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잉석 박사의 유고에서

人間(인간)을 墮落(타락)시키는 歡樂(환락)

  이 글은 오는 6월 7일로 入寂(입적)하신지 3週忌(주기)를 맞는 前(전) 佛敎大學長(불교대학장) 故玄谷(고현곡) 金(김)잉石(석)轉士(전사)의 遺稿(유고)를 정리 중에 발견한 것이다. 스승의 청렴 高潔(고결)하셨던 生涯(생애)를 엿보게 할 뿐 아니라 後學(후학)에게 격려가 되고 있다. 題目(제목)은 編輔者(편보자)가 任意(임의)로 부쳤다.

  나의 지나온 生活(생활)은 외롭고 괴로운 生涯(생애)였고 내가 걸어 온 길은 애달픈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괴로운 生活(생활)을 벗어나 즐거운 생활을 希求(희구)하려는 勞力(노력)도 없었고, 가시발길을 해치고 담담한 길을 探廉(탐염)하려는 勇氣(용기)도 없는 생활이었다.
  만일 그러한, 希求(희구) 있었다면 停年(정년)이 넘은 오늘의 생활이 덜 고달플런지도 알 수 없다. 이렇게도 나의 과거생활이 醉生夢死(취생몽사)이었음을 깊이 後悔(후회)한다. 그렇다고 오늘의 생활이 괴롭고 고달픈 것에는 조금도 不平(불평)이 없고 不滿(불만)도 없다. 그것은 이러한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당연하고 必然的(필연적)인 生活(생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난다, 고생한다, 죽는다, 이 세 가지는 인류의 공통된 歷史(역사)이다.
  이 세 가지 길을 밟지 않은 人間(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의 몸뚱이는 바위틈에 뿌리박은 풀잎이다. 사람의 목숨은 이 풀잎에 엉킨 이슬이다. 草露人生(초노인생)이란 말은 사람의 正體(정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다. 回天雄凰(회천웅황)를 가지고 千歲(천세)에 功名(곰명)을 날리려던 力拔山(역발산) 氣蓋世(기개세)의 項羽(항우)도 烏江(오강) 한 낱 이슬이 아니었던가. 淸談雅言(청담아언)을 일삼던 竹林七淘(죽림칠도)도 외롭고 痕迹(흔적)없는 한 이슬이 아니었던가. 春風秋雨朝夕(춘풍추우조석)에 하던 李白(이백)도 江(강) 가운데 한 방울 물이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佛敎(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苦海(고해)라 하고 火宅(화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苦海(고해)와 此岸(차안) 너머에 安穩(안온) 한 열반 彼岸(피안)이 있고, 화염에 싸인 火 宅(화택) 밖에 淯雅(육아)한 寂光土(적광토)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苦海(고해)라고만 울부짖고, 火宅(화택)이라고만 발버둥 친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하라고 策勵(책려)한다. 이 進一步(진일보) 야말로 新世界(신세계)의 창조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 百尺竿頭(백척간두)에서의 유일한 活路(활로)는 噎地一發(열지일발)의 進一步(진일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용이한 일은 아니다.
 世俗(세속)에서 흔히 하는 말 이 “근심으로 이룬 世上(세상), 걱정으로 살아간다”라고 한다. 있어도 근심이요 없어도 걱정이다. 佛經(불경)에 집이 있으면 집을 걱정하고(有宅憂宅(유택우택)), 밭이 있으면 밭을 걱정한다.(有田憂田(유전우전))라고 쓰여 있다. 과연 그렇다. 집이 있으면 쓸고 닦고 비가 새지 않게 해야 한다. 門(문) 단속도 해야 한다. 불조심도 해야 한다. 밭이 있으면 심고매고 가꾸어야 한다. 마르지 않게 비도 와야 하고 남이 손대지 않게 간수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다 걱정이다. 달팽이도 집이 있고 까막까치도 집이 있는데 몸담을 집 한 칸 없어서야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食祿(식녹)은 물론이요 또 花草(화초) 가꾸고 채소도 을 밭이 있어야 하겠는데 이것이 없어서야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또 옷이 있어도 걱정이요. 없어도 걱정이다. 寒暑(한서)를 가릴 옷이 없어야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그러나 있어도 걱정이다. 변변치 않으면 남 부끄러워 걱정, 좋으면 때 묻을까 걱정, 더럽힐까 걱정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三大要件(삼대요건)인 衣(의)·食(식)·住(주)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확실히 苦(고)다. 佛敎(불교)에서 인간에게는 四苦(사고)·八苦(팔고)가 있다고 한다. 一言以薇之(일언이미지)하면 인간은 憂悲苦悔(우비고회)로 縫綴(봉철)된 織物(직물)과도 같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의 인생관은 厭世觀(염세관) 같기도 하다. 厭世觀(염세관)은 이 이간이 세계를 最惡(최악)의 것이라고 보는데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厭世觀(염세관)이야말로 限(한)없이 불행한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인간, 이 세계를 最惡(최악)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憂悲苦悔(우비고회)로 짜낸 이 이간, 無明煩悔(무명번회)로 얽힌 이 인간, 그대로가 安穩淑淨(안온숙정)의 해탈, 彼岸(피안)의 理想鄕(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인생을 苦(고) 덩어리라 하고 인간이 사는 세상을 苦海(고해)·火宅(화택)이라고 한 것은 현실의 이 인간, 현실의 이 세계를 일단 부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인간 이 세계를 如實
(여실)하게 達觀(달관)하고 證觀(증관)하라는 말이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는 현실을 達觀(달관)할수 없고 또 新世界(신세계)를 創造(창조)할 수도 없다. 현실을 천 번 부정하면 千世界(천세계)가 창조되어 오는 것이다. 여기에 念念證眞(염염증진)이 있고, 新新作佛(신신작불)이 있는 것이다. 또 이와는 반대로 그 순간순간의 亨樂(형락)을 추구하는 風打竹(풍타죽) 浪打竹(낭타죽)의 樂天主義者(낙천주의자)도 있다. 이러한 樂天主義者(낙천주의자)야말로 厭世觀者(염세관자)보다도 훨씬 불행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소위 현실의 향락만을 추구할 뿐이요 이상이 없는 사람이다. 이상은 물론 현실이 아니다. 이상의 가치는 現實化(현실화)하는데 값이 있는 것이다.
 理想(이상)을 現實(현실)에 묘사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상을 현실화 하려고ㅛ 노력하는데 人文(인문)은 발달하고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인류가 이상을 지향하고 노력을 하는 業(업)이 쌓이고 쌓여 그 總和(총화)가 크면 클수록 현실은 理想化(이상화)되고 이상도 現實化(현실화)되어 오는 것이다.
 佛家(불가)에서는 옷 입을 때 누어 잘 때, 이 옷을 입고 이 밥을 먹고, 이 자리에 누울 功(공)을 지었느냐(計功多少(계공다소)), 또 이 옷, 이 밥 이집이 어디서 왔느냐 (量彼來處(양피래처))를 생각해서 자기가 지은 德行(덕행)에 맞추어 廡供(무공)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行事(행사)로서 자기를 반성하고 廻光返照(회광반조)의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至上道德(지상도덕)이다.
 그러나 인간은 歡樂(환락)에 잠겨있을 때는 자기를 에어버리고 찾을 줄을 모른다. 오직 자기가 역경에 처해있을 때, 외롭고 괴로울 때, 자기의 모습을 찾고 자기의 현실을 磪證(최증)하려든다. 아마 이것이 實證哲學(실증철학)일 것이다. 그런데 歡樂(환락)가운데서 자기를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드문 일이다.
 釋迦(석가)는 歡樂(환락)가운데서 자기를 찾았다. 歡樂(환락)은 인간을 마취시키는 極樂(극락)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환락이 더하면 더할수록 인간은 타락의 구렁으로 깊이깊이 떨어져가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釋迦(석가)는 道(도)를 구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여 필경에는 城(성)을 넘어 雪山修道生活(설산수도생활)을 거쳐 부리樹下(수하)에서 東天(동천)에 반짝이는 明星(명성)을 보고 道(도)를 깨쳐 三界(삼계)의 大導師(대도사)가 된 것이다.
 인생을 한낱 수수께끼다. 무엇하러 태어났으며 또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수수께끼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그래서 竹帛(죽백)에 이름을 남기라고 勵獎(여장)한다. 竹帛(죽백)_에 이름을 남긴 그 사람도 北邙山(북망산) 一杯土(일배토)되기는 마찬가지다.
 또 사람이 吸氣生涯(흡기생애)를 못할진데 衣食住(의식주)의 保障(보장)이 될 利得(이득)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名利(명리)가 인간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다못 人間生涯(인간생애)의 副産物(부산물)이요 副隨物(부수물)밖에는 아니 된다.
 사람을 아무리 치켜 올려도 사람 이상으로 올라가지도 않고, 아무리 깎어내린다 해도 사람이하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사람은 있는 存在(존재)가 아니라 사는 存在(존재)이다. 있는 存在(존재)라면 와牛角上(우각상)의 一物(일물)이요 不火光中(불화광중)의 一內(일내)이며 滄海(창해)의 一粟(일속)이다. 사는 존재이기 떄문에 一身(일신)은 우주 萬有(만유)를 抱負(포부)하고 一念(일념)은 過去永却(과거영각)을 總該(총해)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이 一身(일신)이 淸淨(청정)하면 宇宙(우주)가 淸淨(청정)하고 一念(일념)이 淸淨(청정)하면 多劫(다겁)이 淸淨(청정)하다.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한다. 바르게 사는 데는 첫째로 마음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가져야 한다. 이 바른 마음으로써 살데 살아야 하고 (生於生(생어생))이 바른 마음으로 죽을 때 죽어야한다. (死於死(사어사)). 死於死(사어사)도 어려운 일이지만 生於生(생어생)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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