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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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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점액시대의 혼돈 속에 몸부림치는 용의 아픔


  나는 그 유리조각으로 내 가슴을 찌르고 그 피로써 그를 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험을 끝내고 나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혜진이와의 사랑이었다. 감미로우면서 거칠고, 자신만만하면서도 우아한 사랑이었다. 550점은 자신 있었다. 나는 나의 꾸준한 노력과 그 열매인 실력과 그리고 혜진이라는 구체적 행운을 확실한 것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발기처럼 당당하면서도 두근거리는 쾌감이었다.
  마악 토플 시험을 끝내고 나오던 길이었다. 세 번째로 시도하는 시험이었는데 비로소 시험지를 대하자 과녁이 뚜렷이 보였었다. 귀 또한 뚫려 그 소음 같던 외국어도 음악이었었다. 혜진이라는 이름을 목표처럼 내걸고, 그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며 용맹 정진한 결과였다. 혜진이, 그 이름은 야망과 동의어였다. 성공과 같은 말이었다. 행복이라는 말의 다른 이름이었다.
  내 머릿속은 뉴욕 주립대학 경영학석사과정, 혜진이와의 결혼, 신대륙에의 정착, 동시에 해결해야할 아들 딸 그런 생각들이 탐스런 꽃처럼 가득했었다. 史學(사학)을 대학졸업과 함께 때려치우고 경영학으로 바꾼 것은 혜진이의 뜻에 힘입은 바 컸지만 어떻든 잘한 일이었다. “빨리 와 넌 있지…두 쪽만 달고 오면 되는 거야.”
  혜진이의 그 목소리를 떠올려 나는 내 고환을 부풀리며 쾌감에 젖어 있었다. 어느 점쟁이에게 사주팔자를 디밀어보지 않더라도 내 앞날이 고속도로처럼 뻗은 게 보였다. 택시 정류장에 나는 서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혜진이와 정사 중인 나의 밀실을 황당맞고 무례하게도 열어제끼고 쳐들어왔었다.
  “너 진우 아니냐! 아 이 자식 살아 있었네.”
  나는 알몸에 칼침이라도 맞은 양 전율했었다. 진실로 잊을 수 없고 잊지도 않은 그였다. 그러나 만나고 싶거나 만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던 그였다. 나는 백주대낮에 승냥이라도 만난 듯이 겁에 질리고야 말았다. 그랬다. 그의 이름은 한승룡(韓昇龍)이었다.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태연을 가장했었다. 반가움의 가면을 쓰고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었다.
  “나야 뭐 항상 바쁘지. 나 오늘 아침에 하와이에서 돌아왔어.”
  “그으래! 거긴 왜?”
  “가서 이승만이 만났지. 그 사람 귀신 되더니만 철 들었드군. 내가 마르코스 죽이러 왔다니까, 그대 같은 젊은이가 있기 때문에 한국은 위대한 나라라고 등을 쳐주더라구.”
  나는 빈 택시를 힐긋거리며 도망칠 궁리를 했고 그는 계속했었다.
  “그런데 말이다. 칼을 뽑았으면 피를 봐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런데 나는 이멜다의 미인계에 빠졌지 뭐냐, 옷 벗고 덤비길래 이멜다 배 위에서 놀다가 그냥 왔지 뭐야, 엿같이 이번에도 미수였어.”
  나는 드디어 도망쳤었다. 아주 급한 일이 있다고 허겁지겁 둘러대고 쪽지에 내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는 일로써 그와의 7년만의 해우를 끝내고 도망쳤었다.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틀리게 적어주지 않았음을 후회까지 하면서.
  그랬다. 승룡이는 승냥이가 되어 있었다.
  그 스스로 그렇게 변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혹은 우리들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변한 것은 바로 나여서 승룡이를 승냥이로 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인지.
  그 날은 1987년 12월 11일. 그해 마지막 토플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그리고 제 13대 대통령 선거가 있기 닷새 전 이었다.
  그 후 나는 네 가지 꿈을 뒤죽박죽으로 꾸었다. 깨어서도 잠들어서도 그 꿈들은 순서를 달리하면서 나를 괴롭혔다.
  보라. 분명히 선거에서 이기리라. 그리하여 선거혁명, 군정종식, 화해와 평화, 자유민주 번영. 그러면 나는 안도하고 혜진이와 브로드웨이를 걷는다.
  그러나 보라. 선거에서 기필코 패배하리라. 뭉치면 이길 것이나 나뉘었으니 필경 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승냥이의 피투성이 피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게 좋은 꿈과 나쁜 꿈의 파도에 시달리면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냉정하라. 냉혹하라. 문제는 너 자신의 행복이며 성취다. 이미 발을 뺀 진흙구덩이, 더러워서 피한 똥 더미에 왜 다시 연연하는가. 한 마디로 너는 정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얼음 같은 결론을 한 마리 승냥이의 발톱이 쥐고 있었다. 쥐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얼음 위에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쓰고 있었다.
  “제발 아우슈비츠를 잊지 말아라!”
  그건 한승룡이가 자신의 이름으로 인쇄하여 교정에 뿌린 유인물의 제목이었다. 1980년 10월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고 대학의 중앙광장에는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좌절과 허탈 속에서 유언비어 따위의 부채질에 수군거리고 있던 때였다. 그 사이를 한 학생이 유인물을 뿌리며 질주했었다. 우리는 보았었다. 그 젊은이의 눈에서 불 뿜던 형형한 분노와 통렬한 꾸짖음과 날선 용기를 우리는 보았었다. 잠복근무 중이던 사복 두 사람이 금세 그를 그 곳에 없게 했었다. 우리들은 다만 그냥 있었을 따름이었다.
  1988년 용띠 새해가 밝았다. 오후에 나는 혜진이의 국제전화를 받았다.
  “지금 뉴욕 시간 1987년 12월 31일 밤 11시 55분 나는 88년을 우리 첫 아기 갖는 해로 정했다. 3초 전, 2초 전, 쪽 만세.”
  전화를 끊고 나는 새해 특집 신문들을 뒤적였다. 뒤적이다가 다음의 구절에 눈이 머물렀다.
  <등용문이란 황하의 상류에 있는 급류를 이르는데 잉어들이 이곳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잉어가 성공하여 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고기들은 뛰어오르다 이마만 깨지고 실패하고 마는데 이를 가리켜 점액(點額)이라고 한다.>
  전화도 없이 승룡이가 집을 찾아와 초인종을 누른 것은 그 때였다. 나는 그 기습에 얼마나 당황 했던가. 나는 강도의 침입이라도 받은 양 정신이 아뜩했었다.
  어머니는 복어찜을 준비하시겠다며 부엌으로 향하셨다.
  “여어 진우야. 우리가 함께 ‘한국사연구회’ 멤버였을 때 나는 너의 명석함에 항상 감탄했었지.”
  승룡이는 권하는 자리에 앉지 않고 거실을 맴돌며 말했다. 나는 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교수용(絞首用) 밧줄을. 아니 육혈포 한 자루를. 아니 돌덩이 하나를. 그가 말했다.
  “나 방금 평양에서 오는 길이야. 김일성이 김정일이 걔들 양김을 만나러 갔었지. 가서 개들 입에다 청산가리 한 병씩 털어 넣어 줄려고 가지고 갔었는데 말야, 이 짜식들이 입에다가 철 마스크를 하고 있지 뭐야. 그래서 또 미수였어. 씨팔, 백두산 천지에 가서 미역감고 그냥 돌아왔어.”
  승룡이는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한참동안 그는 그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혀를 깨물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부끄러웠다. 죽고 싶도록 그 순간에 거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졌다.
  “백두산 칡범한테서 평양 박치기 배워왔는데 쓸 만해.”
  그는 피투성이 이마로 웃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소리쳤다.
  “저 사람 저 눈 좀 봐라. 미쳤다. 미쳤어!” 
  나는 그 유리조각으로 내 가슴을 찌르고 그 피로서 그를 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金臣(김신)  동문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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