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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불교와 부처의 인식론적 문제
  • 高翊晋(고익진)
  • 승인 1983.05.17
  • 호수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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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믿음 위해 敎說(교설)의 眞理性(진리성)밝혀야
‘念佛(염불)’, 救援(구원)의 관념으로 흘러 本質的(본질적)의미 잃어버리기도
佛敎人(불교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根本(근본)으로 삼아
최상의 깨달음 얻고자 發心(발심), 修行(수행) 해야



  요즘세상은 믿을 것이 없다고 한다. 남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와 친척, 심지어는 처자식까지도 믿을 것이 못 된다. 뉴스나 광고는 물론이지만 해설까지도 견해가 엇갈려 어떤 쪽을 따를지 알 수가 없다. 재산과 권리와 명예라는 것은 본래부터 덧없는 것이지만 심지어는 종교와 성직자까지도 불신을 받고 있다. ‘불교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주제는 불교 신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믿음의 방법을 묻고 있는 말이지만 ‘불교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불신의 뉘앙스가 먼저 풍기는 것은 아이러니컬 하다.
  그러나 인간인 믿음을 상실하고 살수가 있을까. 오늘 힘들여 일하는 것은 내일을 믿기 때문이고, 오늘 힘들여 가르치는 것은 다음 세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이 時點(시점)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무엇인가를 믿고 그것에 의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 존재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흔들릴 때 인간은 불안해지고, 그것이 제약될 때 인간은 외로워지고, 그것이 사라질 때 인간은 죽게 된다. 반대로 그것이 일어 날 때 인간은 소생하고, 그것이 확장되고 튼튼해질 때 인간은 외로움과 불안을 극복하여 밝고 힘찬 삶을 맞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이와 같이 인간 존재의 정신적 바탕이 되기에, 사람들은 믿음의 위험성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또한 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번 속은 친구라면 아예 돌아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두 번, 세 번 속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믿고 싶은 인간성의 나약함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성의 나약함은 재산의 파탄이나 不治病(불치병)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믿음을 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아무 교설에나 닥치는 대로 믿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간혹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강렬하고 순수한 만큼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는 절대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믿음은 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위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그런 믿음이 종교적 믿음의 특징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을 진정한 종교적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진정한 믿음이란 끝내 허다하지 않은 영원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대상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어야 하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어야 하고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의 대상을 우리 주변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류가 발생시킨 여러 가지 문화현상 중에서 영원한 진리와 진정한 가치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래도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종교 현황은 어떤가? 불교를 비롯해서 기독교ㆍ유교ㆍ도교ㆍ무속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종교 관념이 난립해 있다. 공산주의적인 唯物論(유물론)도 고대사회에서는 일종의 종교 관념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종교가 내세우고 있는 진리의 내용은 왜 그렇게 서로 다른가. 불교에서는 세계를 인간의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창조라고 하고 유교에서는 음양의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영원하고 궁극적인 진리는 하나여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 각 종교의 주장은 서로 내용이 엇갈리는 것일까? 종교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저 할 때, 우리에게는 다시 이런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어느 종교이던 하나를 골라 덮어놓고 믿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각 종교의 교설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를 먼저 문제로 삼아 보는 경우이다. 이런 두 가지 방향에서 어떤 쪽을 택할 것인가는 각자의 자유이겠지만, 전자는 결코 종교적 자세라고 볼 수가 없다. 왜 그러냐면 종교는 항상 영원한 진리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 종교나 하나 골라 덮어 놓고 따른다는 그러한 믿음은 그것이 바라는 세속적인 물질적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언제라도 딴 곳으로 눈을 돌린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적 믿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종교적 교설의 진리성 여부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먼저 확인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믿음의 선행 조건은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이제 판단의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그것은 아직 믿음의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 종교에서 설하는 교설의 내용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神(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고 불교에서도 참다운 진리는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믿어보기도 전에 교설의 내용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고자 하는 것부터가 잘못이요 오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凡俗(범속)한 인간의 지적 능력이 아무리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도, 선ㆍ악이나 眞(진)ㆍ假(가)와 같은 것을 전적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서도 인간은 神(신)을 완전하게는 알 수 없지만 신이 스스로 그 자신을 인간에게 啓示(계시)함으로써 인간은 신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결혼대상을 고를 때, 먼저 그 사람이 믿음직한 가 아닌 가를 살펴보듯이 종교에 대해서도 과연 그것이 믿음직한 진리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필자는 오늘 주제로 내세워진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그 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아닌 가 에서부터 우선 생각해 보고자 한다. 부처님이 계시던 BC 5~6세기경의 인도 사회는 ‘브라흐만’(梵(범))이라는 神(신)적 존재를 우주의 창조주요, 본질로 믿는 정통적인 브라흐마니즘이 있었고, 다시 이에 맞서서 세계의 근원을 몇 개의 물질적 요소로 보는 沙門(사문)들의 다양한 종교사상이 대립하고 있었다. 고타마 싯닷타는 당시의 그러한 두 계통의 종교사상을 믿어보고, 닦아보고 그 궁극적 경지를 체험해 보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BC 5~6세기 경우 인도사회와 20세기의 현대사회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와 현대의 종교 관념을 비교해 볼 때 그들 사이에는 근본적이 다름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브라흐마니즘의 汎神論(범신론)과 기독교의 唯一神觀(유일신관)은 크게 다른 것 같지만 브라흐마니즘의 원천이 되고 있는 리그베다의 종교에는 唯一神(유일신)관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요소에 대한 당시의 견해는 地(지)ㆍ水(수)ㆍ火(화)ㆍ風(풍)ㆍ四大說(사대설)이 기본적인 것이고, 현대과학에서는 104 원소설이 기본적인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석기술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지, 철학적 사유의 패턴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여러 종교사상을 믿어보고 체험해 보았던 고타마 싯닷타의 종교적 求道(구도)의 遍歷(편력)은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것이 과연 믿을 만한 종교인가’를 문제로 삼았을 때 일어난 판단의 어려움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마치 예수 크리스트가 인간의 죄를 대신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고타마 붓다는 인간의 힘든 종교적 방황을 대신 받아 겪어주셨다는 말이다. 고타마 싯닷타는 당시의 여러 종교가 문제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는 곧 그들과 결별하여 붓나가야의 조용한 숲을 찾아가 그곳에서 독자적인 선정에 잠겨 마침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진리를 세상에 나가 설한 것이 불교인데, 그러한 전도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항상 ‘깨달은 자’로 자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도 모두 노력만 하면 다 같이 그런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음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의 바라문들은 어떠했던가? 그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브라만’신의 입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들’임을 자처하였고, 브라만 신과 교섭하고 제사를 집행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자기들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부처님과 이들 바라문과의 양자에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은 그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도 깊고 미묘하여 일체의 언어와 사유를 초월한 것이므로, 이것을 중생들에게 깨우치기 위해서는 부득이 언어와 사유를 동반한 점진적 방편을 시설 할 수밖에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자기의 언어적 교설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저 언덕에 건너간 다음에는 마땅히 버려야 할 뗏목과 같은 것이니,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항상 그 뜻을 생각하라고 간절히 설교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바라문들은 어떠했던가? 자기들의 ‘베다’ 성전은 하늘에서 들은 ‘쑤루티’ 곧 ‘신의 계시’임을 강조하고 그 곳에 씌어있는 1자 1구도 모두가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불교 경전에도 물론 如是我聞(여시아문)이라 는 말이 맨 처음에 붙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제자인 阿難(아난)이 스승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와 브라흐마니즘의 이러한 경전관에서 어떤 쪽이 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가는 각자가 생각해 볼 일이다.
  부처님은 자기의 교설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三乘(삼승)’이라는 중층적 조직을 가진 미묘한 것이지만, 그러한 법을 들은 자가 누구나 다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은 분명히 있고, 자기는 그것을 가리켜 주지만, 가고 안 가고는 각자에 딸린 일로서, 자기인들 어떻게 하겠느냐’하시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은 다 병이 낫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도 부처님은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하고 계신다.
  브라만 신에 대한 기도와 제사를 통해 인간의 문제는 무엇이나 해결된다고 말했던 바라문들의 주장과 그러한 부처님의 자세는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비교는 이밖에도 계속해서 많은 에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두 종교가 갖는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근본적인 면에서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고 본다. 부처님이 처음 반라나시에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바퀴를 돌리시고 그것이 급속도로 인도사회에 퍼져 나갔던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불교의 그러한 眞實性(진실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종교가 난립해 있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믿음직한 종교인가를 알아내는 어려움이 아상과 같은 방법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는데,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경로와 인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종교적 선택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 그에 대해 전적인 ‘믿음’을 일으켜야 함은 당연한 순서이다.
  불교에서는 입문자가 제일 먼저 갖춰야 할 그러한 믿음으로 ‘四不壞淨(사불괴정)’이라는 것을 설하고 있다. ‘佛法僧(불법승)’ 三寶(삼보)와 戒(계)에 대해 확고부동한 철저한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 모든 불교인은 항상 ‘六念(육념)’을 해야 한다는데 그 것은 이전의 네 가지 믿음의 대상에 ‘布施(보시)’와 ‘하늘을 과보’(生天(생천))를 추가 한 것으로 그 여섯 가지를 항상 생각하라는 뜻이다.
  인간은 타고 나면서 다섯 개의 感官(감관)을 가지고 갖고 인식과 활동의 작용을 하고 있다. 불교에 입문하여 수행하게 되면 그 위에 다시 새로운 다섯 개의 감관(五根(오근))이 더 발생하여 다섯 가지의 힘(五力(오력))을 띄게 된다는 것이 ‘五根(오근)’ ‘五力(오력)’이라는 교설인데 거기에서도 믿음이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런 믿음을 통해 ‘精進(정진)ㆍ念(념)ㆍ定(정)ㆍ慧(혜)’가 형성된다는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疑心(의심)’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따라서 원시 경전에서는 다시 수행을 통해 극복되는 번뇌 속에 끊임없이 ‘疑心(의심)’을 포함시키고 있으니 인간의 청정한 불성을 가리고 있는 ‘五蓋(오개)’의 내용도 ‘貪(탐)ㆍ瞋(진)ㆍ睡(수)ㆍ掉(도)ㆍ疑(의)’로 되어 있으며 不還果(불환과)에서 단절된다는 ‘五不分結(오분분결)’의 설에도 ‘貪(탐)ㆍ瞋(진)ㆍ有信見(유신견)ㆍ戒禁取見(계금취견)ㆍ疑(의)’로 되어 있어 ‘疑心(의심)’이 항상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절대적 믿음에 대한 이러한 요청은 대승경전에는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金剛經(금강경)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信心(신심) 청정하면 곧 實相(실상)을 생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가장 希有(희유)한 功德(공덕)을 성취 하였느니라’고 설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법의 그러한 實相(실상)은 너무나도 심오하고 미묘하여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다 알 수 있을 뿐, 그 밖의 사람은 심지어는 보살들 까지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法華經(법화경)은 설하고 있다.(卷(권)2 方便品(방편품))
  그러면서도 ‘여러 보살 중에서 信力(신력)이 견고한 자는 제외한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으니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가 아무리 들어가기 어려워도 ‘믿음’으로서 능히 들어갈 수 있음을 (以信能入(이신능입))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大乘(대승) 보살의 求道(구도)과정을 자상하게 설해 나간 것이 華嚴經(화엄경)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보살은 무엇보다도 먼저 佛法僧(불법승)에 대해서 절대적인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고 ‘믿음이야 말로 보살道(도)의 근원이요, 공덕을 낳는 어머니요, 의심의 그물을 끊고 무상의 길을 열어준다’(卷(권)14 賢首品(현수품))고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의 이러한 믿음은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그 성질이 판이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자에 의하면 ‘神(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支配(지배)하는 主(주)요, 人間(인간)은 被造物(피조물)이므로 인간은 마땅히 主(주)의 뜻에 따라 從(종)이 되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는 절대적인 진리(眞如(진여))를 깨달은 자요, 중생은 그러지 못한 자이므로, 중생은 마땅히 부처의 敎法(교법)에 따라 수행해야만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경전의 四不壞淨(사불괴정)에는 ‘佛(불)ㆍ法(법)ㆍ僧(승)’ 三寶(삼보)신앙의 대상으로 설정되고 있으며, 起身論(기신론)에서는 그러한 三寶(삼보)에 ‘절대적 진리’(眞如(진여))를 하나 더 추가하여 ‘眞如(진여)ㆍ佛(불)ㆍ法(법)ㆍ僧(승)’이 불교적 믿음의 대상이라고 논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의 믿음은,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그 기본적인 것이 되어 있다. 따라서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서는 인간이 神(신)이 되려고 하거나 神(신)과 동일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용서받지 못할 ‘憍慢(교만)’이오, 근원적인 ‘罪(죄)’라고 하는 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을 ‘罪(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法華經(법화경)에서 ‘모든 부처는 중생들에게 궁극적으로는 부처님과 똑같은 知見(지견)을 開示(개시)하고 悟入(오입)케 하고자 세상에 出見(출견)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설해 온 여러 가지 三乘(삼승)의 敎法(교법)은 모두가 그러한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미묘하게 시설한 방편’에 불과 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계신다.
  그런 뒤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감히 뜻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최대의 憍慢(교만)’(增上慢(증상만))이요(卷(권)1方便品(방편품)) ‘罪(죄)’요 ‘無知(무지)’라고 규정하고 계신다.<無量壽經(무량수경)>
  따라서 불교에서의 ‘믿음’은 항상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키는 ‘發心(발심)’과 함께 나타난다. 華嚴經(화엄경)에 설해진 보살의 길을 ‘十住(십주)ㆍ十行(십행)ㆍ十廻向(십회향)ㆍ十地(십지)’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 최초에 위치하고 있는 十住(십주)의 제일 첫 단계는 ‘發心(발심)’으로 되어 있으니 그러한 ‘發心(발심)’의 앞(제12賢首品(현수품))에서 ‘믿음’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뒤에 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十信(십신)ㆍ十住(십주)ㆍ十行(십행)ㆍ十廻向(십회향)ㆍ十地(십지)ㆍ等覺(등각)ㆍ妙覺(묘각)’이라는 ‘五十二立(오십이립)’설로 조직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불교에 있어서의 ‘믿음’은, 이와 같이 항상 ‘發心(발심)’을 수반하는데 이러한 ‘發心(발심)’은 부처님과 같은 最上(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곧 종교적 실천의 ‘行(행)’으로 옮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華嚴經(화엄경)은 이런 뜻을 잘 표현하여 ‘十住(십주)’다음에 ‘十行(십행)’을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이상과 같은 불교적 ‘믿음’과 ‘發心(발심)’과 ‘行(행)’을 하나로 연결한 종교적 생활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불교의 신앙생활은 이와 같이 그 개념이 명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것이 제대로 인식되고 제대로 행해지고 있을까? 오늘 우리들이 ‘불교,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주제를 내걸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우리의 실생활에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는 중요한 불교적 信行(신행)을 예로 들어 그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우리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친근한 신앙형태로는 우선 佛像(불상)앞에서 禮佛(예불)ㆍ供養(공양)ㆍ祈禱(기도)ㆍ發願(발원)하는 것을 들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런 佛像(불상)을 한낱 文化財(문화재)나 예술품, 심지어는 偶像(우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신앙심을 퇴전 시키는 일이 있다. 이것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오해라고 보고 싶다. 순수한 신앙심에 불상이 단순한 造形物(조형물)로 비치는 일이 있을까? ‘영원히 살아계신 부처님’의 이미지를 촉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오, 부처님과 같은 것이니 불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처님’앞에 나아가 예경하는 데에서부터 매일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②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괴로움에 부딪쳤을 때 불교인은 누구나 관세음보살을 염한다. 그리고 死後(사후)에는 西方極樂世界(서방극락세계)에 往生(왕생)할 것을 바라 부지런히 阿彌陀佛(아미타불)을 念(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念佛(염불)이 너무 他力信仰(타력신앙)의 방향으로 흘러 기독교적인 救援(구원)의 관념과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위에서 살폈던 불교적 ‘믿음’과 ‘發心(발심)’의 본질적 의미는 어떤 경우에도 忘失(망실)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觀音(관음)신앙을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히려 불교적 ‘믿음’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陀佛(타불)신앙 또한 淨土往生(정토왕생)의 ‘眞正(진정)한 原因(원인)’은 바로 ‘發心(발심)’이라는 것을 항상 염해서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③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大小乘(대소승)을 구별하여 小乘(소승)을 부정하고, 조선조 500년의 억불정책 아래서 敎學(교학)의 침체를 가져와 禪(선)아니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이 깊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禪敎(선교)는 근본에 있어서 하나이며 大小乘(대소승)또한 一佛乘(일불승)을 임시 方便(방편)으로 식별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럴진대, 무엇보다도 먼저 불교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삼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 수행하여 善財童子(선재동자)와 같은 보살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적 신앙생활이라고 본인은 보고 싶다.
  부처님은 法華經(법화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너희들은 이제 모든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기뻐할지어다. 너희는 모두가 부처가 될 것이다.”

 

高翊晋(고익진)  佛敎大敎授(불교대교수)ㆍ佛敎學(불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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