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에 있어서의 테러리즘

폭력주장만이 수렴되는 현상황이 문제
사상적 분단도 테러유발의 한 원인


  terror는 공포조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terrorist는 공포조성자를 뜻하고 terrorism은 공포조성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방식을 일컫는 것이 된다. terrorize라고 하게 되면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동사가 된다.
  테러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후의 일이다. 1793년 5월에서 1794년 7월까지의 프랑스를 ‘공포가 지배하는 시대’(Reign of Terror)라고 하거니와 이것은 혁명 후 혼돈상태에 빠진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광적 횡포에 날뛰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해 로베스삐에르 정권이 꽁꼬드 관장에 단두대를 차려놓고 걸핏하면 사람의 목을 자른 데서 온 표현이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공포조성을 통해 국민을 다스리려 했다.
  국가가 비상사태에 처하게 되면 계엄을 선포한다. 그러면 사회는 일종의 공포분위기에 사로잡히지만 이 경우는 테러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계엄의 선포는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법은 사람들에게 예측가능성을 제공한다. 사전에 제정된 법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법에 따라 어떤 행위가 허용되고 어떤 행위가 허용되지 않으며 어떤 행위를 하면 처벌될 것인가를 예측하게 된다.
  예측가능성을 제공하는 법이 있고 그 법에 따라 하는 행위라면 그것이 비록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일지라도 테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법의 집행이다. 테러는 먼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이다.
  인간사회에서 테러가 왜 일어나는가? 이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는 당위와 존재, 이상과 현실간의 격차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이데아’ 세계의 주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현상계에 떨어져 육신의 굴레가 씌워지고 다음부터는 현상계의 주민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간은 현상계에서 살게 되었지만 마음만은 항상 ‘이데아’ 세계에 가 있다. 두고 온 산하를 그리워하고 다시 그곳에 되돌아가고파 하는 마음, 이것을 플라톤은 ‘에로스’라고 했거니와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항상 긴장상태에 사로잡혀 있다. 가고 싶긴 하되 갈수 없는 신세에서 좌절이 오고 이것이 마침내 자포자기를 이끌어 테러라는 극단적 행태를 유발시킨다는 것이 테러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테러는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테러는 예부터 있어 왔으며 인간이 현상계의 주민이 된 이래, 그리고 실낙원의 슬픈 역사와 더불어 테러는 이미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것이 유별나게 발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래 ‘테러의 세기(Century of terrorism)’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테러가 빈발하고 있거니와 그것이 오늘날 유별나게 발호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까닭은 산업사회의 출현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산업사회의 특징이 인간의 비인간화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조직의 일부, 기계의 일부로 전락한 인간이 마침내 긴장상태에 빠지고 격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현대 생활이 너무나도 바빠 자신을 돌볼 수 없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다.
  인정이 메말라 옆집에 도둑이 들었는데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또한 현대생활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의 비인간화 가운데서 인간소외는 심화되고 심화된 인간소외는 좌절과 분노를 유발하며 이것이 인간의 공격본능과 이어져 마침내 테러의 온상을 제공한다는 것이 산업사회의 출현과 연결된 테러발호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폭력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주장이 수렴되지 않고는 어떤 주장이 수렴되지 않는 현대적 상황에도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의 경우가 그것이다. 2차 대전 후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창건되자 수많은 아랍 피난민이 생겼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이에 대해 유태인들은 구약시대의 옛 강토를 되찾았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아랍 피난민들은 2천 년전 이상 살아온 사람들을 그러한 이유로 추방할 수 있다면 미국인들은 자기들 나라를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라고 맞섰다. 빙탄불용의 양측 관계는 급기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낳고 절대 절명의 배수의 진을 친 PLO와 이스라엘은 계속 부절의 혈투를 벌인다. 그동안 아랍피난민들은 강대국들에게 혹은 UN에 대해 그들의 처지를 호소해왔으나 모두가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는 태도를 취할 뿐 해결의 실마리를 들어 주진 않았다. 현재로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안이 나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수단방법을 헤아리지 않는 PLO의 행태가 주효한 결과라는 일면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생결단해야만 주장에 귀를 기울여주는 국제사회의 비정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테러리즘이 성행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는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시각에 따라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낙인찍을 수도 있고 이른바 자유전사의 의거로 칭송할 수도 있는 현대적 상황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는 내란이 일어난 경우 기존정부를 ‘정당’정부라 했고 거기에 항거하는 정치세력을 ‘반도’단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자를 ‘억압’정부라 부르고 후자를 ‘자유전사’라 호칭하는 일부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류를 타고 몇몇 나라는 테러리스트들을 비호할 뿐 아니라 은신처를 제공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것은 분단시대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며 테러리스트들을 비호하는 국가가 있는 한, 테러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분단시대라 함은 지리적 분단 뿐 아니라 사상적 가치관적 분단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사상적 가치관적 분단이 지양 되지 않는 한, 테러의 발호는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앞서 보았듯 테러리즘이란 공포조성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동방식이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테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에 대한 수단이다. 그런데 최근 외교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테러리즘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어 국제평화에 찬물이 끼얹혀지고 있다. 테러가 이런 방향으로 이용될 때 그것은 인류의 앞날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