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살을 도려내듯 가위질해대는 유아적 처사에는 아직도 씁쓸”


  하얀 눈이 내린 이른 새벽, 성당 안 이글어지듯 자학의 몸부림으로 마리아像(상)에 매달리는 끌레망(쟝휴 앙글라드 扮(분))를 지켜보는 쥴리에뜨(나스타샤 킨스키 扮(분))는 그에 대한 사랑이 좌초됨을 느끼게 된다.
  자신과 줄리에뜨 사이를 눈치 챈 베르제롱 교수(미셀 삐꼴리 扮(분))의 마수에서 탈출, 어느 시골 이름 없는 의사로 자기 삶을 묶어버린 후에도 줄곧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야심과 줄다리기를 하다가 끝내 끌레망은 폭발하고 마는데.
  “이곳은 내가 있을 데가 아니야. 매일 오는 사람은 감기환자 뿐이란 말이야.”
  “너를 소유하기 위해서 어떤 수라도 쓰겠다.”
  줄리에뜨는 베르제롱 敎授(교수)의 자기 소유적인 말 한마디에 저당 잡힌 채 그의 출세길을 열어주기 위해 참사랑 끌레망을 떠나보낸다.
  =쥴리에뜨에게로 불치의 病(병)의 엄습=
  이것은 이 작품이 내용 속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관객에게 던진 셈이다. (실은 주제를 끄집어 내는 격이지만)
  자신의 물리적 간호만으로는 그녀의 시들어가는 생명을 부추겨 세우는 데에 역부족임을 깨달은 베르제롱은 참담한 표정으로 끌레망을 찾아가 탄식하듯 한마디 내뱉고는 그녀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포기함을 통보한다.
  “자네 때문에 쥴리에뜨는 죽어가고 있어!”
  치유의 기적은 끌레망이 옛사랑을 찾아 달려가는 장면에서 쉬이 예견케 해주고 있으며 그 두 남녀의 뜨거운 해후가 주제곡(사랑의 아픔)에 달콤하게 매치되어 은은히 흐르며 ‘The End’를 알려온다.
  상업오락영화의 범람이 우리네 정서를 황폐하게 메마를 것을 강요하는 고문에 시달리고 있기에 本(본)영화를 대함에 있어 작품 예술성이나 질적 수준은 제쳐두고라도 본 영화의 수입결정을 내린 영화수입사측에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의 눈은 세척을 바라고 있다. 부수고 죽이고 음란한 장면에만 혹 하는 얄팍한 알루미늄 박지 같은 정서는 거부되어져야 한다. 문화적 新(신)사대주의에 우리자신들을 매몰시키지 않으려면 관객인 우리들이 좋은 작품을 스스로 선별할 토양적 무대가 마련되어, 열린 문화공간으로서 영화예술이 싱싱한 숨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평란을 빌어 本(본)작품분석 자체보다는 한국영화를 빗대어 저울질 하는 것이 되어버린 감은 없지 않지만 ‘사랑의 아픔’이 보여준 깨끗한 화면처리와 인간애로 넘치는 주인공들의 언어적 터치, 치밀하게 구성되어진 연출기법 등은 감히 秀作(수작)이라 평하고 싶다. 다만 生(생)살을 도려내듯 가위질을 서슴지 않는 現(현)영화윤리심의의 유아적 처사에 이맛살ㄹ을 찌푸리게 되는 씁쓸한 고통이 아직은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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