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형성에 공동체 의식을

思想敎育(사상교육)과 생활훈련을 통한 價値(가치) 정립
이제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은 발전적으로 情緖(정서)와 意志(의지)와 知性(지성)에 호소하는 全人敎育(전인교육)이라야 한다. 이를 통한 국민의 精神的(정신적) 紐帶(유대), 秩序(질서)의 창조에서 오늘의 民族的(민족적) 國家的(국가적) 試鍊(시련)은 克服(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정신교육의 問題點(문제점)과 對策(대책)
  국가사회의 발전은 국민 가치관의 設定(설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나의 통일적인 정신적 이념을 구심점으로 온 국민이 합심 단결할 때 국가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적인 특수상황은 이 가치관 혼돈의 現代(현대)에서, 어느 국가보다도 더욱 견고한 국민정신의 기반을 요청하고 있다. 국민의 의식구조 속에 국가사회의 발전의지를 심기 위한 전인적인 국민정신교육이 절실히 필요시 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주>
 

  東西古今(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 어떤 국가이든지 그 구성원과 그 국민의 정신적인 유대와 질서, 그리고 충성 없이 존속하거나 발전할 수 있는 例(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오늘날에 있어서처럼 상황이 빨리 變化(변화)하고 상황이 더욱 복잡해져가고 있는 시대의 있어서는 어떤 사회 어떤 국가의 존속과 발전도 모든 국민의 굳은 정신적인 유대와 두터운 충성과 바람직한 질서를 전제로 하고서만 생각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서 南北(남북)이 분단되고 북쪽에 있는 공산집단이 역사상 그 類例(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敎條主義的(교조주의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의 집단이며 地政學的(지정학적)인 위치도 우리가 유리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 아래서 그 위에 자유세계가 너무나도 실리적인 기회주의의 노선을 추종하면서도 선입관과 편견에 좌우되는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分裂(분열)된, 이러한 여건아래서는 우리가 우리 모두의 생존과 국가의 存立(존립)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정신적인 유대와 질서, 그리고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충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은 없다.
  만약 우리가 말하는 국민정신 교육이라는 것이 국민의 意識(의식)구조 속에 우리의 국가사회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한 價値觀(가치관)을 내면화시키고, 행동화시키고 생활화시키는 것을 뜻한다면 이러한 교육은 결코 새로운 것도 아니고 특수한 성격의 것도 아니다. 어느 時代(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국가가 교육제도를 만들고 이것을 지원하면서 그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난 청소년들과 성인들이 그 국가의 체제에 생산적으로 이바지할 수 없는 또는 그 국가의 체제에 저항하는 그러한 인간들이 되도록 교육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국가의 체제 안에서 생산적으로 이바지하고 그 국가를 위해서 충성하는 그러한 사람을 교육하기를 원했을 것이며, 이에 맞추어서 교육제도와 교육방법과 교육내용을 조절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對立(대립)의 樣狀(양상)이 오늘날에 있어서는 옛날의 冷戰(냉전)의 시대처럼 단순하지 못하고 점점 복잡해질 뿐만 아니라, 敎育(교육)이 보편화된 現代社會(현대사회)에서 知識人(지식인)들의 期待水準(기대수준)은 매우 높아지고 産業(산업)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러한 기대수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데서 오는 社會不安(사회불안) 등과 대결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들에서도 우리가 말하는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더욱 認識(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美國(미국)의 Wisconsin大學(대학)교수인 Jack Denuis는 우리가 말하는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을  ‘Political Socialization’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위한 열 가지 問題(문제)들에 대한 關心(관심)이 美國(미국)에서 一般化(일반화)되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로는 이러한 敎育(교육)의 政治體制(정치체제)를 위한 중요성(System Relevance)이고, 둘째로는 이러한 敎育(교육)의 敎科內容(교과내용)(Varieties of Content)이고, 셋째로는 人間(인간)의 성장과정과의 관계(Across the Life Cycle)이고, 넷째로는 世代(세대)들의 差異(차이)에 따르는 문제 (Across Generations)이고, 다섯째로는 文化的(문화적)인 전통과의 관계(Cross Cultural Aspects), 여섯째로는 社會的(사회적)인 계층들과 文化的(문화적)인 특수집단들의 變動(변동)에 관한 문제(Subgroup and Sub-cultural Variations),일곱째로는 學習(학습) 過程(과정)(Learning Process)에 관한 문제, 여덟째로는 이런 敎育(교육)의 機關(기관)들에 관한 문제(The Agents and Agencies), 아홉째로는 이런 敎育(교육)의 범위(The Extent)와 개인차에 따르는 相對的(상대적)인 효과(Relative Effects)의 문제, 열째로는 간부집단을 위한 특수교육(Specialized-especially Elite)등이다. 얼마나 큰 關心(관심)을 가지고 철저히 硏究(연구)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이라는 표현은 최근에 나타났지만 이와 관계된 교육의 역사는 깊다. 解放後(해방후)부터 시작된 民主主義敎育(민주주의교육) 또는 民主市民敎育(민주시민교육), 그리고 6․25動亂後(동란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反共敎育(반공교육), 滅共敎育(멸공교육), 安保敎育(안보교육), 統一敎育(통일교육), 그리고 비교적 역사가 짧은 새마을교육과 民主倫理敎育(민주윤리교육)등이 우리의 국가사회의 存立(존립)과 발전을 위한 교육이며 정신적인 유대와 질서, 그리고 共同體(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위한 교육이다. 따라서 이 모든 교육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국민정신교육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여러 가지 명목들의 교육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들이 모두 우리의 국가사회가 그때그때 요청한 국민정신교육의 특수한 제한된 측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 명목들의 교육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별할 수가 있다. 첫째가 民主市民敎育(민주시민교육))이고, 둘째가 反共敎育(반공교육)이 대표가 될 수 있는 교육이며, 셋째가 새마을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民主市民敎育(민주시민교육)이란 철저히 個人主義(개인주의)의 원리를 전제한 교육이다. 인간은 理性的(이성적)인 존재라는 매우 樂觀的(낙관적)인 人間觀(인간관)을 토대로 하고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개인과 素質(소질)들을 전체적으로 조화 있게 기르기만 하면 사회적인 질서는 자연적인 조화의 법칙에 의해서 절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이 그의 怡聲(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非理性的(비이성적)인 행동들에 의해서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바람직한 素質(소질)들은 자연으로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화의 과정에서 습득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질서라는 것은 자연적인 조화의 법칙에 의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계획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창조되어야 하는 성격의 것이다. 民主市民敎育(민주시민교육)에서는 정신적인 유대와 사회적인 질서 共同體(공동체)를 위한 忠誠(충성)을 위한 계획적인 교육에 대해서 매우 인색한 관심만을 표현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初期資本主義社會(초기자본주의사회)와 특유한 형태의 개인주의에 근거해서 그들의 槪念的(개념적)인 道具(도구)들을 개발하고 이러한 개념적인 도구들을 가지고 교육의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교육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유한 형태의 個人主義(개인주의)는 오늘날의 後期資本主義社會(후기자본주의사회)와 産業社會(산업사회)에서는 이미 非現實的(비현실적)이다.
  둘째로 우리나라의 反共敎育(반공교육)은 뭐니 뭐니 해도 매우 成功的(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反共敎育(반공교육)이라고 부르든, 滅共敎育(멸공교육)이라고 부르든, 安保敎育(안보교육)이라고 부르든 그러한 敎育(교육)의 目的(목적)은 共産主義(공산주의)를 反對(반대)하고 共産黨(공산당)을 미워하고 경계하려하는 敎育(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우리나라의 反共敎育(반공교육)이 人間(인간)의 知性(지성)보다도 感情(감정)에 호소했기 때문에 그 성과를 樂觀的(낙관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고 批判(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人間(인간)의 行動(행동)을 決定(결정)하는 데는 知性(지성)보다 感情(감정)이 더 강한 힘으로 作用(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가 되든 反共主義者(반공주의자)가 되든 共産主義(공산주의)의 理論(이론)을 完全(완전)히 知性的(지성적)으로 살핀 다음에 支持(지지)혹은 反對(반대)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한 人間(인간)의 삶의 歷史(역사)에 의해서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反共主義者(반공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知性(지성)은 대체로 이미 情緖的(정서적)인 동기에 의해서 결정된 태도를 正當化(정당화)하는 기능을 가졌다. 우리나라의 反共敎育(반공교육)에 문제가있다면 그것은 知性(지성)이 뒤따라서 正當化(정당화)할 수 있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끔 敎育(교육)이 뒷받침을 못해준데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國民學校(국민학교)와 中學校(중학교)에서 철저하게 共産主義(공산주의)를 반대하고 共産黨(공산당)을 미워하는 敎育(교육)을 성공적으로 받은 아동들이 思春期(사춘기)를 거치면서 그들이 가졌던 固定觀念(고정관념)을 뒤흔들어 버리고 오히려 共産主義(공산주의)에 대해서 知的(지적)인 好奇心(호기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靑少年(청소년)들이 社會生活(사회생활)에서 不滿(불만)을 느끼고 그들의 期待(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國家社會(국가사회)의 體制(체제)안에서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면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고 봐야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反共敎育(반공교육)이 성공해서 거의 모든 國民(국민)을 反共主義者(반공주의자)로 만들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國家社會(국가사회)의 存立(존립)과 발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共産主義(공산주의)는 반대하면서도 우리 社會(사회)를 위해서 질서를 지키고 우리 國家(국가)를 위해서 忠誠(충성)을 하고 生産的(생산적)으로 이바지하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면 우리는 결국 共産主義(공산주의)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永久(영구)히 막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共産主義(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교육보다는 우리의 國家體制(국가체제)와 그 理念(이념)을 支持(지지)하고, 共産黨(공산당)을 미워하는 교육보다는 우리 政府(정부)를 사랑하는 교육이 중요하다.
  셋째로 새마을 敎育(교육)은 바로 오랫동안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失意(실의)에 잠겨있었던 우리의 農村(농촌)에 잘 살아 보자는 意志(의지)에 호소해서 우리도 노력하고 協同(협동)하면 잘살 수 있다는 정신과 自信(자신)을 넣어주고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그리고 적어도 그렇게 만들려는 敎育(교육)이다.
  그런데 意志(의지)는 생활의 推進力(추진력)이 될 수는 있지만 생황의 목표를 제시하거나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맹목적일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精神的(정신적)인 자신과 희망을 토대로 해서 이제 全國民的(전국민적)인 精神的(정신적)인 유대와 社會的(사회적)인 질서와 바람직한 忠誠(충성)을 위한 國民精神(국민정신) 교육이 발붙일 수 있게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反共敎育(반공교육)이 주로 情緖(정서)에 호소하는 敎育(교육)이었다면, 그리고 새마을 교육이 주로 잘살겠다는 意志(의지)에 호소하는 敎育(교육)이었다면 이제는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을 발전적으로 情緖(정서)와 意志(의지)와 知性(지성)에 동시에 호소하는 全人敎育(전인교육)이라야 한다.’
  이제 만약 우리가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을 통해서 모든 國民(국민)의 정신적인 유대를 굳게 다지고 社會的(사회적)인 질서를 창조하고 모든 國民(국민)으로 하여금 國家社會(국가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서 忠誠(충성)을 다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오늘의 民族的(민족적), 國家的(국가적)시련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의 과제는 매우 무겁고 또한 매우 어렵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만만하게 달려들어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國家社會(국가사회)의 體制(체제)가 그 전체적인 기능을 이를 위해서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않으면 성공을 기대할 수가 없는 그러한 과제이다.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이란 첫째로는 人間性(인간성)을 위한 교육이다. 바람직한 人間性(인간성)을 토대로 하지 아니한 바람직한 精神(정신)은 기대할 수가 없다. 바람직한 精神(정신)은 늘 바람직한 人間性(인간성)을 토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人間性(인간성)을 위한 교육은 매우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 유치원, 탁아소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發達心理學的(발달심리학적)으로 人間性(인간성)의 토대를 잡는 것은 國民學校(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어린 시절이다. 이러한 어린 시절에 돈에 쪼들리는 부모의 표정만 바라보면서 혹은 반대로 국가사회를 度外視(도외시)한 사치스러운 생활의 분위기 속에서 인간성의 틀을 잡은 그러한 靑少年(청소년)들에게서 정신적인 유대와 사회적인 질서를 위한 책임감과 共同體(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린 시절에 人間性(인간성)의 틀이 잡히려고 할 때 거기에 國家(국가)와 民族(민족)과 공동체의 개념을 넣어주어야 한다.
  물론 人間性(인간성)을 위한교육은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야 하지만 어린 시절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學校生活(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의 과정을 통해서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모든 생활영역들을 통한 계속성만이 인간성의 교육을 위한 성과를 보장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아무리 어린 시절에 국민적인 유대감을 심어주었다고 해서 學校(학교)생활에서 學力增進(학력증진)을 위해서 현재처럼 利己的(이기적)인 競爭心(경쟁심)만 자극받게 되면 그러한 精神(정신)은 움트다가 시들어 버릴 것이다.
  둘째로는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이란 오늘의 현대적인 狀況(상황) 아래서 우리의 社會(사회)생활, 국민생활, 국제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知識(지식)들의 體系(체계)를 위한 교육 곧 思想敎育(사상교육)이라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바람직한 人間性(인간성)의 토대를 가졌다고 해도 오늘날처럼 생활환경이 복잡한 狀況(상황)아래서는 필요한 지식들을 갖지 않으면 우리가 목표하는 굳은 정신적인 유대나 바람직한 社會的(사회적)인 질서나 共同體(공동체)에 대한 충성 같은 것을 효과적으로 발현할 수가 없다.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世界觀(세계관), 歷史觀(역사관)을 가지고 있어서 이에 따라서 삶의 목표를 정하고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서 價値觀(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의 보람을 찾는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식들의 체계를 위한 思想敎育(사상교육)은 우리의 국가사회의 안정과 國民的(국민적)인 團合(단합)과 민족적, 국가적 正體性(정체성)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思想敎育(사상교육)을 度外視(도외시)하고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을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종래 이 點(점)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이데올로기의 終末(종말)’이라는 幻像(환상)이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있었을 때는 사상교육은 전연 等閑視(등한시)시 되었고 따라서 사회생활을 위한 지식들이 체계를 이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과 삶의 목표는 심층적인 충동과 實利的(실리적)인 목표에 의해서만 조종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再(재)이데올로기화가 論(논)하여 지면서 이 사상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셋째로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은 생활훈련이라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람직한 人間性(인간성)과 필요한 지식인들의 체계를 갖추어도 일상생활을 통한 훈련이 실제로 되어 있지 못하면, 그러한 國民(국민)에게서 정신적인 유대나 사회적인 질서나 共同體(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유대와 질서와 충성이 훈련을 통해서 생활화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人間性(인간성)의 교육이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서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거쳐서 계속되어야 하고 지식들의 체계를 위한 교육이 학교에서 시작되어서 사회생활을 통해서 계속되어야 한다면 생활훈련은 전체적인 삶의 과정과 모든 사회생활의 영역들 곧 가정, 학교, 직장, 여가생활, 오락생활 등을 포괄해서 이루어져야한다. 國民的(국민적)인 상호유대감과 사회적인 공동책임의식,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등이 생활되어야 하며,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사회적인 갈등들을 늘 大義(대의)를 살리면서 합리적으로 극복하고 필요할 때는 굳게 단결하는 생활훈련을 말한다. 우리의 사회는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兵營(병영)일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생활훈련을 위해서는 정치의 기능, 행정의 기능, 그리고 모든 제도의 기능,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는 매스컴과 특히 문화산업의 기능이 매우 합리적으로 그리고 民主的(민주적)으로 그러면서도 매우 효과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의 성과를 기대하고 이를 통해서 우리의 민족적 국가적 시련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려면 우리의 국가체제의 모든 기능들이 지혜롭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를 위해서 동원되어야 한다. 國民(국민)정신교육을 단순히 口號(구호)나 설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人間(인간)의 精神(정신)이란 생활조건을 창조하기도 하지만 도한 생활조건의 반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아무리 아동들에게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과 協同精神(협동정신)과 애국심을 강조해도 그 학교 안에서의 교수학습의 방법이 어떤 특수한 형태의 개인주의를 전제로 해서 個人心理學(개인심리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개발된 것이라면 국민정신교육의 효과는 相殺(상쇄)되어 버린다. 그리고 교육제도가 과외와 入試(입시)지옥 등을 통해서 피나는 경쟁만 부채질하면 국가정신교육은 전연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는 제2차세계대전후 우리나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교훈을 배워야한다. 장개석총통이 中國本土(중국본토)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모택동에게 정치교육에서 패배했다고 自白(자백)했다고 한다. 美國(미국)의 支援(지원)이나 現代的(현대적)인 武器(무기)나 軍事的(군사적) 能力(능력)등이 모자라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티우政府(정부)도 越南戰(월남전)에서 패배한 것도 外國(외국)의 지원이 모자라거나 무기가 부족하거나 군사작전을 위한 지휘에 무능해서가 아니다. 그것도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우리는 이점에서 樂觀(낙관)해도 좋은지? 나는 아직 이론적으로는 悲觀的(비관적)이다. 나는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을 위한 매우 지혜로운 그리고 革命的(혁명적)인 결단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우리의 국민정신교육은 全體主義國家(전체주의국가)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에 있어서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이라야 하고, 그 수단에 있어서 强制的(강제적)일수 없기 때문에 民主的(민주적)이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敎育(교육)이 원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미래지향적인 事業(사업)이지만 우리의 국민정신교육은 全體主義國家(전체주의국가)보다 더욱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시간에 쫓기고 있다.
 

  <본 논문은 지난 5월 28일 본교 安保硏究所(안보연구소)에서 ‘國民精神敎育(국민정신교육)의 問題點(문제점)과 對策(대책)’을 주제로 개최한 제5회 세미나 발표 논문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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