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에서 긴 줄을 지어 서 있는 가지 긴 나무들이 땅에 닿을 듯 크게 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곤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모양이었다. 우울하게 드리운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권태롭게 펼쳐지는 오막조막한 집들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시계(市界)를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나 별 다름없이 펼쳐지는 황량한 차창 밖 풍경들에 어지간히 익숙해졌다고 자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흐린 날은 흐린 날이라서,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이 불어서 등의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인자(因子)로 인한 쓸쓸한 위화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쓸쓸함은 인적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가게 된다면 막막한 울음으로 터져 버릴 것 같기도 했다.
검문소 앞에서 부르릉 거리며 차가 멈추자 헌병이 올라탔다. 쟁강쟁강 군화소리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두말없이 후송증명서를 제시했다. 검게 그을린 그의 팔뚝과 얼굴에 비추어 증명서를 내미는 내 가는 팔목의 창백한 피부빛이 쑥스러웠다. 검문 절차가 순조롭게 끝났음으로 헌병은 운전선 앞에서 두 발을 모두어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 후 내려갔다. 혹시나 그가 행선지를 꼼꼼히 확인한 후 따져들었다면 쓸데없이 번거로워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대구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당히 무모하게 풍대리를 찾아 향하는 길이었다. 어떻게든지 내일까지 도착해야만 할 대구보다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풍대리가 훨씬 더 멀고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쉬임 없이 이어지던 가로수들이 뜸해지더니 이발소, 사진관 등의 간판이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이 나타났다. 유리창에 흰 창호지를 발라놓고 붉은 글씨로 홍콩(香港(향항))이라고 써 붙인 중화요리집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종착지가 멀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쌍년, 갈아 마셔도 이 분이 안 풀릴 거야. 지가 내 돈을, 어떻게 모은 돈이라고 떼먹고 곱게 삭일 줄 알아”
웅얼웅얼 확실치 않은 말소리가 계속 들려오던 뒷자리에서 나직하나마 격렬한 기세로 말을 맺는 것이 들렸다.
“어떻게 번 돈이기는, 그래 그 년이 몸 팔아 모은 돈이란 걸 모르고 떼먹나. 일단 그 손에 들어가면 눈 먼 돈이지 뭐”
한결 느긋한 어투로 옆에서 달래는 것 같았다. 내릴 때가 다 되었다는 초조함 때문인지 뒤이어 일수, 사글세, 월부, 화장품 값 등의 화제가 주위를 살피지 않고 거침없이 들려왔다. 잊고 있었던 생활의 건강한 이빨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튼튼한 이빨로 물어뜯으면 식욕이든 성욕이든 깊은 흔적으로 자리 잡을 것이었다. 사람들이 술렁대며 위의 짐칸에서 짐을 끄집어 내렸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더블백과 모자를 내렸고 될 수 있는 대로 반듯하게 모자를 바로 썼다. 차는 부우연 먼지를 일으키며 터덜터덜 정류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찌뿌드드 흐린 날씨 탓인지 오후 4시를 겨우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황혼처럼 서글펐다. 시외버스 종착지나 터미널마다 드문드문 보이는 군인들의 모습이 이곳에서도 드물지 않아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 넌 만나게 되면 나한테 꼭 알려줘. 돈은 못 받아도 끄댕이라도 한번 쥐어 뜯어놔야 반분이나 풀리겠어.”
뒷자리의 여자들이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더블백을 내리면서 흘깃 보아둔, 납작한 얼굴에 기미가 앉은 앳된 인상의 여자와 파마를 곱실곱실하게 하고 옥시풀깨나 풀어 염색을 한 여자, 둘 중에 누가 돈을 떼인 여자일까 턱없이 궁금해졌다.
나는 주춤주춤 내려섰다.
“풍대리까지 어떻게 갑니까?”
염색을 한지가 오래 되었는지 자라나오는 머리칼로 고르지 않은 명암을 드러내는 파마머리게 물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싼 보퉁이를 바꿔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풍대리요? 한 시간마다 차가 있을걸요,”
그 여자였다. 돈을 떼먹고 간 년을 찾아내어 갈아 마시고 싶다던. 탈색한 머리만 아니라면 평범한 인상이었으므로 친근감이 갔다.
“풍대리에 있는 천주교 수녀원까지 갑니다.”
“그곳은 차를 타고 가도 깊이 걸어 들어간다던데요. 참, 하루에 두 번씩 읍내까지 나오는 수녀원차가 있다고 하대요.”
뒷자리에서 욕을 하던 기세와는 딴판으로 안존한 어투였다.
“그 차가 언제 있는지 알 수 없겠습니까?”
“매표구 옆에 주간지 파는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아마 알 거에요.”
주간지와 과자 부스러기를 널어놓고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수녀원 차 지나갔습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것 같던데…”
“그럼 어떻게 가면 됩니까?”
“풍대리 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하나씩 있으니 그걸 타구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수녀원에 볼 일이 있어?”
“예”
“글쎄, 들어가도 수녀원까지는 제법 멀 텐데. 어둡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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