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에는 지난 날을 돌이켜보는 回憶(회억)의 즐거움이 있다. 지나온 세월이 유쾌한 것이면 그래서 즐겁고 슬픈 것이면 또 그런대로 回想(회상)해보고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28일은 중강당에서 졸업식을 갖는 날. 많은 학생들이 사회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생들에게 학창생활을 돌이켜보는 기회를 마련해보기로 했다. 지난 세월이야 어쨌건 많은 감회가 있을 줄로 안다. 筆者(필자)는 아무 구애됨이 없이 임의로 선정했다. <編輯者(편집자)>
 

아직 영글지 못한 과일을
徐潤吉(서윤길) <佛敎科(불교과)>

  그동안의 기쁘고, 또 슬펐던 일들이 야간열차의 불빛처럼 뇌리를 스친다.
  비정상의 웃음으로, 명예롭지 못하게 흥정되는 學點(학점)하며, 요행을 즐기는 자들에 의해 장식된 새카만 강의실의 벽들, 근사한, 참으로 근사한 미명 아래, 휴강을 하던 때… 이런 것들은 <안튼슈낙>이 아니더라도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날렵한 여인과 함께 東岳(동악)을 즐겼던 5월의 한낮,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심어줘야 하겠다는 老(노)敎授(교수)님들의 열띤 강의며, 그런대로 不義(불의)에 함성하던 몇몇 정의로운 동료들의 모습들… 이런 것은 얼마나 흐뭇한 마음을 자아내게 했던가.
  그러나 그런대로 가장 선량스럽고 착한 이곳이었기에 ‘단 하루만이라도 더 배우고 싶고 더 연마하고 싶은’ 못내 정겨운 생각들이 돌아서는 발길을 머물게 한다. 하지만 ‘會者定離(회자정리)’ 떠날 사람은 떠나야 하는 법. 보다 큰 大氣(대기)의 호흡을 해야지. 돌아온 旅程(여정)들이 가슴 뿌듯하고 山(산) 넘어 저곳에선 나를 부른다.
  4개 성상을 알뜰히 길러주시고 어루만져 주신 스승님들의 은혜 항시 감사하며 떳떳한 제자 되렵니다.
  그러나 저처럼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떠나게 마옵소서- 싱그러운 후배일랑은-. 뒤오는 사람들이여! 조금 고통스럽다고 마구 팽개치지 마시오. 가장 소중하고 정의로운 양심은 그대들이 살아있는 오직 한 가지 푯대인 것이라오. 학창시절의 最惡(최악)이 社會(사회)에선 最善(최선)으로 통한다 하오.
  제복의 시절에 맘껏 기르고 닦아, 지축을 뒤흔들 슬기로움을 마련해 달라는 것, 앞 떠나는 한 사람의 간곡한 부탁이라오.
  다음 해도 또 그다음 해도… 개나리는 피어 지고, 무수한 젊음은 왔다 가겠지, 그리고 東國(동국)은 빛나고 우리도 자란다. 안녕 친구여, 다시 만나리. 먼 훗날 어느 항구에서-.

데모… 그 서글픈 遺産(유산)
千昌均(천창균) <法學科(법학과)>

  登校(등교)길 남산 중턱을 오른다. 계단을 올라 다시 계단을 오르면 고색창연한 황건문을 본다. 뒤로 돌아 방금 오른 계단 수를 헤아린다. 정확히 서른한 계단.
  이 계단수를 모르면 가짜 東大(동대)卒業生(졸업생)이라는 어떤 친구의 익살이 귀를 스친다.
  4년을 오르고 또 올랐던 이 서른한 개의 돌계단, 이것이 내 마지막 큰 것을 향한 길인 것이다.
  여기 서서 서울장안을 굽어보노라면 조수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온 생각이 온몸에 밴다.
  대학에 들어온 초봄부터 시작된 데모-한일회담을 반대하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다보니 잇따른 정치방학으로 대학생활은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早期放學(조기방학)을 하면 좋아라고 시골로 뺑소니쳤던 1, 2학년 때 멋도 모르고 데모에 뛰어들어 그것도 최선두에서 몇몇 상급생들의 독려에 신이나라고 외치며 뛰었다.
  거의 틀림없이 경찰 곤봉은 을지로도 못가서 아니면 대한극장도 못가서 내 머리통에 와닿았다. 얻어맞고 튀는 것이 信念(신념)없는 大學生(대학생)이란 市民(시민)의 조소도 샀지만 쥐구멍을 찾던 것이 추억이었고 재미였다. 내가 상급생이 되고 다시 데모꺼리는 꼬리를 물었기에 고된 줄 알면서도 우린 거리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다시 후배 하급생들이 선두에 섰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경솔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뛰다보니 상급생이 되었고 생각하다보니 졸업이다.
  정부는 학생이 정치과열이라고 핀잔을 주지만 정부는 그들 스스로가 ‘데모’꺼리를 제공해준 죄과는 씻을 수 없을 것이다.
  덕택에 우린 ‘데모’로 시작해서 ‘데모’로 끝나는 사색 없는 행동파 대학생이었기에 불행한 시절을 보낸 것만 같다.
  ‘데모’생각을 하다 보니 서글펐던 ‘캠퍼스’가 된다. 후배에게 남겨 줄 것도 나로서는 없는 것 같다. ‘데모꺼리를 찾아라, 그리고 지체 없이 행동하게’라는 것일까. 그것은 더구나 아니다.

정원에 한 그루의 나무를
金泰永(김태영) <經營科(경영과)>

  어느덧 세월은 또다시 어김없는 지점에 도달하여 이제 정든 母校(모교)와 떠나서 생활해야만 할 때가 되고 보니 다시금 지난날의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지난일은 아름답고 잊기 어려운 것처럼 나도 남 못지 않게 가치 있는 생활이었다고 보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훌륭한 교수님 밑에서 남모르는 진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고 일생을 같이 할 귀중한 친구도 얻었다. 또한 학훈단 군사훈련을 통한 나의 단련은 아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 했으리라 생각한다. 적으나마 집단생활에서 우리의 행동이 세련될 수 있었고 東國(동국)이 가진 뚜렷한 하나의 정신을 몸에 간직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무의미한 생활이다 할 수 있으랴 지금 입학시험을 치를 때를 상기해보면 나의 ‘많은 성장’을 느낀다. 졸업을 앞둔 나에겐 ‘못 잊어 생각이 난다’는 素月(소월)의 얼을 되씹게 할 뿐이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감이 드는 것은 내가 왜 좀 더 많은 추억거리를 장만하지 못했나 하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재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결코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라곤 권하고 싶지 않다. 한참 혈기 있고 실현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있을 대학 시절에 걷어들일 많은 씨를 뿌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용기가 있어서 그리고 결과가 두려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지낼 미래의 정신생활의 풍부한 양식을 현실의 순간순간에 씨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언하건데 우리는 서금 많은 추억의 씨를 뿌려서 앞으로의 생활에 빈약하지 않은 미래를 장식하기 위하여 저 17세기경 화란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던져주고 간 “내일 설사 지구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나의 뜰에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과 같이 앞을 내다보는 마음을 가지고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우리 생활의 일거일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리하면 江(강)으로 흘러가는 시냇물이 강어귀에 가까워질수록 폭이 넓어지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도 차차 성숙함에 따라서 지난날의 추억의 열매를 거둬들일 수 있는 흐뭇한 감정과 생의 보람을 맛볼 수 있으리라.

榮光(영광)의 頂點(정점)을 向(향)하여
金泰鎬(김태호) <農學科(농학과)>

  지난 4년을 생각하니 그칠 사이 없이 내 머리 속엔 가버린 추억들이 한없이 떠올라 아쉬움만 더해주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 4년은 길고도 긴 異例的(이례적)인 방학이 있기도 한 해였지만 정신이 분주하던 후레시맨의 앞에는 J교수의 철학강의의 열변이 여운을 채 가시기도 전에 전공과목의 무미건조한 학문들은 4년간을 한결 같이 경제적 부담만을 감해 드리고자 안간힘 쓸 때는 이미 끝나고 회한의 정만이 나를 잡는다. 그리하여 ‘이번엔 5ㆍ16장학생 선발’ ‘고교부터 받던 충북협회 장학생도 계속 선발되었음’으로 늙으신 고향의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대견스러워도 한다. 내 삶을 위한 교양을 높이기가 아니라 멋있고 훌륭한 교수의 음성, 강의를 몽땅 듣고 싶어서 他科(타과)를 드나들 때 그때 영문과의 미모(?)의 여학생은 왜 그렇게 친절했던지 그 여학생은 자기과 편입생인줄로 알고 친절 했었노라고 토로해 주었을 때의 약간의 실망감도 아쉬움을 더해준다.
  기쁘기는 ROTC 야영훈련 속의 면회의 순간이랄까? 어쨌든 학훈단은 학과시간을 어리둥절하게도 만들어주었지만, 구보로 달리던 황건문ㆍ장충단공원은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한 때는 버릇없이 학생을 앉혀 놓고 가르쳐 보던 교생실습은 해운대의 물놀이만큼이나 재미있게 느껴진다.
  학창시절에 하나의 자격증이라도 더 획득해놓으면 사회생활에 유리하다기에 한 것이지만 어떤 면에서 손해를 보지 않았나도 생각된다. 토정비결에 없는 구설수를 만났는지 연애의 명수가 못돼서인지, 잊지 못할 정을 담은 필동 가정교사 시절부터 기숙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별 두각을 못내더니 그만 기숙사에선 언제부터인가 사생을 시작하여 온 누리(?)에 “乙支路(을지로)의 쓸쓸이”를 탄생시켰다. 그 여인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은 하루 빨리 만회시켜야한다. 이제 나의 앞에 가로 놓인 졸업식이란 儀式(의식)이 지나면서 한 걸음씩 물려 서게 되는 동악의 ‘캠퍼스’에서, 길러주신 이 때까지의 교훈은 영광의 정점을 향해 달릴 때 추호도 굴하지 않는 강한 의지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먼 훗날을 보람 있게 꾸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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