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동대문학상 소설부문 가작1석

“사장은 이 사회가 유지되려면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전경이 필요하다고,
아무튼 난, 괜시리 전경들이 맘에 안 든단 말야…”
“극장은 일주일마다 꼬박꼬박 새로운 영화를 상영하고, 음, 그리고
영화상영하기전에 늘 대하는 뉴스는 판에 박은 대통력의 소식을 전하고…”

1
  문은 굳게 닫혀있다.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새벽 몇시쯤 잠이 들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 아침이 거의 다되어서야 잠이 든 듯싶다. 꼬리를 물고 달라붙는 꿈을 숱하게도 꾼 것 같은데 한 웅큼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확연하게 잡히는 것은 없고 몹시 흐리마리하다. 똑딱, 똑딱딱. 귀에 익은 소리다. ‘어김없이 해는 뜨는 군.’ 어지러운 미로 속을 헤매다 겨우 잠길을 떨쳐 버린다. 뒷골이 쑤시고 묵지근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몸을 뒤척이다 눈을 뜬다. 팔베개를 하고 한참이나 천정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하루가 밝았다는 사실을 전혀 확인하고 싶지가 않다. 세평짜리 숙직실은 회칠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가 흉하게 일그러져 있다.
  모퉁이에는 늘어진 거미줄이 제멋대로 얽혀있다. 마치 음산한 폐가를 연상시킨다. 눈이 쓰리고 아리다. 간밤에 잠을 못 이루다 그대로 켜놓고 잠든 알전구가 누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팔베개를 푼다. 출입문의 손잡이는 덧칠이 벗겨져 녹이 슬어 있다. 거뭇거뭇해진 그것은 오늘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저 문을 열어야 할 때가 왔군.” 그는 주문이라도 읊조리듯 중얼거리며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숙직실 내부를 찬찬히 훑어 지나간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출입문 상단에 빛바랜 여배우의 사진이 언제나처럼 붙박여 있다. 그녀는 이 순간에도 그를 위하여 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다. “잘 있어요. 그 동안 내게 보내준 부드러운 그 미소를 난 잊지 않으리라.” 그는 여배우에게 작별을 고하고 상체를 비스듬히 벽에 기댄다.
  일상을 함께 나누던 자신의 분신들이 오늘 따라 낯설게 느껴진다. 똑딱거리는 시계의 규칙적인 울림이 정적에 잠긴 실내를 흔들어 깨운다. 외관이 짙은 밤색인 괘종시계다. 세월에 찌든 것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퇴색한 나무판이 제법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언제쯤인지 확실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겨울이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새삼스레 묻어 두었던 일들이 떠올라 그는 피식 웃는다.
  첫눈이 내린 것이 12월 중순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세월은 달력의 마지막 달을 갈아 먹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이 땅에까지 닿는가 싶더니 이내 솜털을 흩뿌렸다. 늦게 선을 보인 답이라도 하려는지 솔방울만한 눈송이가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오전 일찌감치 영화광고 안내지를 석간신문에 옮겨 놓은 뒤, 야채시장 언저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탓으로 넓직한 시장바닥은 황량하게 버려져 있었다. 점점 더 시계가 흐려졌다. 건어물가게 좌판에는 연탄화덕을 끌어안고 남자 둘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람들 이었다. 그가 다가가자 아는 체를 하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건어물가게 주인이 건네는 잔을 사양했다. 그들의 불쾌해진 불따구니가 연탄불에 번들거렸다. 그는 남자 둘이 주고받는 수작을 들으며 몸을 녹였다. 얼얼해진 손마디가 풀어지며 온기가 스며들었다. 손바닥을 비볐다. 잔을 털어 넣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는 정육점 주인의 불끈거리는 목울대를 보자, 식욕이 들끓었다. ‘얼추 점심시간이 되어 가는 군. 일한 것도 없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다니. 여기까지 왔으니 오복집에나 가서 뜨끈한 칼국수나 먹고 갈까.’ 그는 사내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가 출출해진 배를 쓸며 막 식당 골목으로 접어들 때였다.
  등 뒤에서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꿈결 같았다. 웅웅거리는 눈바람소리가 거리를 헝클어 놓고 있었다. 눈발은 여전했다. 힘차게 줄을 죽죽 그으며 퍼붓고 있었다. 그는 환청인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끊어질 듯 소리는 점점 이어졌다. 그는 소리의 주인을 곧 잡아낼 수 있었다. 허씨 였다. “저 양반이 어쩐 일로 날도 궂은데, 하긴 얼굴 대한지도 꽤 되는군. 바쁜 일도 없었는데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허씨는 홀아비였다.
  몇 년 전부터인지 극장 초대권을 쥐어주며 오가다 알게 되었다.
  지금은 친동기간 이상으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전쟁이 터졌을 때 고아가 되어 세상 곳곳을 굴러다니다 이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열 두어살 때 고아원을 탈출해서 살아남기 위해 손에 닥치는 대로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떠돌뱅이 생활을 청산하고 공장을 전전하다. 처지가 엇비슷한 여자를 꿰차고 살았는데, 살림이 펴질만 하자 여자가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훔쳐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 뒤로 허씨는 주위에서 부추겨 두 번인가 선이라는 것을 봤다. 그러나 헐쭉해진 마음을 채울 수가 없었다. 어쩌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는 날이면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꺼이꺼이 목 놓아 울먹이며 도망간 여자를 못 잊어했다. “그년이 지금쯤 어느 구석에 처박혀 지지리 고생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애 못 낳는다고 내가 언제 지년 구박 한 번 준적이 있나. 미친년 이왕 내뺄려면 돈이라도 왕창 싸들고 튈 것이지. 모질지도 못한 년인데. 제까짓 년이 삼시 세끼 끼니 때우며, 밤이면 이슬이라도 피할 거적때기라도 있는지.”
  그는 허씨와 처음 술자리를 할 때 뭐, 이런 남자가 있나 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허씨는 고물상을 차린 뒤로는 고물과 폐품더미에 갇혀 지냈다. 알 수 없는 것은, 이상하게도 허씨가 홀아비라는 점이 그를 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내심으로 참한 여자가 나타나면 허씨에게 새장가를 권해볼 작정이었다.
  허씨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입가에서 양손을 떼고, 팔을 흔들며 어서와 보라는 시늉해 해보였다. 희뿌연 눈발 저 너머에 허씨의 털외투가 어른 어른거렸다. 시장은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있었다. 퍼붓는 눈으로 노점상들은 아예 물건 펼 엄두를 못 냈고, 그나마 문을 연 점포는 가게문을 반쯤은 닫아걸고 있었다. 노점상에 쌓아둔 물건들의 형체가 두루뭉술하게 그 원형을 잃어갔다. 상점의 간판이 지워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가 해서 절룩거리는 걸음을 재게 놀렸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 저 끝에서 눈송이를 따라잡으면, 그 줄기는 금새 원을 그리며 어지럽게 뒤섞여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수없이 많은 새털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동안 잘 지냈어? 요즘은 통 나다니질 않는 것 같애.”
  허씨가 장갑을 벗고 악수를 청했다.
  “별일 없었어요. 얼마 전에 감기가 좀 들어서 며칠 쉬었을 뿐예요. 장사는 어때요?”
  그는 인사말을 던지고 허씨 뒤를 따랐다.
  “그저, 그렇지 뭐, 이놈의 밥벌이야 겨울 한 철은 구들장 지고 잠이나 퍼 자는 거지. 용빼는 재주있어.”
  허씨는 공허하게 웃어 넘겼다. 고물상의 야적장은 하얗게 두터운 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빈병과 쇠붙이는 눈에 덮여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고, 거꾸로 세운 손수레만이 묵묵히 눈을 맞고 있었다. 웅웅거리던 뒤울음이 잠잠해지더니 눈발이 성기게 하늘하늘 내려오고 있었다.
  “첫눈 치고는 굉장하지.”
  “풍년들어서 좋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큰일이에요.”
  그의 어깨에 눈이 더금더금 얹혔다. 발에 밟히는 눈이 뽀드득 소리를 냈다. 내리는 눈발을 따라 까불거리며 날뛰던 검둥이가 윤이 번지르르한 꼬리를 살랑거렸다.
  “아! 이 자식, 그래도 날 알아보네, 난 개라면 질색인데, 검둥이는 맘에 든단 말야!”
  그는 자신의 옆구리에 기어오르려고 하는 검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둥이야 변함없지, 그놈 땜에 살맛이 난다니깐.”
  허씨가 털모자를 벗으며 진저리를 쳤다. 허씨가 기거하고 있는 판잣집에도 처마 밑에 삐주룩한 고드름이 키 순서대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허씨는 장대비를 들고 지붕에 쌓인 눈을 쓸어내렸다. 허씨가 손을 비비며 그의 등을 밀었다. 실내는 훈훈한 열기로 달구어져 있었다. 홀아비 살림답게 어수선한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이불이 깔려있는 철제침대와 사무용 책상이 전부였다. 허씨가 난로의 뚜껑을 열고 톱밥을 집어넣었다. 연통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불꽃이 탁탁 튀었다.
  “물건이 하나 들어온 게 있는데, 처분하기도 마땅찮고 해서 동생이나 줄려고.”
  허씨는 선반에서 시계를 꺼냈다.
  “잘 닦아서 쓰면 웬만한 고급시계 뺨칠 거야.”
  허씨가 팔뚝으로 시계유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거, 그냥 저 줘도 되는 거예요?”
  그는 시계를 받아들며 뭉클 솟는 더운 정을 느꼈다.
  “내가 대충 수리해 놨으니깐, 밥이나 굶기지 말고 잘 줘, 아직 한참 쓸 만 할거야, 어찌 된 건지 요즘 사람들은 옛날 거면 사족을 못 쓴다니깐.”
  허씨는 예의 그 웃음을 푸실 거리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벽에 걸린 시계가 2시를 지나고 있다. 시계의 타종소리에 허씨의 너털웃음이 묻어나온다. 그는 눈두덩을 지긋이 누른다.
  ‘눈이 왜 이리 피로할까.’ 신경이 예민해진 탓인가, 눈을 깜빡거려본다. 떴다, 감았다하기를 두 번, 세 번씩 반복해 본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눈을 감는다. 차츰차츰 넓게 붉어온다. 그는 별똥 같은 것이 치솟았다가 곤두박질하는 상상의 세계에서 엎치락거리다가 상체를 일으킨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계적인 동작으로 출입구에 버티고 선다. 그는 흐물거리는 정신을 수습하고 벽에 손길을 들어올린다. 엄지에 네모난 것이 잡힌다. 그는 비틀듯이 전기켜개를 아래로 누른다. 음울하게 실내를 쏘아부치던 누리끼리한 전구가 빛을 잃는다.

2
  그는 시게의 여음을 뒤로 하고 고개를 창으로 돌린다. 한낮이어서인지 귀밑이며 이마에 송글송글한 땀이 맺힌다. 창틀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두 뼘 남짓한 유리창이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채광이 전혀 되지 않는 붙박이 창이다. 숙직실은 영사실 지나 3층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창고로 쓰던 곳을 개조한 것이어서, 빛이 헤집고 들어올 여지가 거의 없다. 그나마 희끄므레한 창문을 영화광고 현수막이 해를 차단하기 일쑤다. 날씨가 맑더라도 침침한 실내 분위기를 걷어 내기에는 빛이 미치지 못한다. ‘유리를 투명한 것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꼭 유리를 갈고 싶었는데, 이 방에 좀 더 많은 빛이 넘실거리기를 고대했었는데.’ 그는 유리창을 올려다본다.
  바깥세상은 어제와 다름없이 돌아갈 것이다. ‘아침이면 월급쟁이들은 자동인형처럼 정확한 시각에 허둥대며 전철을 탈 것이고, 백화점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계절에 맞는 상품을 들여오고, 극장은 일주일 마다 꼬박꼬박 새로운 영화를 상영하고, 음, 그리고 영화상영하기전에 늘 대하는 뉴스는 판에 박은 대통령의 소식을 전하고,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째서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억지로 뉴스를 상영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겨울이면 연탄가스 조심, 봄철이면 산불조심, 그리고 일년 내내 간첩조심, 조심, 조심, 관객들은 지루하게 조심에 신경을 쓰다가도 예고편이 시작되고 본 영화가 흥미진지하게 전개되면 잊어버리기가 십상인데, 그런데 당분간 이 도시에서는 극장하나가 문을 닫는군, 거대한 도시에서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극장의 일시적인 폐쇄에 관심을 가질까.’
  그는 길게 한숨을 토해낸다.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불은 한 쪽 귀퉁이에 개켜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짧은 왼쪽다리가 공연히 신경 쓰인다. 그는 떨구었던 턱을 치켜든다. 달력이다. 11월 6일 토요일에 붉은 동그라미가 울타리를 치고 있다. ‘기어이 오고 말았군.’ 달력의 날짜와 요일이 급작스럽게 확대되면서 그의 전신을 휘감아 돈다.
  “낮에 뭘, 어떻게 했길래 극장으로 전화가 다 오고 난리야! 그 따위로 일 하려면 다 때려치우란 말야!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아? 사장님이 말야. 답답해서 나 원. 때려치워!”
  웅웅거리는 총무의 외침이 그의 귀를 할퀴고 지나간다. 곤혹스러운 통증이 훅하고 뒷덜미를 뜨겁게 만든다.
  그는 다음 주에 상영될 영화 포스터를 붙이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숙직실에 붓과 풀통을 처박아 놓은 뒤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시월의 끝막음을 하는 때인데도 낮에는 등짝에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줄기가 보기에도 시원했다. 힘차게 콸콸 쏟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지저분한 벌레라도 떨어내듯 푸아푸아 소리를 내며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목덜미에 물을 끼얹었다. 세면기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오십줄에 접어든 사내가 화장실문을 쾅하고 열어 재꼈다. 그의 눈에 사내의 불룩한 배가 가득히 들어왔다. 사내는 갈퀴눈으로 그를 힐끔거리더니 끄윽하고 트림을 했다. 소변기 앞에서 바지를 추스르더니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그가 세면기에서 절룩거리며 비켜서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사내는 거울에 이리저리 얼굴을 굴리더니 손을 씻고 나갔다.
  그는 물묻은 머리카락을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이 맑아졌다. 거울에 담긴 그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신선한 가을바람이 시월이야 여름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한낮에 반짝하는 해만 피하고 나면 하루가 금세 기울어갔다. 칠, 팔월에 포스터를 끼고 쏘다니다보면 어지럼증이 끊일 날이 없었다. 날 뜨거운 거야 어쩔 수 없다 손치더라도 그를 가장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가끔가다 부닥치는 개였다. 올 여름 칠월의 마지막 주였다. 여름특선으로 상영할 괴기영화의 포스터를 들고 실내를 누비고 있었다. 열흘이 넘도록 빗방울마저 얼씬거리자 않아 하늘에는 엷은 구름만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는 퍼붓는 열기에 몸뚱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눅진눅진하게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위에 허덕이나 산으로, 바다로 내몰리고 있었다.
  찌는 여름의 도시는 생기를 잃고 잔뜩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시장을 벗어나자, 이윽고 주택가가 나타났다. 동네전체가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다. 그가 포스터를 부착시킬만한 장소를 물색하느라고 주택의 담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검은 색의 자가용차가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다가와 멈추더니 대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신주를 끼고 있는 이층집이었다. 그는 절룩거리며 걸음을 떼고 있었다. 이때였다. 그가 느리게 움직이는 차를 비켜 돌아서고 있는데 느닷없이 뛰쳐나온 개가 넓적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집주인이 냅다 발길질로 개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개는 깽깽거리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넓적다리에는 이빨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언제라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작업을 나갈 때에는 개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다고 해서 신통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개만 눈에 뜨였다 하면 슬금슬금 피하는 것 외에는 달리 자구책을 강구 할 수 가 없었다. 그는 버릇처럼 넓적다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머리에 물기를 떨어냈다. 화장실을 나서자 왁자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무리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부닥치며 복도를 빠져나왔다. 수건을 목에 걸고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사무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총무의 전화 받는 모습이 보였다.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은 총무가 양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눈이 찢어지도록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총무가 금세라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총무의 짙은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그는 뜨끈해진 목덜미에 손을 가져간다. ‘영화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다가 별별 수모를 다 겪어 보았지만, 끝이 이런 식으로 될 줄이야. 결국 그 일이 마지막이 되는 셈이군 그래 어쩌면 총무의 말대로 사장의 얼굴에 먹칠한 것인지도 몰라. 일 년 365일이면 하루도 달라지는 것 없는 나날들인데. 극장 청소하고 포스터를 붙이고 매일매일이 똑같이 반복되는 삶인데. 하긴, 역광장에서 붙박이 인형처럼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전경들도 있지, 방패를 허리춤에 느슨하게 기대놓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을 살피면서. 처음 그들을 대했을 때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괴상한 옷차림을 구경했었는데, 요즘은 도리어 행인들이 신기한 동물 구경하 듯 해. 나만해도 그렇지, 사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기분이 이상했었잖아, 요즘은 도리어 내가 그들을 구경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사장은 이 사회가 유지되려면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전경이 필요하다고. 아무튼 난 괜시리 전경들이 맘에 안 든단 말야, 그나저나 질서를 강조하는 사장에게 욕 먹일 짓을 했으니.’ 그는 침대 머리맡에 칙칙하게 붙은 포스터를 손으로 쓸어본다. ‘포스터ㆍ영화포스터’
  그는 오전에 객석청소를 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영화포스터와 풀통을 들고 극장을 나섰다. 어제 작업이 미진했던 시장을 돌고 역사 뒤켠에 자리한 희망촌으로 발길을 정했다. 역사를 비롯한 중앙로터리에는 시민의 날 경아치 설치작업이 한창이었다. 올해부터는 직할시로 승격된다고 해서 일주일 전부터 시가지를 화사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가로등에도 태극기와 시기가 엇물린 채 바람에 펄럭이며 사람들의 머리위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시가지 전체가 들썩거렸다. 가을날이 맑은 햇살이 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풀통을 어깨에 메고 기우뚱거리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로 철길이 어지럽게 뻗어있었다. 하늘에는 실구름 한 타래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며 떠돌고 있었다. 코끝에 와닿는 가을공기가 사과를 한입 베어 먹은 것처럼 시도록 달았다. 구름다리가 끝나자 언덕이 이어졌다. 그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멀찌감치 시를 포옹하고 있는 듬직한 산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고 뒤를 보자 시가지가 한 손에 들어올 듯 펼쳐져 있었다. 서쪽하늘을 보니 해가 반은 기울어 있었다. 수업이 끝났는지 귀가하는 여학생들로 중학교 진입로가 시끌시끌했다. 그는 전신주 근처에 포스터와 풀통을 내려놓았다. 붉은 벽돌이 차곡차곡 쌓았다. 붉은 벽돌이 쌓인 담장에는 갖가지 광고 안내종이가 어지럽게 부착되어 있었다.
  ‘신문배달원모집, 급구함 용모단정한 여종업원 한달 삼십만원에 침식제공, 사원모집 당사는 전자업계의 선두주자로서 사세확장에 따라 아래와 같이 유능하고 성실한 새 가족을 찾습니다.’ 예비군 훈련일정공고, 미싱공모집, 광원모집 전화… 그는 광고판을 흥미 있게 읽어나갔다. “내가 할 만한 일이 저 가운데 뭐가 있을까. 붙기만 한다면야. 아냐, 뭐든지 해야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붓을 꺼내들고 풀을 듬뿍 먹였다. 덕지덕지 붙은 광고 안내종이를 지워버리기라도 할 듯이 벅벅 문질렀다. 영화포스터를 붙였다. 위에서부터 팔뚝으로 쓸어내렸다. 무더기로 나뒹굴던 잡다한 종이 쪼가리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원색의 영화포스터가 그 자리를 메웠다. 그는 상영 날짜와 극장이름이 인쇄된 토막종이를 하단에 붙이려고 다시 붓을 풀통에 집어넣었다.
  “아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그는 풀먹인 붓을 들고 다음 동작으로 옮기기 위하여 팔을 들고 있었다. 피우던 담배를 짓뭉개며 웬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왔다. 밤색안경테 너머의 눈매가 매섭게 찢어져 있었다. 툭 불거진 광대뼈 사이에는 얄팍한 콧수염까지 파르르 떨었다. 사내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를 훑어지나가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당신 누구 허락받고 감히 이 따위 사진 나부랭이를 쳐 바라는 거야!”
  사내는 말끝마다 반말을 지껄이며 사정없이 포스터를 찢었다. 붉은 바탕에 젖가슴을 겨우 가리고 비스듬히 엎드려 있던 반라의 여배우 몸이 채찍으로 후려친 듯이 찢겨져 나갔다.
  “당신 어느 극장 소속이야! 당신 눈에는 어린 여학생들이 보이지도 않아!”
  사내의 음성이 드높아지면서 손가락이 그의 눈을 찌를 듯이 몰아세웠다. 사내는 찢어진 포스터 쪼가리를 그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어디 입 달렸으면 말해 보라구!”
  사내의 삿대질이 그의 몸을 오그려뜨렸다.
  “세상이 막 돌아가도 정도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멀건 대낮에 여학교 턱밑에다 이게 무슨 짓이냔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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