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싱싱한 젊음의 상징

“도서관의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은
파도소리 만큼이나 건강하고 힘차다“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수없이 많다지만, 나의 눈에 비친 바다의 장관은 그중의 하나 인듯싶다.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의 발사를 앞두고 연일 신문지상에 끌어 오르는 경이와 신비의 환호성이 지금 나의 발치 끝에 펼쳐져 있는 말없는 바다의 용태 앞에서 그저 쑥스럽기만 한 것은 웬일일까? 경포대 해변을 따라 완만한 곡선의 추상화가 넘나들고, 수평선 이쪽 눈 앞 가까이에 멋없게 솟아있는 바위群(군)외 짙은 그림자가 수면 깊숙이 명암을 드리우고 있다. 송림을 지나 파도를 스쳐온 바람인가,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산뜻하다.
  나는 내가 머물고 내가 호흡하는 東岳(동악)의 캠퍼스를 무척 사랑한다. 운동장에서 솟구쳐오르는 땀과 근육의 하모니가 언덕받이를 올라, 도서관의 정적을 피해 잔디 위를 넘나들 때, 나는 이 흐뭇한 열기 속에서 나의 젊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저 검푸른 깊은 해저에서부터 힘있게 움직이는 수면의 율동은 마치 우리의 캠퍼스를 대하는 듯 친밀한 기분에 젖어든다.
  얼마전 친구집 과수원 밭에 나무를 심기 위해 친구들 몇 명과 어울려 강릉행 고속버스에 몸을 맡겼다. 차창을 스치며 비껴나는 서울의 外觀(외관)에 묻혀 도시의 온갖 소음과 공해 그리고 끝없는 방황, 고뇌들이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
  손끝을 통해 전신으로 떨려오는 이 묘한 만족감에 나는 망각이라는 두 음절 마저도 잊고 말았다. 정성을 들인 만큼 열매를 맺는다는 나무. 나는 지금 잔뿌리도 채 뻗지 못한 묘목에 나의 모든 사랑을 쏟고 있다. 밤새도록 불을 밝혀 책속에 혼신의 열정을 다하는 책벌레들의 순수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나는 흙 묻은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겨우 내내 눈속에 묻어 뒀던 향긋한 흙냄새, 동짓달 그 추운 밤을 견디며 모아뒀던 햇볕들이 지금 내가 서있는 이 대지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고, 나는 천년을 일해온 농부의 모습으로 자연과 어울리고 있다.
  나는 달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여러 가지 달리기 종목 중에서도 특히 마라톤을 좋아한다. 비록 내 자신이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10km는 거의 일년동안 꾸준히 달려본 적도 있다. 내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도에 늘어선 인파들의 함성때문도 아니요, 체중 조절을 위한 땀빼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달리는 순간 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망각할 수 있다는, 자신이 체험한 평범한 이유에서이다. 나는 지금 흙구덩이 속의 돌 부스러기를 골라내며 손톱 끝에 배겨드는 흐뭇한 통증을 느끼고 있다. 콧등을 스쳐 가슴 팎에 스며드는 땀방울을 씻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책속에 몰입 되어 시간의 감각을 완전히 잊고 있을 때, 둔부를 통해 허리로 스쳐오는 아픔이 오히려 흐뭇한 쾌감이듯, 나는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들어 보고 싶었던 나무의 숨결, 엿듣고 싶었던 나무와 대지의 대화,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나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못자리 일을 마친 어느 농부의 발등이 매우 인상 깊게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고된 연습을 끝내고, 세면장으로 걸어가는 운동선수의 거친 허벅지에서 힘찬 건강미를 보는 듯, 탁 불거진 복사뼈, 힘있게 뻗쳐 있는 핏줄의 윤곽이 검푸른 흙에 묻혀 강한 삶의 표상을 연상케 한다.
  새참에 곁들여 사발로 들이키는 걸직한 막걸리의 맛이 아주 기막히다. 산골을 흐르는 물이 좋아 술맛이 좋다고… 같이 일하던 과수원밭 형님의 조언이 있었지만 나는 그맛을 시골 사람들의 덤덤한 멋에서, 그리고 따뜻한 인정에서 그 맛의 연우를 찾고 싶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야산등성위로 암영을 드리울 때 폼 나는 땀에 젖고 흙에 바래 겁먹은 듯 수축된 발등을 털고 일어섰다. 내가 파고 다지고 지나온 넓은 대지가 뒤에 있고, 나의 근육 나의 건강한 정신이 웃고 있다.
  땅을 파고 일구는 농부들의 資産(자산)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발산하는 건강미 이고, 지금 눈앞에 하나의 평면으로 이어진 저 바다의 신비는 영원히 싱싱한 젊음인가 싶다. ㅏ는 지금 우리 東岳(동악)의 값진 자산은 무엇 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석조관 앞 분수대의 물줄기가 숨을 죽이고, 남산 허리를 휘어 감던 蒼然(창연)한 黃昏(황혼)이 짙은 어둠 속으로 물러갈 때면, 파릇하게 돋아난 잔디위로 밤안개가 뿌옇게 서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가로등 하나에 불이 켜지고, 바다의 파도 소리 만큼이나 싱싱하고 힘찬 빛살이 도서관의 창문으로부터 새어 나온다. 그렇다! 밤늦도록 발산하는 도서관의 불빛이야말로 우리들의 값진 자산이 아니겠는가? 나는 앞으로도 이 값진 자산을 소중히 하려 한다. 수호신이 바다를 건강하게 지키듯 나는 이 東岳(동악)을 굳세고 활기있게 지키는 東岳(동악)의 수호신이 되기를 원한다. 시원스레 들려오는 과도 소리를 가슴으로 듣고 싶다. 힘껏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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