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동대문학상 소설부문 가작1석

“그 해 봄처럼 풀어주지 말고 꽉꽉 쥐어짜야 하는데,
허구헌날 자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돌팔매질은 왜들 그래 해대는지…
허허! 이거 실없는 소릴 너무 지껄였군”
“불꽃놀이가 걷히고 먹빛 하늘이 잦아들자 도시는 제자리를 되찾는다.
버스는 피곤에 찌들은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싣고, 우울하게 도심을 헤쳐나간다.
또 다음번 버스가 도착하면 약속이나 한 듯,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우루 달려가고……”


  수위실에서 똑같이 녹색 모자를 쓴 사내가 얼굴을 내밀고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사내는 동료를 의식한 듯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다그쳤다. 교문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여학생들이 힐끔거리며 저희들끼리 쑥덕거렸다.
  “너 이따위 사진 붙이는 인간을 만나기만 하면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어, 아주 잘 걸렸다구! 따끔한 맛을 봐야지 정신 차리지!”
  사내의 악다구니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왼쪽다리가 빳빳하게 굳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사장님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총무의 입에서 침이 튀어 나온다.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머리를 뒤로 젖힌다. ‘그때 내입이 얼어붙었던 건 아닐까, 악을 써대는 수위 앞에서 어째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까.’ 밤새 잠을 설친 탓인지 머릿속에 텅 빈 것 같다. 어깨를 주무른다. 온몸이 나른하게 조여든다. 5년이나 뒹굴던 숙직실에서 막상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실감이 가지 않는다. ‘5년이나 지났다니. 내일 모레면 삽십 이군.’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린다. ‘바로 오늘이다. 그래,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는군.’ 그는 가방을 집어 든다. 총무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귓가를 파고든다.
  “내가 이렇게 자넬 보자고 한 것은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야, 나도는 소문도 있고. 내, 다 얘기하지. 다음주부터 우리극장이 전면적인 공사에 돌입하기로 했어. 부분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탄생할거야. 사장님이 결심을 단단히 하셨어.
  이미 설계도도 나왔고, 시공업체 선정도 끝났고. 당분간, 아 아니지, 그렇게 되면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서 할 일이 없어져, 내년부터는 우리시에도 시에서 지정한 공연 안내판이 따로 설치될 예정인가 봐. 물론 다른 광고는 안 되고, 공연관계만 따로 사용하는 거야.”
  총무는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더니 불을 붙였다. 상체를 비스듬히 제낀 뒤, 허공을 응시하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바닥에 재를 떨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긴말 안 해도 알겠지. 고대하던 직할시 승격도 이루어진 마당에, 거기에 발맞춰 도시환경도 산뜻하게 꾸미자는 얘기지. 그건 그렇고 이젠 사장님이 서서히 일어서실 때가 되었단 말이야. 이게 중요한 사실이야. 그해가 언제야. 여하튼 그 봄에 세상이 발칵 뒤집혀 지면서 사장님이 뜻하시는대로 착착 돌아간단 말야, 자넨, 언뜻 봐서 이해 안가는 일도 있을 거야, 톡 까놓고 얘기하자면, 사장님이 확실한 줄을 잡으셨다는 얘기지. 사실 말이지 한평생 살면서 우뚝 일어서기가 말처럼 어디 쉬운 일이야.”
  총무는 달콤한 얘기에 취해 떠벌였다.
  “어렵게 생각할거 없다구. 거 왜, 자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듣고 보고 했을 거야. 봄만 됐다면 연례행사처럼 뒤숭숭하니 시끌시끌하잖아. 그해 봄에 그저 깨끗하게 청소를 했을 때처럼 풀어주지 말고 꽉꽉 쥐어짜야 하는데 조금 풀어주니 그 지랄들 아냐, 자네도 봤을 테지, 영화시작하기 전에 돌리는 뉴스 있잖아, 허구헌날 자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돌팔매질은 왜들 그리 극성스럽게 해대는지, 저번 달이었지 아마, 역광장에서 설치는 바람에 최루탄에 눈물 쏟은 것 생각하면,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는 거야, 국민이 피같은 세금 아냐, 그 비싼 걸 그 짓거리로 낭비해야 한다니, 그저 정해준대로 선을 딱 그어놓고 제자리에 갖다 앉혀 놓으니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갔잖아, 꼭 집어서 빼 버릴 것은 털어내고. 허허!
  이거 실없는 소릴 너무 지껄였군, 아무튼, 다 잘되자고 하는 일이니 지저분한 것들은 허물고 새로 번듯하게 지어야지, 그리고 저번일은 섭섭하게 생각 말라구, 요즘 사장님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라구, 알아듣겠지. 음, 그리고 나중에 꼭 놀러와 멋들어지게 꾸며놓을 테니깐.”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른다. 총무의 말이 무얼 말하는지 헷갈린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총무는 은근하게 속삭이듯 얘기했지만 쫓겨 나간다는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3
  그는 가방을 어깨에 멘다. 가방 안에는 옷가지뿐이다. 다른 물건은 팽개치더라도 저것만은 가져가야지.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내려서 끈으로 묶는다. 노끈으로 들고 가기 편하게 묶는다. 시계를 옆구리에 끼고 출입문을 연다. 뒤돌아보지 말고 나가자, 새로운 터전으로 가는 길이며, 숙직실문이 닫힌다. 그는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계단을 향한다. 영사실은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 영사실이라고 쓴 아크릴간판이 반은 달아나 있다.
  휴게실은 텅 빈 진열장만이 휑뎅그렁하게 차지하고 있다. ‘일주일전만해도 관객들로 붐볐고, 벽에는 세계의 유명한 배우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화장실 쪽에는 의자가 뒤집힌 채 쌓여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도 보이는 사람이 없다. ‘모두들 어디로 간 것일까. 어째 사람을 볼 수가 없지. 맞아, 오늘쯤 직원회식이 있다고 했지.’ 화장실 앞 의자 더미에서 화환이 유별나게 눈길을 끈다. 꽃더미가 풀어헤쳐져 있다. 극장의 처지만큼이나 형편없이 구겨져 있다. 황해도 도민 향우회라고 쓰여진 글씨가 꽃더미에 달려 있다. 하단에 인쇄된 글씨가 유독 크게 다가온다. ‘황해고 향우회 회장이신 김복태선생께서 지역발전을 위하여, 여러분이 성원을 기대하면서, 향우회 회원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하면서, 향우회 회원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사장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좌중을 휘젓고 다녔다. 총무도 말쑥한 새 양복에 가슴에는 꽃을 달고 사장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머리에는 전에 없이 기름까지 자르르하게 바르고 있었다. 극장안의 무대에서는 간드러지는 여자의 비음 섞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장은 살점이 축 쳐진 볼을 연신 실룩거리며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는데 정신이 없었다. 극장 간판을 내리고 사장이 회장으로 있는 향우회의 잔치가 한창이었다. 사장은 여태껏 해왔던 향우회 모임을 대대적으로 확산시켰다. 도시 안에 산재해 있는 향우회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그 단합대회를 거창하게 열고 있는 것이었다. 선물꾸러미를 받아든 중년이 사내들이 어울리며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한결 같이 사장에 대한 칭송이 끊일 줄을 몰랐다.
  사장은 휴게실을 분주히 오가다 객석에서 나온 사내들에게 팔목을 붙들렸다. 사내들은 사장에게 무대에 올라가 노래 한 곡 뽑기를 간청했다. 사장은 못이기는 척하며 그들에게 이끌려 가고 있었다. 무대에 오른 사장은 못이기는 척하며 그들에게 이끌려 가고 있었다. 무대에 오른 사장은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의 환대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먼저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고향 어르신들께 이 자리에서나마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한 마음으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조국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여기 모인 우리들이야 말로 자유와 조국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닌가 합니다. 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부 몰지각한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모르면 알려줘야 할 의무가 저희들에게 당연히 있겠지요. 그래서 본인은 앞으로 여러분의 종으로서 힘껏 일할 것임을 엄숙하게 선언하는 바입니다.
  끝으로 차린 것은 없지만 아무쪼록 많이 드시고, 흥겨운 자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김복태, 다 여러분이 키워준 덕분에 오늘날 이 자리에라도 설 수 있지 않았나… 앞으로도 변함없이 많은 지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럼 못하는 노래지만 이왕 자리에 나섰으니,”
  사장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미이이아리이이 눈무우울 고 오개. 님이 넘던……….”
  그는 구겨진 꽃더미에서 우렁차게 외치던 사장의 목소리를 찾는다. 예전에 들어본 사장의 연설은 어느 구석에서도 끄집어내기 힘들다. 돈이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사장이 극장을 인수하고 상견례를 가질 때 그 어리숙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처음 얼굴을 대하던 날 사장의 행동은 두고두고 뒷말을 낳았다.
  사장은 직원들을 휴게실에 늘어서도록 만든 뒤 헛기침을 연발했다. 갑자기 모인 직원들은 신임 사장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장의 입에 눈길을 모았다. 사장은 기침이 멎자 엄숙한 얼굴로 돌변했다. 사장은 금테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본인이 문화사업이랍시고 큰맘 먹고 극장을 사들였습니다. 사실, 전 군 생활을 좀 겪었기 때문에 딱딱한 인상을 풍긴다는 말을 주위에서 종종 듣고 있습니다.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부드러울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약시킨다면 정서적으로 메말랐다는 말과도 통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 년이 다 가도록 극장에 가본 적이 없으니 돈도 돈이지만 이제 문화사업도 해가면서 군에서 배운 것과 회사 경영에서 얻은 것들을 합쳐 나 보다는 이 사회를 위해서 힘을 쓸까 해서 어려운 길을 내딛었습니다. 사장이 바뀐 것을 염두에 두시고 아무쪼록 열심히 뛰어 주기 바랍니다.”
  사장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입을 꽉 다물고 있다가, 생각난 듯 느리게 머리까지 숙였다. 극장직원이래야 총무까지 합쳐서 겨우 열 명이었다. 세 줄로 서서 사장의 취임사에 귀를 기울이면 직원들은 돌연한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사실에서 껌이나 쩍쩍 씹으며 지내던 그들에게 난데없는 사장의 취임사라니’ 직원들은 놀란 눈으로 옆의 동료들에게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직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하자 맨앞 에 서 있던 총무가 재빨리 사장을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총무의 뒤를 따라 다른 직원들도 얼떨결에 덩달아 허리를 굽혔다 .사장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머리를 들었다. 사장이 연설이 끝날 무렵 떡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사장은 수고스럽지만 직원들 전체가 나서서 시장의 가게마다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는 명령으로 취임식을 끝마쳤다. 직원들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사장의 연설에 똑같이 박수를 쳤다. 사장은 매우 만족한 얼굴로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총무에게 자신의 연설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총무는 가슴에 두 손을 끌어 모으고 휼륭했습니다 라는 대사를 잊지 않고 정확하게 외우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을 휘둘러보고 극장의 문턱을 나선다. ‘그래도 긴 날이었는데. 이젠 끝이 난 셈이군.’ 그가 극장이 입간판을 지나치는데 흰색 자가용이 다가와 멈춘다. 차는 그를 가로막고 섰다. 총무가 내리고 사장이 뒤에서 손수건으로 콧물을 닦으며 내린다. “이제 가는 모양이군. 회식이 있는데 참석하고 가지, 마침 사장님도 오셨는데.” 
  총무가 극장 맞은 켠에 있는 함흥냉면 간판을 가리킨다.
  “우리 직원이에요? 같이 가서 식사라도 함께 하지.”
  사장이 그의 차림을 보고 묻는다.
  “괜찮습니다. 만날 사람이 있어 서요.”
  “그래, 어디 일자리라도 구했소?”
  “네, 이 도시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라도 총무한테 찾아와요. 내 힘닿는 데까지 봐 줄 테니깐.”
  사장은 재채기를 하려는지 코에 경련이 인다.
  “박총무, 어서 갑시다. 시간이 없어서 얼굴만 들어 밀고 나와야겠어요. 감기가 걸렸나, 몸도 찌뿌등한 것이 영 시원치가 못해. 요즘 같아서는 발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니.”
  사장이 고생한 이력은 그가 거느리고 있는 기업체의 부하직원들에게 전설처럼 떠받들여지고 있었다. 물론 시의 시민들 사이에서도 전설은 입과 혀로 떠돌아다니며 살점을 덧붙였다. 사장은 저 만치 몇 걸음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입바른 찬사를 즐기며 자신의 그림자를 키워 나갔다. 전쟁이 터지자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 단신 월남하여 이를 악물었다. 돈이 굴러오는 일이다 싶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사장은 극장 말고도 시외곽 공단지역 내에 중소규모의 공장을 다섯이나 소유하고 있었다. 사장의 급속한 성장은 세상이 바뀐 그 해의 봄 이후였다.
  그는 도시에서 떠도는 사장에 관한 얘깃거리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사장의 취미는 잘 훈련된 군인을 연상시킨다. 무표정하게 목표물을 향하여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추석이 다가오자 사장 집에서 나흘간이나 시끌벅적한 잔치가 열렸다. 잔치를 벌이는 명목은 새로 인수한 공장이 잘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나흘씩이나 회사 직원들을 불러 모아 소란을 피울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잔치에 참석하면서도 사장의 꿍꿍이 속을 점쳐보며 제각기 야릇한 상상에 사로 잡혔다. 그 역시 직장동료들과 함께 마지막 나흘째 되는 날 사장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말로만 듣기로는 대지가 이백평이 넘는다는 집이었다. 대문이 열리자 반들반들하게 다듬어 놓은 잔디가 사람을 압도했다. 넓직한 정원에는 보기에도 값이 엄청난 정원수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집이 있었다니.’ 그도 총무의 입을 통해 익히 들었던 바위가 정원 한 가운데 버티고 있었다. 강원도 어느 산의 깊은 계곡에서 캐 온 것이라 했는데 가격이 천만원을 집어줘도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정원에 눈을 팔다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빈틈없이 잘 가꾸어진 정원 왼 켠에 연못이 있고 그 너머에 거대한 규모의 개집이 위압적인 버팀으로 서 있었다. 이층으로 나뉘어진 개집은 강력한 철망으로 단단히 봉쇄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적의를 품고 있는 갖가지 사나운 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송아지만한 개들, 사람들은 애초에 가졌던 호기심을 팽개치고 가까이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발이라도 내딛으면 이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는 뱉었던 탄성을 주워 담았다. 탄성은 두려움으로 그를 엄습했다.
  사람들은 개집의 위용에 주눅이 들어 할 일없이 뒷덜미만 쓸고 있었다. “크르르” 당장이라도 철망을 부수고 뛰쳐나올 듯 위협적인 울부짖음이었다. 다분히 살의가 가득 담긴….
  총무가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했을 때에야 비로소 악몽에서 깨어난 듯이 굳었던 입을 열고, 정원의 아름다움과 개집의 어마어마함을 작게 얘기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두어 발자국 떨어져 쭈뼛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돌아서면서 똑똑히 보았다. 사장이 이층에서 턱을 괴고 지긋한 눈길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부여잡고 약국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향해 걷는다. 주머니에 십원짜리 동전 두닢이 잡힌다. 사장을 그려보면 두터운 껍질의 양파가 아닐런지… 그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래, 목욕을 해야겠군.”
  그는 동전을 넣고 번호를 돌린다. “꾸르륵. 뚜뚜”
  “여보세요. 거기. 형님, 접니다. 막 극장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뭐? 목욕을 하지고? 난데없이 무슨 목욕이냐? 아무 말 말고 나오라고, 참 별일이다. 그래, 알겠다. 그럼 말이지. 음, 시장입구에 온천탕 알지? 그곳으로 와.”
  그는 횡단보도를 건넌다. 극장은 백화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반복에서 풀려난 것일까. 그렇게는 영원이 될 수 없겠지.’
 
4
  수증기로 목욕탕이 히읍스름하다. 물 끼얹는 소리가 좍좍 들린다. 토요일 오후여서 인지 사람들이 다섯밖에 보이지 않는다. 뿌옇게 흐려 앞을 가늠하기가 힘든데도 텅 빈 것 같이 한산하게 느껴진다. 볼따구니가 투실한 청년이 한증탕에서 살을 익히고 나온다. 청년은 팔을 휘두르며 찬물로 뛰어든다. 청년의 입에서 어이구 시원해라! 하는 건장한 음성이 탕 안을 맴돈다.
  “어쩌자고 시계는 다 가져오고 그래.”
  허씨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말을 던진다.
  “안 가져올 수가 없었어요. 제 물건이 있어야죠.”
  그는 비누를 온 몸에 칠한다.
  “어서 탕 안으로 들어와, 삭신이 살살 녹아드는 것 같애.”
  허씨는 얼굴만 드러내 놓고 몸을 탕에 담근다.
  “사장이 아주 난리던데요.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더니.”
  “누구나 그렇지, 그 정도 재력에 든든한 배경 있겠다. 출마 안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긴, 김사장은 워낙 요 몇 년 사이에 부상한 인물이라, 떠도는 소문도 요란하던데. 그나저나 내쫒긴 신세가 어때?”
  “섭섭하긴 해요. 어떻게 해요. 살아가는 거죠.”
  “나도 들리는 말이 이상해, 선거가 끝나면 안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둥.”
  “안 좋은 일이라뇨?”
  그가 탕 안에 들어가며 묻는다.
  “고물상터를 옮기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는 모양이야. 미관상 보기가 안 좋다는 얘기지. 서울에서는 실지로 사람이 들어 살고 있는 집을 때려 부셨다니.”
  “누구 좋으라고 하는 짓들인지 모르겠어요.”
  그는 극장의 객석에 묻힌 듯한 착각이 든다. 컴컴한 객석의 안락함이 그리움으로 젖어든다. 영화가 상영되고 어두운 객석에 틀어박히면 편안하다. 바로 옆 좌석이 돈이 많은 사람이건, 잘생긴 사람이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깜깜한 객석의 어둠은 누구나 다 덮어준다.
  “편안하고 좋지.”
  허씨는 여전히 수염에 물을 끼얹고 있다.
  “그 수염 안 깎아요? 굉장히 불편할 것 같은데, 그리고 나이보다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인다구요.”
  그는 허씨의 턱수염이 불만이다. ‘저 수염만 아니면 지금이라도 장가를 갈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멋진 수염을 왜 깎아, 미안한 얘기지만 그년을 다시 만날 때까지는 깎을 수가 없어.”
  허씨는 자랑스럽게 수염을 쓰다듬는다.
  “일루 나와봐, 내가 등을 밀어줄테니.”
  허씨가 때미는 수건을 손아귀에 움켜쥔다. 그는 탕에서 나와 허씨의 무릎 앞에 등을 대고 앉는다. 허씨의 두툼한 손이 그의 등을 문지른다. 허씨가 때를 벗기고 등에 물을 붓는다. 이번에는 그가 허씨의 등을 민다. 허씨의 등판은 가마솥 뚜껑처럼 넓다. 그는 힘을 써서 때를 문지른다. 물컹 잡히는 허씨의 살이 정겹다.
  그들은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다. 어둠이 가라앉고 있다. 낮과의 기온차가 심하다.
  “순대집이나 가서 소주나 한잔 할까.”
  허씨가 시계를 들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좋죠! 오랜만에 형님하고 술이나 진탕 마셔보지요!”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저 편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밤하늘을 쳐다본다. 불꽃이다. 도시에서 별을 헤아려본 기억은 까마득했지만,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공적인 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시민의 날 경축 불꽃놀이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한 길로 나와 하늘에 고개를 박고 손뼉을 치며 발광한다. 불꽃이 파파팍하고 섬광을 터뜨리며 작열할 때마다 와! 하는 거대한 탄성의 함성이 동시에 터진다. 저녁식사를 마친 사람, 귀가를 서두르는 피곤에 지친 직장인, 까불거리며 날뛰던 아이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밤하늘을 흔드는 불꽃에 똑같이 빠져 들고 있다.
  “섬뜩하지 않아요?”
  그는 허씨의 팔소매를 붙들고 묻는다.
  허씨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 시계 아직도 가고 있는데.”
  허씨는 시계 유리판에 귀를 대고 있다.
  불꽃놀이가 걷히고 먹빛 하늘이 찾아들자 도시는 제 자리를 되찾는다. 버스는 피곤에 찌든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싣고, 우울하게 도심을 헤쳐 나간다. 또 다음번 버스가 도착하면 약속이나 한 듯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우루 달려가고…
  그는 허씨의 귀를 지나 흐르는 시계소리를 들으며 순댓국이 코를 찌르는 골목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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