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신문 창간 33주년에 즈음하여

責任性(책임성) 결여된 新聞製作(신문제작) 脫皮(탈피)해야
學生(학생)이전에 記者(기자)요구하는 二律背反的(이율배반적) 大學新聞(대학신문)
專門家(전문가)부족, 日刊紙(일간지)시설 이용으로 創造性(창조성) 缺如(결여) 돼
大學新聞社(대학신문사), 痲藥(마약)과도 같은 誘惑(유혹)의 늪
製作者(제작자)와 讀者(독자)사이의 必要性(필요성)일치할 때 存在價値(존재가치)
進步(진보)와 保守(보수)가 서로 調和(조화)이룰 때 新聞發展(신문발전) 가능해


  1983년은 漢城旬報(한성순보)가 1백주년을 맞는 해이며 東大新聞(동대신문)이 創刊(창간)33주년을 맞는 해이다. 大衆(대중)의 여론을 형성하고 형성된 여론을 수렴하는 매체로 신문이 중요성은 점점 극대화 되고 이에 부응 大學新聞(대학신문)의 反省(반성)과 더불어 그 나아갈 방향을 알아본다. <편집자 註(주)>


  금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漢城旬報(한성순보)’가 창간된 지 1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 유엔이 정한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해’이기도 하다. 이에 발맞추어 우리나라 정부는 금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하고 컴퓨터의 개발 등 정보산업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한국 신문들은 금년의 신문주간표어를 ‘언론이 국제화’로 내걸고 개방사회에 걸맞은 세계 속의 한국 언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높은 기치를 들고 있다. 주요 일간신문들은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이해서 언론의 국제화에 따른 갖가지 특집을 꾸며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들 나름대로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신문주간을 맞이해서 우리나라 대학신문의 어제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대학신문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나온 학생신문은 1898년 1월1일 培村學堂(배촌학당)에서 주간으로 발행한 ‘협성회회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 대학신문의 효시는 1946년 3월5일에 창간된 ‘京城大學豫科新聞(경성대학예과신문)’으로 보고 있다. 37년이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 된다. 그 후 많은 대학들이 신문을 발행하여 오늘날에는 전국 98개의 4년제 대학 가운데 97개의 대학이 대학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60만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발행되는 이들 대학신문의 영향력은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대학신문에 관한 제반문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대학신문은 대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학생ㆍ교수ㆍ학교경영자 나아가서는 대학과 관련이 있는 학부모, 동창을 포함한 전대학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대학신문은 대학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대학이 행하는 임무 즉 교육, 연구, 사회봉사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말로 바꾸면 대학신문은 그 대학의 창학이념의 구현, 학문과 창조적 활동의 촉진, 대학문화의 창달에 초점을 두고 있는 신문이다.
  대학이라는 개념이 옛날에는 상아탑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폐쇄된 특수사회였으나 오늘날에는 개방된 사회로 모모되었기 때문에 그 구성원 간이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게 되었고 더군다나 근대학문이 세분화됨에 따라 인접학문과의 접촉이 없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운 오늘의 대학사회에 있어서 대학신문의 가치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대학신문의 대학교육을 위해 존재하며, 대학교육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간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신문이 대학사회의 울타리를 떠날 때, 그것은 이미 대학신문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 우리 대학신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대학신문이 대학이나 대학인에 관한 문제 보다는 정치, 사회의 현실 문제를 대학생이 차원을 넘어서 과도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왔다.



  매년 신학기가 되면 대학 캠퍼스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난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대학생이 된 신입생들이 캠퍼스를 활보할 때, 대학가는 긴 동면에서 깨어나 활발히 움직인다.
  선배들이 후배들을 부르는 소리가 게시판을 꽉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면 나뭇가지나 돌, 벤치 등에 광고문을 붙여놓고 신입회원을 모집한다. 그 속에는 대학신문의 수습기자 모집광고도 있다.
  똑똑하고 유능한 새로운 얼굴을 찾는다는 면에서는 대학신문도 다른 서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사회의 일간 상업신문에서 견습기자를 선발 할 때, 그 경쟁률은 10¹~10²의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신문이 무기력하다, 재미없다, 잡지적이다, 획일적이다, 또는 읽을 것이 없다고 비난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기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신문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학신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간 20여년 동안 대학신문기자를 직접 선발하면서 느낀 것은 대학신문기자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선발된다는 점이다.
  대학 수석합격자는 물론 분필에 재능이 있고, 어학에 능통하고 사고력이 풍부하며 또 사교성과 인간관계가 좋고, 박학다식한 학생 등이 많이 모인다.
  어느 대학신문이든 그 곳에는 그 대학의 준재들이 모여 든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신문사에 가면 모든 것이 있다”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대학신문기자 출신들이 훗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도 그들의 자질이 우수함을 입증해 주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우수한 자질을 지닌 학생들이 대학신문에 들어 와서 모두가 소정의 일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하느냐 하면 그렇지가 못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만약 이들이 대학신문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남의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갔으련만 대학 신문기자가 되었기 때문에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이들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물로 국가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아도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신문은 영리를 추구하는 곳도 아니며, 학점을 얻는 정규 교과과정은 더 더욱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일반 사회의 상업신문처럼 정부와 사회를 견제하는 기능을 가진 그런 곳도 아니다. 학생들이 대학교육을 받으면서 남는 여가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선용하기 위한 과외활동의 하나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대학신문기자가 되려는 이유를 몇 가지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 전공학과 이외의 다른 학과 교수들과 학생들, 나아가서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자유로이 만나 지식과 인격의 함양은 물론 대학생활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둘째, 저널리스틱한 센스를 함양시키기 위해서
  셋째, 문필력과 편집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넷째,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서
  다섯째,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대학신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가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지망하게 되지만, 대학신문을 生活(생활)의 場(장)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대학신문기자를 과외 활동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신문사는 늪과 같다고도 한다. 또는 마약과도 같은 유혹성이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활자가 갖고 있는 하나의 마력이라고 하겠다. 자기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하여 그것이 활자화 되었을 때 갖는 즐거움이란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신문기자가 되면 학생들이 저지르기 쉬운 일이 몇 가지 있다. ①일반 기자로 착각하고 학생 신분을 망각하고 교수나 직원을 상대로 불손한 태도로 취재를 하는 경우 ②신문사 일을 이유로 학교수업을 게을리 하는 경우 ③학생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인화 되는 경우 ④엘리트 의식을 너무 강하게 가져 자기 환상에 빠지는 경우 등이다. 이 중에서 제일 나쁜 버릇은 학교수업에 충실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최악의 경우에는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는 불행을 초래한다.
  우수한 학생들의 집단인 대학신문사가 최근에 와서는 그 빛을 조금씩 잃어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학신문기자를 지원하는 응모 비율이 최근 들어 부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81학년도 입학생부터 적용된 대학졸업정원제 실시가 큰 변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문이 존재하려면 만드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 서로의 필요성이 일치 될 때 가능하다. 대중신문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신문 값이 비싸서 일반 대중들은 구독을 할 수 없었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 대량생산과 대량보급이 가능해졌고, 따라서 신문 값이 싸져서 누구든지 손쉽게 구독할 수 있게 되어 오늘의 신문이 존재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경영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개재된다. 아무리 내용이 좋고, 모든 사람들이 이상적인 신문이라고 평가해도, 경영이 어려우면 그 신문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학신문들에게는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다. 매학기초가 되면 학생들이 내는 구독료(교비)와 광고비를 재원으로 해서 신문을 만들기 때문에 일간 상업신문들이 겪는 경영의 어려움은 겪지 않고 있다. 우리는 보통 미국의 신문들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 대학신문들은 재정적인 문제에까지 책임을 지고 있다. 재원을 주로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데, 경영이 적자가 되면 신문발행을 스스로 중지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 대학신문은 재정적인 면에서는 어려움이 없지만, 몇 가지의 취약점을 안고 있다.
  첫째, 대학신문 제작을 본업으로 하는 전문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학신문의 조직표를 보면 학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총장이 발행인이고, 주간이 교수, 그리고 편집국장과 부장, 기자는 모두가 학생들이다.
  총장이나 주간교수가 신문제작의 전문인인 경우는 거의 드물고, 대부분이 보직교수로서 2년 또는 4년의 임기를 수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년 3또는 4학년 초, 즉 2년 내지 3년을 근무, 어느 정도 신문에 익숙해지려 하면 졸업을 하게 된다.
  지도하는 교수나 신문을 만드는 학생기자들이 이렇게 비전문인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대학신문들은 항상 문제점을 안게 된다.
  둘째, 대학신문은 이율배반적인 것을 학생기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학생기자는 기자이기 이전에 학생이다. 따라서 학생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즉 학교수업을 충실히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학신문의 입장에서 보면 신문을 정기적으로 발간해야 할 책무가 있다. 만일 신문이 제 날짜에 나오지 않으면 많은 독자들로부터 항의를 받게 된다.
  취재와 수업이 겹칠 때, 어느 것을 우선순위로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학생기자들의 큰 고충이 아닐 수 없다. 신문에 충실하다 보면 수업을 소홀히 하게 되고, 수업에 충실하다 보면 신문제작을 소홀히 하게 된다. 두 토끼 다 잡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19세기의 고전적 민주주의가 대중 민주주의로 발전되고, 산업구조의 변화로 새로운 중산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매스컴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기구가 거대화되면 될수록 인간은 원자화, 고립화, 부분품화 되고 있는데, 이를 보완시켜 주는 역할을 매스컴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매일 신문을 읽는다든가 TV를 시청하는 것은 실제로 생활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의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에는 언제나 적정한 양의 정보가 흐르고 있어야 한다. 신체에 적당한 양의 피가 순환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미 건강을 상실한 것이다. 같은 이치로 대학사회에 적당한 량의 정보가 흐르지 않으면 유언비어가 만연되고, 지하사문과 같은 다른 방법의 정밀수단이 출현한다.
  따라서 대학신문은 대학사회에 필요한 상기한 바의 적절한 량의 정보를 소통시켜 주는 수단의 하나로서 발행된다는 면에서 그 근본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좁게 보면 학교를 홍보하기 위해서나 대학교육을 위한 수단이 하나로서 발행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대학신문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가?
  대학신문도 넓은 의미에서는 신문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반신문의 기능인 보도, 교양, 비판, 오락, 환경감시등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학신문은 대학사회 내에서 발행되기 때문에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다.
  첫째, 대학신문은 무엇보다도 교육의 기능이 강하다. 대학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지적개발, 성격형성 그리고 숙련된 기술과 능력의 습득을 위한 지식을 보급하고 있다. 자기 대학의 교수 아닌 타대학의 교수나 사회저명인사들의 글을 게재함으로써 지식교육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 논쟁과 토론의 장을 마련해 둔다. 학문연구나 공공문제에 대한 합의를 밝히는데 필요한 사실을 제시하고 교환하여 대학사회에서 살아있는 대회의 광장 역할을 한다.
  셋째 통합이 기능을 한다. 대학신문은 교내외의 여러 의견을 종합함으로써 그 대학과 학생들이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며 문제를 푸는데 여론을 수렴한다. 애교심 고양이나 면학풍토조성을 위해서는 최적의 수단이라 하겠다.
  넷째, 홍보의 기능을 한다. 일반신문은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영합하는 기사를 많이 게재한다. 그러나 대학신문은 그 대학의 활동상황과 연구업적 등 여러 면모를 독자들에게 널리 홍보함으로써 대학의 얼굴 역할을 한다.
  상기한 바의 기능을 가진 대학신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몇 가지 반성할 점이 있다.
  첫째,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든다면 전문가의 결여와 일간신문 시설을 이용한데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대학신문발생 초기에 체계 있는 신문제작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신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신문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취미로 신문제작에 참여했었고, 그 당시에는 신문학이 정립되지 않아, 쓸 만한 편집 교과서가 없어 일간신문이 그 대용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풀이 된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현상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학생이 신분을 벗어난 비판의 기능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적이 많았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대학생 집단이 의견집단의 하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이것은 대학사회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들 가운데서도 대학신문기자들의 비중이 높아졌고, 그들의 소리가 바로 신문을 통해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학생들이 고충을 겪어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심지어는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대학당국이나 스승에 대해서도 학생의 신분을 넘어선 비판의 필봉을 휘둘러 물의를 일으킨 경우도 많았다. 즉 책임성이 결여된 일방적인 신문제작을 한 경우를 우리는 깊게 반성해야 될 줄 안다.
  셋째, 3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대학신문이 나아갈 방향을 아직도 정확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문제작을 완전히 학생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문인을 참여시키고, 학생은 과외활동의 일환으로 일부분만 참여시키는 것이 옳은지 조차도 아직껏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대학신문이 학교신문이냐, 학생신문이냐를 놓고도 실효성 없는 논쟁을 오랫동안 벌여오기도 했다.



  대학사회에 있어서 대학신문의 필요성은 부인할 수가 없다. 대학 내의 정보를, 즉 학생들의 소리는 학교당국에, 학교당국의 소리는 학생들에게 전달하며, 또 대화의 광장을 열어 대학의 여론을 형성하고, 나아가 대학사회에 필요한 양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대학의 목적수행을 보다 원활하게 하는 것이 대학신문이 추구하는 제일 중요한 목적이다.
  이 목적수행을 위해서 대학신문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의 대학신문은 먼저 전문인을 상주시켜야 한다. 학생들의 본분은 학업에 있기 때문에 우선 학업에 전념하고 남는 시간에 과외활동의 하나로서 신문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확립해야 한다.
  그 다음 학생들은 기사를 취재하거나 편집하는데 있어서 너무 자기세대들의 의견만 고집해서는 안 되겠다. 발전이란 언제나 진보와 보수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이지, 어느 한 쪽에 편재되어 있으면,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대학생들은 기성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비판하고 저항하는데 예민하다. 비판과 저항의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비판과 저항을 할 때, 기성사회가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또 개인과 사회, 국가가 전혀 고의가 없으면서도 자료의 부족이나 기술의 미숙 또는 능력의 한계 때문에 그런 것인지의 여부를 충분히 검토한 후에 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세가오가 사물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대학신문 제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신문의 기능 중에서 비판의 기능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요즘 우리의 신문이 공허하다든지, 또는 싱겁다거나 맥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실은 비판의 열의가 적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대학교육제도는 어느 나라이고 간에 그 나라의 정치체제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대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대학신문 역시 국가체제의 영향을 받는다. 국가가 안정되고 번영을 추구 할 때, 대학도 대학신문도 안정된다. 대학을 등지고, 교육과 거리가 멀고, 또 정치나 어떤 특정한 집단과 연루되어 특수한 목적을 띤 논조를 신문에 게재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대학신문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신문이란 대학의 본질인 심오한 진리탐구에 도움이 되고 그 대학 특유의 교육이념에 따라 대학인들이 대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각종 정보와 자료를 제공할 때 비로소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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