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비평 “현존”에 주안점 둬

“프라이”, ‘批評(비평)의 分析(분석)’통해 理論的(이론적) 질서 설명
현대비평, 人間(인간) 內面世界(내면세계) 경시하는 性格(성격)지녀


  현대를 批評(비평)의 時代(시대)라고 할 만큼 20세기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批評活動(비평활동)이 왕성했던 시대이다. 本紙(본지)에서는 지난 4~50년간의 현대 영미 문학비평의 종류 및 흐름을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註(주)>
 

Ⅰ, 序論(서론)
  현대영미문학비평은 대체로 지난 4,50년간의 비평작업을 말하는데 비평의 종류를 대충 훑어보면 맑스주의 비평, 심리비평, 문체론 적 비평, 뉴크리티시즘 신화비평, 현상학적 비평, 반비평, 종합비평, 독자반응비평 등등 일일이 그 예를 열거 할 수 가 없다. 그러나 미국대학의 세미나시간에 주로 다루는 것으로 한국학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웰렉과 워런 공저 ‘문학이론’, 머리 크리거의 ‘비평이론’, 노드롬 프라이의 ‘비평의 분석’, 클린스 부륵스의 ‘잘 만들어진 항아리’, 웨인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 그리고 I.A. 리챠즈의 ‘실제비평’, 전통적인 비평서로 에릭 아우엘바흐의 ‘모방론’, 레비스트라우스와 롤랑바스가 주장하는 구조주의 비평, 플레의 현상학적 비평 등이다. 먼저 리챠즈의 시론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Ⅱ, 本論(본론)
  (1) 리챠즈의 ‘실제비평’은 문학비평에 있어서의 그의 언어분석에 대한 고찰이다. 그는 과학용어와 법률용어 이외에 정서적 용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정서적 용어는 감정을 담은 용어를 말하는 것 인데 암시라든가 희망적 추측이라든가 허구적인 사상표현을 가능케 하는 용어를 말한다. 리챠즈는 근본적으로 시 이해는 언어자체가 매체라기보다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충동’으로 본다. 이 충동을 리챠즈는 지적 신뢰와 정서적 신뢰에 연결시키고 있고 이 두 가지 신뢰로 인해서 독자는 시인의 작품을 알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시인의 작품은 이미 작가의 충동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독자는 시인의 충동과 일치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가 좋은 시를 좋아하든 나쁜 시를 좋아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리챠즈는 시의 심리적 효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반면에 미학적 가치의 세계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예술가는 정신을 치료하는 사람이고 예술은 정신요법이나 또는 신경강장제로 리챠즈는 생각한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리챠즈가 언어분석으로 직접 뉴크리틱스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가령 클린스 부륵스가 리챠즈의 심리적 내용을 모두 배제하고 그 대신 시를 ‘긴장’이 내포된 구체적인 조직체이고 이 조직체 속에 역설과 기지 그리고 아이러니가 담겨있다고 했을 때 이는 곧 리챠즈의 언어분석에 크게 힘입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륵스는 시의 독자적인 가치를 주장, 모든 역사주의를 배제하게 된다.

  (2) 로네 웰렉과 워런의 문학이론은 랜섬이 제창한 후의 뉴크리티시즘 이론을 체계화 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연구방법으로 문학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분리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작품이 특수한 미학적 목적을 가진 ‘기호’의 구조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시를 인쇄된 가공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잠재적인 근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쏘슈르의 량(Langue)이 시라면 빠롤(Parole)은 개개인이 시를 음미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는 웰렉에게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본질적인 구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웰렉이 작품이란 역사성을 띠고 있고 활력적이라고 했을 때, 이는 곧 작품이 독자가 대할 때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게 되었을 때 당연히 우리는 문학에서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이 언어와 그 언어가 갖는 소리와의 관계이며 언어의 전달기능은 부차적인 것으로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웰렉은 상상력이나 창조력 허구성이 뚜렷한 작품으로 호머, 단테, 섹스피어, 발작, 그리고 키츠의 작품을 예로 들고 있고 이들의 작품과 비교해 볼 때, 몬테뉴나 에머슨, 톨스토이의 작품은 전자의 작품보다 창조력 내지는 상상력이란 문제에 있어 못하다고 보고 있다. 웰렉과 워런의 문학이론은 랜썸 이후의 많은 뉴크리틱스의 평을 펴낸 평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랜썸이 시에서 스트럭쳐와 텍스쳐를 구분하고 있다든가 과학이 추상을 우리에게 주는데 반해 시는 우리에게 구체성을 안겨 준다는 말은 웰렉이 “본질적 문학연구”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3) 프라이의 신화비평은 우선 프라이가 비평가의 기능을 문학의 체계적인 연구, 다시 말하면 개개의 작품이 전체우주질서의 일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데 특이함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라이는 엘리옷의 이른바 현존하는 모든 문학이 그 자체가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주장과 상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평의 분석’을 통해 프라이는 이 이상적인 질서를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서는 엘리옷이 말했듯이 새로운 작품이 나왔을 때마다 그 질서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 오직 다른 여러 방법으로 변함없이 이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라이에 있어서 문학이라는 말은 인생이나 리얼리티에 대한 해석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도 인간의 태초부터의 모든 꿈의 모방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비평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프라이가 창조와 지식, 예술과 과학, 신화와 관념과의 관계를 자주 언급하고 있음을 본다.
  프라이는 독자의 가장 깊은 반응을 계속 자아내게 하는 문학을 원형적인 신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프라이가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는 곧 어떤 형태의 얘기를 가리키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들이 신이라든가 또는 인간보다 강한 존재들이 나타나는 그런 얘기 말이다. 그런데 이 얘기는 우리가 역사에서 꼬집어 내어 그 발생지를 지명 할 수도 없다. 작중인물들의 행동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기 때문이다. 행동에 논리나 개연성의 유무를 찾아 볼 아무런 이유도 없다. 신화 속에 나타나는 일들은 얘기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일로 문자 그대로 독립적인 문학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는 구전문학이 그러하듯 소설가에게 똑같은 호소력을 갖는 것이라고 프라이는 주장한다. 신화가 작가에게 기존의 얘기의 틀을 안겨주고 또 작가에게 마음껏 힘을 기울여 그 틀 안에서 자기계획을 펴 나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현대미국 소설가인 버나드 말라머드의 ‘조수’라는 작품이 아마 그 좋은 예가 될지 모르겠다. 현대작가의 원시축제에 대한 관심은 바로 프라이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으니까.
  신화와 구전문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구전문학과 비교해 볼 때, 신화는 특수한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신화에서의 얘기는 실제로 있어왔다고 믿어지는 반면에, 구전문학은 작가의 윤색이 농후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프라이에 의하면 구약성경의 지구창조나 인간의 타락, 홍수 얘기 등은 역사적인 사질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프라이는 신화가 인간의 원시적인 상상력을 형성시킬 뿐 아니라 또한 문학세계 자체를 구성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키타입이란 말은 문학작품 이해는 물론 한 작품의 해설을 위해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4) 문학비평의 한 양식으로 구조주의를 들 수 있는데, 먼저 ‘구조(structure)’란 어휘부터 고찰할 필요가 있다. 피아제는 구조라는 말을 ‘전환의 체계’로 규정하고 있다. 즉 구조란 그 집합체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큰 집합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조직체든 그것이 변화할 때, 반드시 구성요소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변모되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스트라우스의 주장이다. 피아제는 어떤 구성체의 한 요소가 변화를 일으킬 때, 그 변한 구성체는 변화하기 이전의 구성체와 동일하다고 본다. 피아제는 우리가 과학분야에서 주로 보게 되는 어떤 구성체에 주로 관여하고 있고 스트라우스는 인류학에서의 예를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들의 관념을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 들인다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가령 한편의 시 라든지, 또는 소설을 방금 말한 대로 한 조직체로 볼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D.H. 로렌스의 ‘사랑의 여인들’을 예로 들어보자. 버킨과 어슐러, 버킨과 허미온, 제랄드와 거드런, 그리고 거드런과 로크 등은 각각 이 소설의 작은 단위의 구성요소로서 ‘사랑의 여인’이라는 큰 조직체를 구성하고 있다.
  이 네 쌍의 남녀의 관계가 변화해 감에 따라 우리는 그 변모상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조주의 비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예술작품 안에 내재한 작은 단위의 구성체와, 큰 구성체와의 관계는 물론, 이 두 구성체와 외부설계와의 관계도 배려를 하고 있다.
  그러면 먼저 구조주의의 방법론부터 생각해 보자. 가장 특징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전체성에 대한 강조다. 다시 말하면, 전체성의 논리적 우선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이클 레인의 ‘구조의 입문’에서의 주장이다. 그러나 피아제는 레인의 주장과 좀 다르다. 전체성의 강조라기보다 조직을 구성하는 요소상호간의 관계를 피아제는 더 중요시 여기고 있다. 여하간에 문학비평이 이와 같은 한 구성체 안의 각 요소의 상호관계나 또는 그 주종관계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볼 때, 이것은 구조주의가 갖는 한 장점으로 여겨질 수가 있겠다.
  지엽적으로 어떤 구성요소만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서 얻는 것보다도 또는 구성체 전부를 개괄적으로 조사하는 것 보다, 구조주의 방법에 의해 우리는 더 폭 넓게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방법에서 또 한 가지 중요시 여겨지는 것은 사물의 원인 고찰에 대한 배제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 비평은 그 주안점이 현재에 있다는 말이다. 어째서 왜 두 구성요소가 같은 부류에 속하게 되는가 하는 따위의 문제는 고려치 않는다. 로렌스의 ‘사랑의 여인들’에서 만일 버킨의 정신적 발전을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그의 정신적 과정을 캐 본다면 이는 곧 구조주의 비평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 된다. 그래서 롤랑 바스는 “사물의 구조를 말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 우리가 대할 수 있는 구조를 말한다”고 한 적이 있다.
  스트라우스의 언어에 대한 고찰 또한 상당히 급진적인 것 같다. 그는 언어를 순전히 사회의 한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고, 언어의 태도가 인간의 무의식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인간이 언어를 배우고 이용하는 법칙을 우리는 의식적으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무의식적인 사상의 산물인 그 언어와 사상과의 관계를 우리가 유출해서 분석해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라우스에게 있어서는 문학이 사회현상의 한 단면이고 동시에 무의식적 사상의 산물로 보는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또 문학을 한 ‘조직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 문학을 언어학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가? 그렇다. 구조주의 문학이론을 펴는 사람들은 결국 문학이라는 구성체 안에 깃든 여러 가지 관계(마치 언어와 사상과의 관계가 그러하듯)즉 그 구성체를 유지하는 변형의 원리나 관계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조주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난제중의 하나는 입증이 불가능하고 또 반증할 수도 없을 경우, 이를테면 구조적으로 이미 결정된 구성체에서는 주어진 요소의 관계 밖에 알아 낼 수 없다는데 그 취약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그 나름대로 장점도 갖추고 있다. 로렌스의 ‘무지개’란 작품을 구조주의 입장에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소설의 주요한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남녀 간의 갈등이다.
  이 남녀 간의 갈등을 우리는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지개’는 작품과 현실세계의 유사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롤랑 바스는 "작품의 분해나 결합의 과정을 통해 알지 못하던 구조를 분명히 알게 된다"고 한 적이 있다. 현상주의 비평에 대하여 서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Ⅲ, 結論(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간단히 미국대학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비평을 보아왔다. 결국 비평의 흐름이란 것이 무슨 유행처럼 일어났다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다. 뉴크리티시즘 다음에는 신 아리스토툴 파가 생기고 다음이 실존주의 비평 그 다음에 구조주의 비평 등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죠 라이체르트가 그의 저 “문학의 이해”에서 작품의 진가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나 또는 문학의 본질론의 정의로써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소위 뉴크리틱스의 문학의 순수성 내지는 그 독자성에 회의론을 펴는가 하면 구조주의나 현상학적 비평에 대해서도 “문학(text)을 이해하기 위해서 도대체 독자들이 어떤 지식을 지녀야만 되겠는가? 어떻게 해야 독자들이 문학(text)의 뜻을 안전하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반문함으로서 문학비평에 있어서의 형식화 내지는 사변적 독단론을 일축하고 있다. 라이체로트는 문학비평이 이 두 테두리를 벗어나서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도덕적” 비평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최근의 조푸리 하트만의 “황야에서의 비평”(1980)을 연상하게 된다. 하트만은 이 저서에서 “비평이 손짓하는 약속의 땅이 있다. 이 약속의 땅으로 우리는 들어갈 수 가 없고 결국 황야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멀리서 이미 그 약속의 땅과 인사를 주고받았음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일찍이 매슈 아놀드가 “현시점에서의 비평의 기능”이라는 小論(소론)에서 한 말이다.
  하트만은 현대비평을 황야에 비유하고 있으나, 비평문학방향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것 같다. 어쨌든 현대비평은 이미 보아온 것 같이 프라이의 신화비평을 제외하면 너무 지나치게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경시하는 감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이와 같은 현상은 20세기의 언어 철학가인 카아납이나 비트겐슈타인 또는 아이엘 등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외부세계와 관련은 맺지 못하는 언어란 아무런 뜻이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문학비평과 언어철학의 영역은 언제나 지평선만을 유지하게 되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 두 줄기선이 어디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난제를 현대비평이 우리에게 남겨놓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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