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없는 보호색의 방황

健全(건전)한 生活(생활)의 民主化(민주화)에 앞장서야


  ‘男性(남성)은 法律(법률)을 만들고, 女性(여성)은 風俗(풍속)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이를 뒤바꿔서 ‘男性(남성)은 生活(생활)을 만들고, 여성은 流行(유행)을 낳는다’고 하고 싶다. 그 어느 계절보다도 ‘봄’은 流行(유행)의 철이라고 하겠다. 억눌렸던 冬臧(동장)이 물러 가고나면, 화사하고 가벼운 衣裳(의상)으로 갈아입기 시작하는 流行(유행)의 幕(막)은 갑자기 올려진다. 그런데 특히 올봄은 유행의 最盛期(최성기)와 같은 느낌이다.
  流行(유행)은 時流(시류)의 변천에 따라 社會生活(사회생활)을 변혁시키면서 변모 발전한다. 그것은 流行(유행)이 우리 주변에 커다란 風潮(풍조)의 회오리를 일으키는 衣紙(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流行(유행)은 男性(남성)에게 보다 女性(여성)을 중심으로 해마다 적지 않은 話題(화제)와 物議(물의)를 꽃피우면서 변동한다고 볼 때 이 땅에 상륙하는 流行(유행)의 바람은 女性(여성) 生活(생활)에 커다란 戀異(연리)요, 社會(사회)에서의 위치와 자세마저도 혁명을 이룩해 놓는다.
  그러면 이러한 流行(유행)속의 ‘大學生(대학생)의 모습’은 어떠한가는 아무도 이 글은 위와 가은 뜻에서도 女大生(여대생)을 主人公(주인공)으로 엮어져야 하지 않을까.
  무새 치마를 입고 학당을 다니던 우리 여성의 先驅者(선구자)들에서부터 캠퍼스를 아롱지게 수놓고 있는 ‘미니ㆍ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약 60년 동안을 擖點(갈점)으로 한다면 실로 놀라운 隔世之感(격세지감)을 금할 길이 없다.
  女大生(여대생)의 치맛자락은 곧 그녀들의 사회적 위치와 女權 (여권)을 신장시킨 생활혁명의 歷史(역사)를 간직해온 ‘思想(사상)의 衣裳(의상)’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이러한 思想(사상)과 哲學(철학)마저도 품어온 女大生(여대생)의 ‘衣裳(의상)의 流行(유행)’은 참으로 엄청난 戀貌(연모)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이 나라 女性(여성)의 流行(유행)을 이끄는 前衛部隊(전위부대)라고 할 만큼 화려하고 다단한 風潮(풍조)를 이사회에서 뿌려놓고 있기 때문에서이다.

  流行(유행)은 ‘파리’에서, 그리고 가난한 ‘코리어’의 明洞(명동)에서, 다시 그 主人公(주인공)들을 찾는다면 ‘캠퍼스’에서-.
  明洞(명동)을 활보하는 女性(여성)의 3분의 2는 女大生(여대생)이라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성 싶다. 그리고 그 女大生(여대생)의 옷차림에서 우리는 민감한 流行感覺(유행감각)과 화려한 流行風潮(유행풍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을 한눈으로 볼 때 생활의 衣裳(의상)이 아니라 생활을 등진 ‘패션쇼’를 사뭇 방불케 하는 느낌이다. ‘배지’단 젊은 女性(여성)치고 ‘미니ㆍ스커트’ 안 입은 그네들은 드물다.
  여기서 잠깐 한 外國人(외국인)이 던지고 간 심각한 ‘난센스’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韓國 女性(한국 여성)은 매일 ‘파티’에 나갑니까?”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보다 流行(유행)이건 생활이건 하나 앞선 것이 없는 美國女性(미국여성)들도, 職場女性(직장여성)이면 그네들답게, 女大生(여대생)이면 또 그네들대로 때와 시간에 따른 ‘옷’을 입을줄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고장의 風土(풍토)는 그렇지 못하다는 비극적인 결론이다. 職場(직장)을 나가건, 學校(학교)엘 가건 한결같이 高級(고급)한 流行(유행)의 컬러로 處身(처신)하지 않으면 ‘축에 끼지 못한다’는 얄팍한 保護色(보호색)을 굳이 고집하고 있는 現象(현상)이다.
  날이 따뜻해지기가 무섭게 노출된 것은 女大生(여대생)의 무르팍이다. 젊음과 泿愛(은애)의 욕구가 신선하고 발랄한 肉體(육체)의 과시에 그 使命感(사명감)이 있다고 느껴서일까?
  그러나 그 젊은 生命感(생명감)은 진정한 ‘泿愛(은애)의 哲學(철학)’과 싱싱한 思考(사고)가 없을 때 그대로 육체의 노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結果(결과)를 가져왔다. ‘미니ㆍ스커트’를 입고, 무르팍에서 10센티 上昇(상승)의 핑크를 드러내야 만이 오늘의 世代(세대)의 流行見(유행견)일수도 있다는 女性特有(여성특유)의 競爭心理(경쟁심리)가 곧 우리의 流行(유행)의 전부는 아닐까?

  最近(최근) 某(모) 新聞紙上(신문지상)에서 S大(대) 3백60명을 상대로 한 ‘大學生(대학생)의 動向(동향)’을 調査(조사)한 ‘방황하는 大學生(대학생)이란’ 題下(제하)의 글을 읽은 일이 있다.
  ‘劇場(극장)‧茶房(다방) 등은 徘徊(배회)’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記事(기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旣成世代(시성세대)라면 무조건 不信(불신)하고 보는 風潮(풍조) 또한 ‘미니스커트’는 뺨친 ‘流行’(유행)의 心理(심리)가 아닐까.
  더욱이 茶房(다방) 구석구석이 陳(진)을 치고 떠들어대고 있는 대개의 젊은 女性(여성)은 職場女性(직장여성)이 아닌, 배지를 달고 노트를 서너권 액세서리처럼 지니고 있는 女大生(여대생)들임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거의가 ‘미니 스커트’의 侍女(시녀)이거나 流行(유행)의 무대에서 ’쇼‘를 하려는 모델에 가까운 衣裳(의상)을 하고 있다.
  이 流行(유행)의 彷徨(방황)은 곧 그네들의 思想(사상)의 彷徨(방황)은 아닐 것인가?
  물론, 그네들도 對話(대화)의 廣場(광장)과, 활보의 거리와, 浪漫(낭만)의 公園(공원)과 時流(시류)의 適應色(적응색)을 찾을 權利(권리)는 있다. 하지만 꼭 그것이 思想(사상)과 哲學(철학)이 없는 討論場(토론장)인 茶房(다방)이거나, 變質(변질)된 色調(색조) 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이 무서운 原色(원색)의 몸부림은 어디서 몰러나오는 것일까.
  流行(유행)의 根源地(근원지)라는 ‘파리지앵’들도 저토록 原色的(원색적)이며 화려하지는 않다고 넋두리(?)를 들었다.
  그러면 오늘, 良家(양가)의 따님들이 즐겨있는 ‘미니스커트’가 어디서 어떻게 생긴 것일까를 女大生(여대생)들에게 참고로 피력해보면 어떨까.
  原來(원래) ‘미니 스커트’는 英國(영국)의 한 貧民(빈민) 外人部落(외인부락)인 소호 地方(지방)에서부터 始發(시발)된 것이다. 입을 것이 없는 이 地方(지방)의 ‘틴에이저’들이 어머니나 누이, 또는 자기가 입다 떨어진 스커트 자락을 썽둥 잘라 입고 다닌 것이라는 健全(건전)한 生活(생활)의 方便(방편)으로 시작되었된 것이, 한 디자이너의 눈에 발견되어 급기야는 세계의 모오드界(계)를 휩쓸고, ‘튀기’라는 말라깽이 아가씨까지 탄생시키고는 마침내 地球(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이 어쭙잖은 땅에까지 상륙하여 貧民村(빈민촌)의 少女(소녀)들과는 달리 正反對(정반대)의 部落民(부락민)에서 입기 시작 三(삼)을 가까이하는 女性(여성)들마저 부끄러움(?) 없이 입고 다니는 난센스를 낳은 것이다.
  무릇 流行(유행)을 받아들임에는 그만큼의 話題(화제)와 物議(물의)를 일으키는 것이겠으나, 一次(일차)의 反省(반성)의 여지도 없이, 입다 남은 救護物質(구호물질) 주워 입듯 남의나라 流行(유행)의 風潮(풍조)에 휩쓸려 ‘에덴의 동산’으로라도 치닫는 저 ‘肉體(육체)의 데모크라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활이 있고 哲學(철학)이 있고, 思想(사상)이 있는 流行(유행) 이러한 健全(건전)한 流行(유행)은 大衆(대중)으로부터 빈축을 받지 않는다는 평범한 眞理(진리)는 캠퍼스에서부터 發化(발화) 되어하지 않을까.
  男性(남성)은 생활을 만들고, 女性(여성)은 流行(유행)을 낳는다는 말을 지워버리고 싶지만, 이 땅의 流行(유행)은 女大生(여대생)이 만든다는 빈축을 받지 않는, 健全(건전)한 流行(유행)의 時代(시대)를 먼저 바라고 싶은 마음인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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