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불적

신라인, 佛國淨土娑婆世界(불국정토사파세계)에 옮겨
남산의 素朴(소박)한 부처님 相好(상호), 民衆(민중)과 親和(친화)이뤄
塔谷(탑곡)의 부처바위는 광대한 華嚴世界(화엄세계) 표현해


차례
1.연재를 시작하며
2.新羅佛敎(신라불교)
3.新羅美術(신라미술)
4.新羅佛塔(신라불탑)
5.新羅歌謠(신라가요)
6.新羅(신라)남산유적
7.新羅金石文(신라금석문)
8.新羅古蹟(신라고적)
9.新羅(신라)화랑도
10.新羅社會相(신라사회상) (골품제를 中心(중심)으로)
 

  경주 南山(남산)은 글자 그대로 新羅(신라) 서울이던 서라벌 南(남)쪽을 가로마고 솟아있는 山(산)이다. 높이 4백 94m 되는 高位山(고위산)과 4백 68m 되는 金鰲山(금오산)의 두 봉우리를 합쳐 부르는 산 이름이기도 하다. 南山(남산)에는 다른 山(산)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佛敎遺蹟(불교유적)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寺址(사지)만 하여도 1백 10여 곳이 넘고 石塔(석탑) 61基(기)와 石佛(석불)78體(체)를 헤아린다.
  이렇게 많은 南山(남산)의 佛蹟(불적)들은 건축들의 배치에 있어서나 石塔(석탑)들의 맵시에 있어서나 佛像(불상)들의 표정에 있어서나 한결같이 우리 民族(민족)의 개성을 짙게 간직하고 있기에 보배로운 것이다. 山脈(산맥)에 감싸여 아늑한 곳이 있으면 그곳에 절이 있었고 좋은 바위산이 있으면 그 산을 배경으로 절이 있었다. 좋은 배경은 없더라도 내다보는 전망이 좋은 곳이면 그곳에도 절이 있었다.

  南山(남산)의 절들은 伽藍配置法(가람배치법)에 구애됨 없이 높은 봉우리에는 塔(탑)을 세우고 光線(광선)을 잘 받는 곳에는 金堂(금당)을 짓고 하늘에 떠 있는 듯 한 곳에는 선방을 차려 모든 건축물들은 자연공간에 무리 없이 調和(조화)되어 곳곳에 仙境(선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新羅(신라)때 사람들은 극락이 영광보다 地上(지상)의 행복을 더 동경하였다. 花郞徒(화랑도)들이 미래 지상의 부처인 미륵보살을 지성으로 섬겼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는 닐이다. 그러기에 신라사람들의 꿈은 天上佛國世界(천상불국세계)의 환상을 우리 國土(국토)에 옮기려는 노력이었다. 흰 구름의 白雲橋(백운교)와 푸른 구름의 靑雲橋(청운교)의 위에 세운 佛國寺(불국사)가 그러했고 地方天圓(지방천원)의 평면위에 세운 석굴암도 그러했고 岩岩層層(암암층층) 위에 세운 南山의 佛蹟(불적) 또한 그러하였다. 新羅(신라)사람들은 하늘위에 게신 부처님들이 地上(지상)으로 오셨을 때 그 靈(영)(形相(형상)이 아님)이 南山(남산)바위 속에 깃들어 계시다가 필요한 때에만 사람의 形象(형상)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濟度(제도)하고 다시 바위 속에 숨어 계시는 거라고 믿었다.

  三國遺事(삼국유사) 卷第五 感通 第七眞身受供(권제오 감통 제칠진인수공)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글이 있다.
  임금의 齋(재)를 올리는 자리에 襤褸(남루)한 차림으로 참석한 중이 있었다. 齋(재)가 끝난 후 임금은 중에게 말했다. “돌아 가거든 國王(국왕)이 올리는 자리에 참석했다는 말 하지 말라.” 중도 웃으며 대답했다. “陛下(폐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眞身釋迦(진신석가)를 공양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오.”하니 이때 襤褸(남루)한 중의 몸에서 金(금)빛 光彩(광채)가 나고 솟아오르는 구름을 타고 南(남)으로 가 버렸다. 임금은 당황하여 여러 번 절하고 사람을 시켜 釋迦(석가)의 眞身(진신)을 찾아오라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眞身釋迦(진신석가)가 南山(남산) 玭琶岩(빈파암) 옆에 있는 바위 속으로 숨어버린 뒤였다. 임금은 할 수 없어 眞身釋迦(진신석가)에 감죄하는 뜻으로 玭琶岩(빈파암) 앞에 釋迦寺(석가사)라는 절을 짓고 숨어버린 바위에 佛無寺(불무사)를 지었다 했는데 지금도 玭琶岩(빈파암) 막바지에 두 절터가 남아있다.
  新羅(신라)사람들은 佛敎收入(불교수입) 이전부터 바위를 신앙했다. 하늘과 밝음과 祖上(조상)과 山川(산천), 그리고 老木(노목)과 岩石(암석)들은 먼 石器時代(석기시대)부터 우리조상님들이 믿어오던 신앙대상이었다. 바위 속에도 병을 낫게 해주고 아들, 딸을 점지해 주는 강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 믿어 온 新羅(신라)사람들이었기에 佛敎收入(불교수입)후 에는 그 힘이 부처란 이름으로 계속 신앙되었던 것이라 믿어진다. 78體(체)나 되는 南山石佛(남산석불) 中(중) 50體(체)가 바위 면에 새겨진 磨崖佛(마애불)이라는 사실도 그러한 추정을 立證(입증)해주는 것이 아닐까? 東南山(동남산) 부처골 龕室如來像(감실여래상)은 石工(석공)이 바위 속에서 부처를 찾아낸 것이라는 新羅(신라)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西南山(서남산) 冷谷(냉곡) 線刻六尊佛像(선각육존불상)은 다듬지 않은 거친 바위面(면)에 이승의 主(주)이신 釋迦三尊(석가삼존)과 極樂(극락)의 主(주)이신 阿彌陀佛三尊(아미타불삼존)을 새겨 놓았다.
  이곳은 極樂(극락)의 阿彌陀如來(아미타여래)가 이승의 釋迦(석가)부처님께서 거느리고 계시던 生命(생명)을 극락으로 引繼(인계)하여 가는 곳! 즉 이승과 저승의 交叉點(교차점)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新羅(신라)의 孝子(효자)들과 孝女(효녀)들이 念珠(염주)를 굴리며 목 메이게 念佛(염불)을 외었을까? 그보다도 印象的(인상적)인 것은 다듬지 않은 거친 바위 면에 부처를 새긴 素朴(소박)한 技法(기법)이라 하겠다. 부처님 靈(영)이 깃들어 계신 自然(자연)이 행여나 破壞(파괴)될까 조심스러워 人工(인공)을 限(한)까지 省略(생략)한 謙虛(겸허)한 태도는 藝術家(예술가)들이 지녀야 할 가장 格(격)높은 자세가 아닐까. 東南山(동남산) 塔谷 (탑곡)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높이 10m 가량 되는 큰 바위덩어리인데 사면에 佛像들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부처바위라 부르는 것이다.
  온 누리(法界(법계))의 核心(핵심)되는 부처를 智慧光明體(지혜광명체)인 毘盧遮那佛(비로자(차)나불)이라 한다. 이 부처의 빛이 東(동)에 비추면 阿閦如來(아축여래)의 香積世界(향적세계)가 되고 西(서)에 비추면 阿彌陀如來(아미타여래)의 극락世界(극동세계)가 된다. 南(남)에 비추면 寶生如來(보생여래)의 歡喜世界(환희세계)가 되고 北(북)에 비추면 微妙聲如來(미묘성여래) 蓮華世界(연화세계)가 되어 온 누리는 華嚴莊嚴(화엄장엄)한 四方佛(사방불)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經(경)에 따라 佛國名(불국명)이 다름.) 이 바위에는 四方佛(사방불)을 새기고 부처의 머리 위에는 天蓋(천개)며 佛國(불국)의 榮光(영광)을 讚美(찬미)하여 꽃을 뿌리거나 奏樂(주락)하는 많은 飛天(비천)들이 새겨져 있고 香爐(향로)를 받들어 下降(하강)하시는 부처님을 맞이하는 스님도 새겨져 있어 바위전면에는 온 法界(법계)의 歡喜(환희)가 차고 넘쳐나는 感激(감격)을 느끼게 된다. 또 이 바위에는 佛菩薩像(불보살상)과 仁旺像飛天像(인왕상비천상)등 23體(체)나 佛敎像(불교상) 外(외)에 二基(이기)의 本塔(본탑)과 두 마리의  獅子(사자)가 彫刻(조각)되어 있어 한 바위에 廣大(광대)한 莊嚴世界(장엄세계)의 情景(정경)이 夜樣(야영)하게 表現(표현)되어 있는데 彫刻手法(조각수법)이 모두 얕은 陽刻(양각)이어서 얼른 보기에는 迫力(박력)이 없는 듯이 느껴지는데 南(남)쪽 면에 豊滿(풍만)한 量感(양감)에 넘치는 立體(입체)의 如來像(여래상)을 세워 그 弱點(약점)을 補强(보강)해 놓은 슬기로운 ?相(?상)은 神技(신기)로운 재치라 하겠다.
  또 이 바위는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그대로 毘盧遮那佛(비로자(차)나불)의 法堂(법당)을 信仰(신앙)되었던 것이다. 바위의 南面(남면)모퉁이에 法界(법계)를 수호하는 仁旺像(인왕상)이 새겨져 있음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남쪽 바위 언덕에 서 있는 3층 석탑은 法界(법계)의 등대인양 높이 솟아 먼 곳에서도 쉽게 보임으로 마을사람들은 이 계곡을 塔谷(탑곡)이라 불러온 것이라 한다. 또 四方佛(사방불)이 새겨져 있는 佛蹟(불적)으로 烽火谷(봉화곡), 七佛庵(칠불암)이 있다. 하늘로 치솟은 바위산 허리에 자리 잡은 이 절터에는 4.68m×8.4m되는 큰 바위에 새긴 釋迦三尊(석가삼존)과 그 앞에 각 면이 꼭 같지는 않으나 약 1.6m×1.6m×2.7m가량 되는 크기의 6면 立方體(입방체)의 바위에 새긴 四方佛(사방불)이 있다. 불상들의 가사자락이 蓮花臺座(연화대좌)를 덮고 있는 모습이나 寶珠形 頭光(보주형 두광)의 형식에서 中國(중국)불상이 隋(수)양식에서 唐(당)양식으로 바뀌는 과도기적인 수법을 볼 수 있다.
  보살들이 자연스럽게 놓이려고 애쓰는 발끝의 표정이라거나 本尊(본존)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움직임이라거나 새로운 시대를 마련하려는 조각가의 노력이 역력히 엿보인다. 7C말-8C초 선배조각가들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어찌 석굴암과 같은 황금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七佛庵(칠불암)에서 더 높은 곳에 구름 위에 걸터앉아 지상으로 강림하시는 신선암보살상이 있다. 남산 佛蹟(불적)에서 뺄 수 없는 것은 冷谷岩峯(냉곡암봉)의 큰 바위산을 배경으로 하고 남향으로 앉아계신데 발아래는 천길 절벽이어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이다. 천상 불국의 환상을 지상에 옮기려는 신라인들의 꿈은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얼른 보기에 이 불상은 미완성처럼 느껴진다.
  얼굴은 정교한 솜씨로 둥글게 새겼는데 비해 몸체는 거친 바위덩어리를 이용하여 선각으로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몸체까지 얼굴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佛像(불상)은 背景(배경)의 바위산에서 分離(분리)되어 한 개의 人工品(인공품)으로 品位(품위)가 떨어졌을 것이다. 얼굴은 인공으로 하였으되 몸체에서는 과감하게 人工(인공)을 생략하여 半自然(반자연)으로 나타냈음으로 佛像(불상)은 배경의 바위산과 하나로 조화되어 禮拜(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위산으로 이끌어 준다. 이때 바위산은 부처님의 宮殿(궁전)으로 昇華(승화)된다. 自然(자연)을 부처님의 宮殿(궁전)이라 믿었기에 新羅(신라)사람들은 자연을 파괴하지 아니했다. 이러한 느낌을 주는 佛蹟(불적)으로는 鮑石谷(포석곡)(부엉골) 늠비봉 石塔(석탑)이 있다.
  바위로 된 三角山(삼각산)위에 섰던 塔(탑)이다. 지금은 허물어졌으나 石材(석재)들을 다음은 솜씨로 보아 그 原型(원형)을 짐작 할 수 있다. 塔身(탑신)은 加工(가공)한 石材(석재)를 썼으나 基壇部(기단부)에서 人工(인공)을 省略(생략)하여 自然(자연)의 巖山(암산)에 連結(연결)시켜 놓았음으로 山(산)이 그대로 하늘을 찌르는 堵(도)로 昇華(승화)되어 크나큰 溪谷(계곡)에 佛國淨土(불국정토)의 靈感(영감)을 채워 놓은 것이다. 自然(자연)과 함께 숨 쉬는 멋 人工(인공)을 뽐내지 않는 格(격)높은 멋 그러한 멋이 우리 멋이다. 또 南山(남산)에 계신 부처님 靈(영)들이 人間(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 언제나 庶民(서민)의 얼굴을 하고 素朴(소박)하게 웃는다. 拜里三體石佛(배리삼체석불)과 開善寺(개선사) 藥師如來(약사여래)는 그 좋은 例(예)이다. 庶民(서민)들과 사이에 壁(벽)이 없는 人間(인간)다운 부처님들! 그 人間(인간)다운 부처님들이 머물러 계시는 南山(남산)에는 아직도 많은 부처들과 石塔(석탑)이 있지만은 紙面(지면) 관계로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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