십-일지)나 八部衆(팔부중)과 같은 浮彫像(부조상)의 등장으로 흐르고 많다. 그것은 완숙한 신라조각의 토대 위에서 탑파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 놓이는 주요 작품들은 遠願寺東西石塔(원원사동서석탑) 경주 南山里東西石塔(남산리동서석탑) 崇福寺址(숭복사지)동서석탑, 雲門寺(운문사)동서석탑, 華嚴寺(화엄사)동서석탑 등 상당수에 달하는 쌍탑이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쌍탑의 발생에 대하여 혹자는 對稱性(대칭성)을 좋아하는 중국적 발상이니, 또는 불상에 비하여 저하된 塔婆(탑파)의 비중을 높이려는 의도라느니, 또는 法華信仰(법화신앙)에 따르는 二佛並座(이불병좌)의 사상 등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신라일대를 통하여 造塔經(조탑경)의 역할을 하고 있는 無垢淨光大陀羅尼經(무구정광대타라니경)에서는 이와 같은 쌍탑설의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舍利莊嚴具(사리장엄구)로서의 小塔(소탑)의 功能(공능)을 들고 있으며 나아가 이와 같은 사리장엄의 法式(법식)이 쌍탑이나 單塔(단탑)을 막론하고 유물로써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현상을 앞서 말한 교리적 배경, 가람배치,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입각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교화적 배경이란 몇 가지 수긍할만한 근거를 지닌다. 즉 탑파와 같은 신앙적 조형체인 쌍탑의 등장에 단순히 대륙적기호성이나 탑파신앙의 강조 등으로 설명되기에는 그 호소력이 약하다. 그것은 기호에 따르는 문제도 아니고 二元的(이원적) 信仰體系(신앙체계)에 대한 문제도 아니다. 동시에 탑파신앙에서 불상에로 신앙대상의 주체가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보다 훨씬 앞선 기원1세기경 불상의 출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또한 당위적 사실로 불도들에게는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시대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지닌 통일신라시대에 출현되는 쌍탑의 근거는 전적으로 교리적 현상에 기인될 수밖에 없다. 이것의 조형적 극치가 바로 9세기 중엽 토함산 佛國寺(불국사)의 多寶(다보), 釋迦(석가) 兩塔(양탑)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즉 法華經(법화경)의 寶塔說(보탑설)에 따르는 석가 설법에 대한 多寶如來(다보여래)증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통일기의 전형 석탑들이 가람의 동서에 대칭으로 건립되어 가람장비의 華飾(화식)을 다했다고 생각된다. 즉 이들이 조형적으로는 법화경의 塔說(탑설)을 따르는 것이고 신앙적으로는 無垢淨經(무구정경)의 金利莊嚴(금리장엄)에 충실하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가람배치에 따르는 변화역시 多寶(다보)·釋迦(석가)의 대표적 두 如來(여래)의 聖體(성체)에 대한 신앙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탑파의 相輪部(상륜부)에서 높이 속은 擦柱(찰주)가 뜻하는 바와 같이 佛身(불신)의 下降(하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쌍탑의 발생이 단순히 가람의 정비에 따르는 배치상의 문제가 아니라 多寶(다보)·釋迦(석가) 兩大佛(양대불)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다보탑이 金當(금당)쪽에서 볼 때 왼쪽에 위치하고 석가탑이 오른쪽에 놓이는 것은 이들의 主伴(주반)에 따르는 體用(체용)의 문제로서 다른 기회에 더욱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쌍탑의 발생이 시대상 내지 사회경제사적 의미에서 부각되어야 한다는 말은 반도통일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함께 연관하여 생각되어야 한다. 국내에 현존하는 30여쌍 60여기에 달하는 쌍탑이 경북지구에 偏在(편재)(전체의 2/3)되어 있고 그것도 신라 국도 月城(월성)지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석탑의 층수 역시 獐項(장항)리 동서탑과 하엄사 동서5층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3층으로서 그 정형을 삼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들 양탑 역시 양식적으로 또는 시대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지 않으면서 동일한 장소에 대립하여 건립된 사실이 주목된다.
  이들 5층 쌍탑 건립의 시대적 선후관계는 차치하고라도 이 시기에는 이미 多層樓閣(다층누각) 형식에서 3층탑으로 그 정형을 잡았다고 하겠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遺址(유지)만 남은 四天王寺(사천왕사) 등지의 木塔(목탑)에서도 바로 적용되었다고 짐작된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강력한 국력의 뒷받침 아래 반도내의 文物(문물)에 있어서도 통일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바로 신라 쌍탑미술의 발생이며 독특한 新羅式(신라식)의 전형양식을 완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3)
  신라 불교를 교리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는 願曉(원효)의 通佛敎(통불교) 사상을 단연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諸宗(제종)의 分化(분화)된 교리적 편견이나 아집을 一乘(일승)이라고 하는 가장 원만한 수레에로 統攝(통섭)해 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분석적 思考(사고)속에서 출발하되 낱낱의 個體(개체) 그것은 전체 속에서의 別相(별상)이며 동시에 그 같은 個體性(개체성)은 總相(총상)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는 유기적 존재임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신라불교는 二元的(이원적)이기보다는 總和的(총화적)인 일면이 강조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다시 二元的(이원적) 分化過程(분화과정)을 겪어야 하는 쌍탑의 발생은 바로 法華思想(법화사상)에서 출반되는 主伴(주반)과 體用(체용)의 원리로서 그 해석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들은 개체(單一塔(단일탑)에 근본을 두고 있으면서 총화의 전체성에서 그 조화의 원리를 찾으려 하였다.
  이것은 바로 신라 쌍탑미술의 일대 凱歌(개가)이다. 그 출발이 사천왕사의 목탑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 양식의 완성은 東海國(동해국)의 感恩寺(감은사) 쌍탑, 즉 삼국통일의 기념비적 대탑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쌍탑미술의 최고봉은 한국석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불국사의 쌍탑에서 그 경이적인 예술세계를 만난다. 이것은 바로 신라인의 사상과 예술의 접합에서 다시 한번 신라인의 예지를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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