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ㆍEㆍMOORE를 중심으로

善(선), 정확한 意味(의미)파악 時急(시급)
自然論的(자연론적) 誤謬(오류)를 지적
善(선)은 마음속의 고유한 對象(대상)
信念(신념)에는 ‘옳은’ 行爲(행위)를 內包(내포)
行爲(행위)의 善惡(선악)은 결과여하에 따라

  <筆者註(필자주)> George Edward Moore (1873~1958)는 英國(영국) ‘캠브릇지’ 分別哲學(분별철학)의 선구자이며 ‘럿셀’과 함께 英國(영국)의 新實在論(신실재론)을 개척한 巨星(거성)이다. 그는 倫理認識(윤리인식) 肯定論者(긍정론자)로서 直學論(직학론)의 立場(입장)에서 있다. 主著(주저)는 1903年(년)에 出版(출판)된 ‘윤리학원론’ ‘윤리학’(1912년 출판)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언제나 끊임없이 提起(제기)되는 물음이 있다. 그 하나는 “나는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人間(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人間(인간)과 영혼 世界(세계)에 대한 물음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 生(생)의 주체인 행위자로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떻게 行爲(행위)해야 하나?”하는 물음이다. 前者(전자)가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人間(인간)의 存在(존재)일반에 대한 물음이라면 後者(후자)는 있어야 할 세계에 대한 實踐的(실천적) 倫理的(윤리적) 물음이다.
  “나는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가?”하는 물음의 밑바닥에는 내가 ‘해야 할’ 행위가 있다는 ‘信念(신념)’이 은연중에 內包(내포)되어있다. 해야 할 행위가 있다는 신념은 ‘옳은’ 行爲(행위)가 있다는 확신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目的主義(목적주의) 倫理法(윤리법)을 人生(인생) 또는 우주 全體(전체)에, 우리가 그 實現(실현)을 위하여 全力(전력)해야 할 客觀的(객관적)인 목적이 있다는 신조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어떤 行爲(행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그 행위가 人生(인생)의 궁극 目的(목적) 달성에 대하여 갖는 關係如何(관계여하)에 따라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法理主義論理法(법리주의논리법)은 人生(인생)의 궁극목적을 믿지도 설정하지도 않는 대신 행위의 옳고 그름을 분간할 어떤 道德法則(도덕법칙)이 주어져있다고 믿음으로서 行爲(행위)의 옳고 그름을 이미 가정된 道德法則(도덕법칙)에 비추어서 판단 내려진다고 주장한다.
  目的主義論理說(목적주의논리설)이나 法則主義論理說(법칙주의논리설)이나 모두가 事實(사실)과 증거 제시를 要求(요구)하는 科學的(과학적)일 思考(사고)에 숙련된 現代(현대) 分析哲學者(분석철학자)들의 회의적인 質問(질문)에 충분한 事實(사실)과 증거를 제시 못했다.
  종래의 倫理學(윤리학)이 事實(사실)과 증거 제시에 失敗(실패)함으로서 行爲(행위)의 옳고 그름을 判斷(판단)할 수 있는 모든 기본적인 가정과 信念(신념)이 무너짐에 따라 “과연 倫理學(윤리학)이 學(학)으로서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 있는가?”하는 새로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倫理認識肯定論(윤리인식긍정론)과 倫理認識不定論(윤리인식부정론)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倫理學(윤리학)이 學(학)으로서 성립 될 수 있다고 믿는 ‘무어’는 우선 윤리학이 知識(지식)이 되기 위한 근본 원리는 “善(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시도에 있다고 主張(주장)한다. 따라서 倫理學(윤리학)은 個人(개인)에 대한 忠告(충고)나 人生觀(인생관)에 대한 是非(시비)는 그가 할 일이 아니라고, 當爲(당위)의 문제는 잠시 멈춰 둔다.
  GㆍE 무어는 종래의 倫理學(윤리학)이 善(선)한 행위를 문제 삼을 때 언제나 행위만을 따로 떼어서 연구해 왔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善(선)한 行爲(행위)”는 “善(선)”과 “行爲(행위)”의 결합이기 때문에 善(선)을 제외하고 행위만을 따로 분리해서 옳고 그름의 原則(원칙)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라 해서 모두 善(선)할 수 없다. 어떤 行爲(행위)는 確實(확실)히 나쁠 때가 있고 또 어떤 行爲(행위)는 善(선)하지도 않고 惡(악)하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한편 行爲(행위) 이외의 다른 사물이 善(선)할 수도 있어서 그런 경우에만 善(선)이란 행위와 사물에 대한 어떤 價値(가치)를 부여 하는 것이며 행위와 사물에 共有(공유)된다.
  善(선)은 행위와 사물에 대한 評價語(평가어)이다. 그런데도 不拘(불구)하고 “善(선)”과 “行爲(행위)” “善(선)한 事物(사물)”을 단순화시켰고 評價語(평가어)인 “善(선)이란 무엇인가?”하는 先決(선결)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 행위의 속성ㆍ사물의 속성으로 善(선)을 간주 했던 것이다.
  善(선)은 결코 사물이나 행위에 본래부터 붙어있는 고유성이 아니라 行爲(행위)나 事物(사물)의 評價語(평가어)로서 形容詞的(형용사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어의 倫理學(윤리학)의 근본문제는
  첫째 善(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어떤 事物(사물)이 그 자체로 善(선)한가?
  셋째 世上(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가능한 한 최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을 쓸 것인가? 이었다. 이 세 문제 중 “무어”의 中心(중심) 과제는 첫째의 질문이고 셋째는 첫째 질문이 해결된 후 그에 적용인 行爲(행위)의 문제였다. 따라서 “善(선)이란 무엇인가”가 해결되면 事實(사실)과 증거제시에 실패함으로서 倫理學(윤리학)이 學(학)으로서 성립 될 수 없다는 理論(이론)에 强力(강력)한 반박을 할 수 있고 倫理學(윤리학)이 學(학)으로서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과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무어”는 그의 主著(주저) 倫理學原論(윤리학원론) 자체를 그 서문에서 부제로 “과학적 임을 要求(요구) 할 수 있는 앞으로의 倫理學(윤리학)을 위한 存說(존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어”의 중심 문제인 善(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에 들어가자, GㆍE 무어는 善(선)이라는 槪念(개념)은 어떤 固有性(고유성)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거나 心理學(심리학), 物理學(물리학), 기타 어떤 자연과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固有性(고유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어는 善(선)을 이와 같은 固有性(고유성)과 同一視(동일시)하는 모든 견해에 대하여 “自然論的(자연론적)”이라고 지적하고 그리고 自然論(자연론)은 “自然論的誤謬(자연론적오류)”를 범했다고 한다. 또는 善(선)은 다른 定議(정의)의 요소가 되고 더 分析(분석)할 수 없음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데 善(선)은 정의 내릴 수 있다고 보는 見解(견해)도 自然論的誤謬(자연론적오류)의 하나이다. “좋은 것”의 構成(구성)인 自然的(자연적)인 것과 善(선)의 同一視(동일시) 내지 혼동이 自然論的誤謬(자연론적오류)이다.
  善(선)은 단순하여 더 이상 분석 할수 없고 定議(정의) 내릴 수 없는 非自然的(비자연적) 固有性(고유성)이다.
  善(선)이 非自然的(비자연적) 어떤 固有性(고유성)이라고 主張(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GㆍE 무어의 倫理學原理(윤리학원리) 17페이지에 설명한 바를 인용해보자.
  사실상 누구나 이것이 善(선)인가? 하는 물음을 이해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상태는 우리가 이것은 쾌락인가, 이것은 欲望(욕망)되는 것인가, 이것은 시인되는 것인가? 등의 물음을 제기할 때와 다르다. 비록 어떤 點(점)에 있어서 이것이 善(선)인가? 하는 것이 명백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은 善(선)인가? 하는 물음은 우리에게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본래적 善(선), 본래적 가치를 생각할 때 또한 어떠한 것이 존재해야한다고 말할 때 마다 우리는 우리마음 앞에 고유한 대상 즉 事物(사물)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즉 내가 善(선)이란 말로서 의미하는 독특한 성격만이 떠오른다. 비록 이 개념이 다른 개념들(이것도 역시 그는 알고 있지만)과 다른 것이라는 점을 전연 모르고 있지마는 여하튼 이 개념에 대해서는 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善(선)이라는 말은 쾌락ㆍ즐거움 따위의 自然的固有性(자연적고유성)이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는 무어의철저한 신념이다.
  이에 대하여 ‘필립ㆍ라이스’는 그의 “善惡(선악)의 知識(지식)”이라는 저서 속에서 다음과 같이 批判(비판)한다. “무어는 善(선)의 의미를 心象(심상)에 떠오른 고유한 대상이라고 주장함으로서 마치 우리가 ‘노오람’이라는 自然的特性(자연적특성)을 感性的知覺(감성적지각)에 依(의)하여 파악할 수 있듯이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사물의 고유한 特性(특성)이라고 보는 가설을 슬쩍 끌어 들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善(선)은 非自然的固有性(비자연적고유성)으로 마음 앞에 나타나듯이 實在(실재)하고 따라서 그것은 直覺(직각)으로 直觀的方武(직관적방무)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무어가 善(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분석해 감으로서 科學的(과학적) 論理學(논리학)을 장담 했지만 善(선)은 快樂(쾌락)인가? 善(선)은 욕망스러운 것인가? 할 때 아직도 善(선)은 그렇다 할 수 없고 ‘마음속’에 어떠한 것으로 있지 않는가? 이러한 方武(방무)로 기타 자연적 속성을 적용해 “…은 善(선)인가?” 하고 물어 보라 그래도 善(선)은 네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善(선)은 非自然的固有性(비자연적고유성)으로 直觀的(직관적) 방식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 公理(공리)이나 강요 및 설복 시키려 했던 것은 논거 희박한 것이다.
  무어가 善(선)과 善(선)한 것 본래적인 선과 수단으로서의 善(선)을 나누어 善(선)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정의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善(선)이란 분석할 수 없다는데 까지는 훌륭한 비판을 가져와 現代(현대) 倫理認識肯定論者(윤리인식긍정론자)의 선구자로서 윤리 인식 부정론에 부정的體系(적체계)를 確立(확립)했으나 善(선)이 非自然的(비자연적) 固有性(고유성)이라는 主張(주장)과 그것은 直觀的方武(직관적방무)으로 파악된다는 논거는 위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극히 불투명했고 體系的(체계적)인 論理展開(논리전개)를 시도하지 못했다.
  여하간 종래의 윤리학에 대하여 ‘自然論的(자연론적) 誤謬(오류))’를 지적함으로 善(선)의 意味(의미) 즉 評價語(평가어)의 本來的(본래적) 使用(사용)에 획기적인 전환을 제시했고, 경험논적 윤리학 형이상학적 윤리학을 새로운 측면에서 철저히 분석한 것은 우리에 어떤 암시를 준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