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봉 저


 文學硏究(문학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작가작품론을 통한 문예미 탐색과 그 문학사 정립에 있다. 나아가 溫故(온고)의 法度(법도)로 知新(지신)하려는 삶의 성찰 및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위대한 숙고의 작업이다.
  국립 제주대학교 尹光鳳(윤광봉) 교수가 오랜 숙고의 끝에 “韓國演戱詩硏究(한국연희시연구)”를 공간하여 問世(문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역시 저자의 序言(서언)대로 한국연희사의 정립을 위한 첫 작업이다.
  워낙 연희란 몸짓과 말로써 활달한 움직임과 춤이 곁들어진 놀이로 사설과 唱(창), 갖은 재주와 마임(mime)이 가미된 이른바 民風(민풍)이자 그 풍속도이니. 자못 민족혼의 綠化(녹화)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文錄(문록)의 인멸은 물론, 버림받은 하층에 의해 전승되었을 뿐, 그 詩化(시화)역시 몇몇 好事家(호사가)에 의해 채록된 데다, 國學(국학)연구이래 이에 대한 무관심으로 거의 不毛(불모)의 지경에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尹(윤)교수의 本著(본저)는 斯界(사계)의 최초의 專著(전저)이니 모름지기 영성하던 국문학의 한 장르를 풍성히 살찌운 賢勞(현노)라 恭賀(공하)하기 주저롭지 않다.
  氏(씨)는 일찍이 학부 때부터 연희에 主重(주중)했을 뿐만 아니라, 또 出衆(출중)하더니 진작 우리나라 최초의 연희시 崔致遠(최치원)의 ‘鄕樂雜詠五首攷(향락잡영오수고)’로 석사학위를 탔고, 이어 꾸준한 연찬으로 문헌마저 인멸한 斯界(사계)의 참고 논저를 발리고, 혹은 創新(창신)하며 ‘高麗朝(고려조) 演戱詩硏究(연희시연구)’ ‘朝鮮前期戱詩(조선전기희시)’ 및 그 후기 연희시 연구, 그리고 ‘申緯(신위)의 觀劇絶句十二首攸(관극절구십이수유)’, 杜詩(두시) ‘觀公孫大娘弟子劍器舞行放(관공손대낭제자검기무행방)’ 등 일련의 연희시 연구에 신명을 다한 줄은 그 중량감 있는 논고를 접해 잘 알던 터다.
  本著(본저)는 宋晩載(송만재)의 ‘觀優戱五十首(관우희오십수)’ 연구를 중심한 그의 학위논문에 그간의 논고를 첨부하여 위로는 三國時代(삼국시대) 연희시부터 아래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한국연희시의 집대성이요, 더욱 漢詩(한시)의 結構(결구)는 물론, 현대감각에 맞는 번역과 문예미 천착, 그리고 수용의 폭까지를 헤아린 力著(역저)다.
  이제 그 내용을 간추리면,
  제 1장 序論(서론)에서는 연구목적, 연구사검토, 연구방법을 제시했다. 특히 연구목적에서는 문헌이 인멸된 연희의 사적 정립을 위해서는 觀劇(관극), 혹은 觀優戱詩(관우희시)를 통해서 再構(재구)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필연성과 의지를 보였음을 저자다운 탁견이었다. 또한 1945년을 계기로 宋錫夏(송석하) 安廓(안곽) 金在喆(김재철) 鄭魯湜(정로식)을 중심한 전기 연구사와, 李惠求(이혜구) 李杜鉉(이두현) 金東旭(김동욱) 趙東一(조동일) 등을 주축으로 한 후에 연구사를 일목요연히 정리하며, 先功(선공)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 學究者的(학구자적) 겸허를 갖췄음은 본디 그의 덕성이다.
  제 2장 ‘韓國演戱詩槪要(한국연희시개요)’에선 먼저 연희의 의의를 매기고, 이어 ‘魏志(위지)∙隋書(수서)∙舊唐書(구당서)’ ‘中國舞踊史(중국무용사)’ ‘高麗史(고려사)’ 및 安岳三號古墳(안악삼호고분)의 ‘音樂演奏行列圖(음악연주행렬도)’ 등을 통해 三國時代(삼국시대) 연희의 맥락을 잡아냈다. 특히 王褓(왕보) 李白(이백) 白居易(백거역) 등의 문집에서 그들이 고구려 연희를 보고 쓴 연희시를 발굴해 그 편린이나마 유추해 낸 것은 실로 한국연희사의 기점을 세운 개가라 할 것이다. 한편 ‘鄕樂雜詠五首(향락잡영오수)’를 중심한 新羅時代(신라시대) 연희시는 歌舞樂(가무락)이란 연희의 3요소 중 아직 舞(무)와 樂(락)에 의한 미완의 상태라 규정하고 그 東漸(동점)의 과정을 추정했다.
  이어 高麗時代(고려시대)의 연희시는 전통적인 ‘處容舞(처용무)’를 중심으로 李穡(이색)의 ‘山臺雜劇(산대잡극)’ ‘驅儺行(구나행)’을 통해 그 일단은 캐고, 특히 李奎報(이규보)의 ‘觀弄幻有作(관농환유작)’을 통해서 인형극의 유래와 놀이형태를 제시했다.
  한편, 儒學(유학)을 國是(국시)로 받는 朝鮮朝(조선조) 연희는 초기에 다소 위축되었다 하고, 成俔(성현)의 ‘觀儺詩(관나시)’를 통해 ‘弄丸(농환)∙줄타기∙꼭두각시∙솟대놀이’등 그 前期(전기)연희형태를 정리했다. 이후 實事求是(실사구시)에 편승한 중인 계층의 문예참여와 함께 후기는 본격적인 劇文學(극문학) 정립과기정임을 밝혔다. 이른바 柳振漢(유진한)의 ‘歌詞春香歌二百句(가사춘향가이백구)’ 洪良浩(홍양호)의 ‘觀舞詩八首(관무시팔수)’, 申緯(신위)의 ‘觀劇絶句十二首(관극절구십이수)’등의 발달사적 계보와 그 문예미를 노했다. 특히 19세기 중반에 나온 송만재의 ‘觀優戱五十首(관우희오십수)’는 한국연희시의 총결산이자, 이후의 樂府詩(낙부시) 형성의 대다리 임을 논증했다. 이상의 연희시 개관은 그게 바로 한국연희사의 맥락인 줄 잘 안다.
  제 3장 ‘宋晩載(송만재)의 觀優戱五十首(관우희오십수)’에서는 먼저 時代(시대)와 배경을 朝鮮風(조선풍)∙朝鮮詩(조선시)운동이란 文風(문풍)으로 귀납하고, 이어 작가론적 측면에서 그의 생몰연대를 ?~1851년으로 家乘(가승)에 의거 증명했으며, ‘觀優戱(관우희)’ 창작연대 역시 기존의 1910년설을 1943년으로 정정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송만재의 ‘觀優戱(관우희)’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알려졌던 신위의 ‘觀劇絶句十二首(관극절구십이수)’가 오히려 구저임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후의 尹達善(윤달선)의 ‘廣寒樓樂府(광한루악부)’ 李裕元(이유원)의 ‘嘉梧樂府(가오락부)’ 崔永年(최영년)의 ‘海東竹枝(해동죽지)’에 끼친 영향, 특히 申在孝(신재효)의 판소리 정리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논증했다. 더욱 그의 문학사적 의의를 평민문학 형성기를 지나, 19세기 여러 악부 출현의 중간대로 조선 전기 연희시와 후기의 연희시를 사적으로 승계한 교량이자, 그 문예적 질감을 상승시킨 가교라고 웅변했다.
  이상의 든든한 작품론은 곧바로 이어질 후속 작업 ‘韓國演戱史硏究(한국연희사연구)‘의 迎日(영일)을 목적에 당겨 놓을 것으로 확신하며, 또 바라기는 元唐宋(원당송) 연희와의 대비, 특히 신위∙윤달선∙이유원 등의 연희시와의 대비연구도 그의 제 2의 저서에서는 흔연히 밝혀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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