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 폐기는 핵군축시대의 새장 여는 계기

對中ㆍ蘇(대중소)관계개선으로 국제관계 개선해야


Ⅰ. 미소의 얄타체제와 국제정치 환경
  국제정치는 영ㆍ불이 이끌던 베르샤예 협력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전후냉전체제인 미ㆍ소의 얄타체제로 형성되었다. 이는 대립과 공존이라는 새로운 정치환경 하에서 양국을 축으로 하는 블록체제인 냉전양국체제를 이루었었다. 미ㆍ소의 양국체제는 중공공산국가가 수립(1949)ㆍ한국동란(1950) 등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이데올로기 대립의 성격이 더욱 첨예화 되었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세력의 팽창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세력이 저지시켜야 하는 봉쇄정책이 미국이 이끄는 국제정치의 룰이었다.
  따라서 지역분쟁은 미ㆍ소 강대국에 있어서 전략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를 다같이 가지는 국제정치변수로 되었다. 세계는 미국을 소련이라는 공산세력을 억제시켜야 하는 억제력으로 생각하여 미국의 외교정치의 기본정책인 ‘전략적 합의’에 동의하였다. 예를 들면 1955년의 바그다드조약기구나 1962년 쿠바봉쇄정책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미ㆍ소양국체제의 첨예화된 대립은 무기경쟁이라는 새로운 공포를 가져왔다. 핵무기의 경합으로 나타난 미ㆍ소양국의 공포의 균형시대를 가져온 것이다.
  미ㆍ소 냉전체제하에서 핵무기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국제정치의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미ㆍ소는 대립보다는 협력이라는 새로운 시대로서 닉슨과 브레즈네프의 데탕트시대를 맞이하였다. 1960년대 중공의 핵 실험성공은 미ㆍ소 양국에 정치적 충격이었다. 중ㆍ소 관계는 국제사회의 데탕트 분위기와는 다르게 중ㆍ소 국경분쟁이 강한 정치적 갈등으로 표출되어 미ㆍ소의 데탕트분위기와 중ㆍ소 분쟁 성격으로 미국과 중공이 새로운 데탕트관계를 설정하였다. 1972년 닉슨의 북경방문은 1970년대의 국제 사회의 데탕트라는 의미보다도 아시아ㆍ태평양지역에서는 국제정치환경의 중심지역이 유럽에서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으로 발전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이나 미국의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1970년대의 데탕트시대는 중ㆍ소가 미국정책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국제사회의 긴장이 지역분쟁과 같이 발생하여 새로운 냉전체제로 변화한 것이 1970년대 말부터 보였다. 1972년 미ㆍ소간에 체결한 SALTⅡ는 미의회의 조인을 1979년에 와서야 받았으며, 미ㆍ중공간의 국교수립에서도 관계없이 중공의 베트남침공 사건에서도 미국은 소련보다도 중공을 비난하였다. 이에 중공도 이익이 되는 동반자로서 미국을 의심하게 되었다. 더욱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장기점령문제는 아직도 미ㆍ소간에 풀어야 할 국제정치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중공은 미국이 소련의 아프간 점령문제보다 중공의 캄프치아 문제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중ㆍ소의 미국에 대한 경계와 불만은 국제정치에의 새로운 미국의 외교정책문제로 알렉산더 헤이그에 의하여 분석되어지기도 하였다.
  1973년 중동전쟁, 1979년 아프간사태와 캄프치아사태, 이란사태,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1982년 포클랜드사건과 레바논전쟁, 1983년 그라나다사건 등은 강대국에 의한 힘의 정치이론을 실증한 것으로 새로운 냉전체제가 되는 국제정치환경 변수들이다. 국제정치가 강대국 간의 국가관계에 영향을 받는다면 강대국의 환경변화가 국제정치환경에 또한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사실에서 위신정책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챌린저인공위성폭발사고(1986, 1)와 소련의 고르바초프정권 등장과 체르노빌원자발전소폭발사고는 미ㆍ소양 강대국의 위신정책을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았다. 미ㆍ소 양국은 자국민에 절망과 좌절로 양국지도자들에게 새로운 화해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필요성을 제공하였다.
  일본의 경제력부상은 아시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미국은 아시아에서 안보책임 이외 분야에서 일본의 책임분담을 주장하는 미국의 새로운 고립주의정책을 보여주었다(닉슨독트린). 이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 정치보다는 경제적 갈등관계가 그 중요성을 가진다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데탕트 환경기류는 미소의 군비통제시대에서 새로운 감축시대로의 전환을 유도하게 되었다. 소련의 경제적 낙후성도 국제정치기류 변화에 한 몫을 한 것이 틀림없다. 미ㆍ소간에 체결한 INF 폐기협정은 새로운 핵무기감축시대를 의미한다고 하여 실용성보다는 정치적ㆍ외교적 의미를 크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 브레진스키같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INF 시대는 새로운 미ㆍ소화해시대로 미ㆍ소 정상회담을 이끄는 축이 되고 있다.

Ⅱ. INF 폐기협정과 미ㆍ소 정상회담
  INF 즉 중거리핵미사일 완전폐기협정이 1987년 12월 8일 미ㆍ소간에 체결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4백 36기의 중거리핵미사일을 유럽에서 폐기하여야 하며 소련은 중ㆍ단거리 미사일 7백3기를 유럽과 아시아에서 폐기하여야만 한다.
  미ㆍ소간의 핵무기 감축협상은 1981년 11월말에 레이건 미대통령이 제안한 ‘제로 옵션’(영의 선택)안으로 시작되었다.
  레이건안은 미ㆍ소 양측의 모든 중거리 핵미사일을 완전히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안 이었다. 당시 소련도 이미 아시아에까지 SS20 핵미사일 배치를 완료하고 있었다. 당시 레이건의 ‘제로 옵션’안은 군사적 의미 보다는 정치적 제안으로 그 중요성을 평가받고 있다. 미국이 NATO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려는데 대한 유럽과 국내의 핵반대운동에 대한 맞불 작전 이었다.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가 소유한 핵미사일 분량에 해당하는 것으로 SS20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레이건의 ‘제로 옵션’ 안으로 시작된 미ㆍ소 군축회담이 제네바에서 시작되었지만 6년간 계속되는 동안 소련의 소극적인 태도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 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그의 ‘글라스노스트(공개)’와 ‘페레스트로이카(개편)’이라는 개방정책은 1986년 10월 ‘레이카비크’ 미ㆍ소 정상회담에서 군축문제가 새로운 활력소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전략방위구상을 포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미ㆍ소관 계는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미국은 SDI는 핵감축현상의 흥정대상이나 의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강력히 고수하는 입장이었다. 1987년 7월 2일 고르바초프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SDI를 핵미사일군축협상에서 분리시켰으며 더욱이 아시아 지역까지 포함시키는 ‘더블 제로옵션’ (2중영의 선택)을 제안함으로써 극적으로 체결된 것이다. 이로써 1987년 11월 24일 제네바회담에서 조지 슐츠 미국무장관과 세바르드나제 소련외상은 INF 폐기협상에서 가장 난제였던 폐기검증협상에 극적인 타결을 봄으로써 역사적인 핵군축시대의 막을 연 것이다. 협상의 중요내용은 INF의 완전폐기와 3년 폐기기간 중 20회의 검증실시뿐만 아니라 3년 후에도 10년간 계속 폐기 검증을 실시하는 것이다. 처음 5년간은 15회 검증, 그 후 5년간은 10회 검증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INF 폐기협정이 핵무기를 완전 폐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INF는 미ㆍ소가 소유한 전체핵무기의 약 5%에 불과하다. 브레진스키 같은 안보전문가들은 INF의 과대평가와 기대를 경고하면서 이 협정은 미ㆍ소 강대국 간의 부분군축합의의 의미만을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말하였듯이 ‘평화의 어린 묘목’을 심은 것이다. 따라서 군축대화와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할 수 있다는 정치적 전례를 남긴 것과 새로운 데탕트 분위기가 국제평화에 기여한 것이다. 미ㆍ소관계의 새로운 전환계기가 된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년의 6월 이전 미ㆍ소 정상회담에 이미 합의된 전략핵공격무기의 50%씩 감축제의가 새로운 협정과제이다.

Ⅲ. INF 폐기협정이 한반도 정치에 미친 영향
  INF 폐기협정은 미ㆍ소 정상회담을 지속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으며 공포의 균형이라는 군축문제에서 밝은 전망을 보이고 있지만 지역분쟁문제와 인권문제가 새로운 정치과제로 남아있는 협상과제이다. 데탕트시대의 얼룩으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불럭올림픽으로 상처를 입었다. 지역분쟁의 동서틀이기도 한 한반도 긴장완화역할을 88올림픽은 동서의 새로운 화해 분위기를 위하여 중요한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번 미ㆍ소 정상회담에서 지역분쟁 특히 한반도 긴장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모스크바 미ㆍ소 정상회담에서는 의외로 발전할 것이 예상된다.
  한반도 정치가 북방 3각관계의 한축인 중ㆍ소ㆍ북한과 남방 3각관계인 미ㆍ일ㆍ한국의 양축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면 미ㆍ소 중ㆍ일의 정책목표나 이해관계가 한반도 정치기류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 따라서 INF 폐기협정은 미ㆍ소의 새로운 데탕트 시작이라면 분명 한반도 긴장완화와 88올림픽이 국제사회에 기여할 긴장완화 역할은 보장받을 것이다. 이에 미ㆍ소강대국이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정치적 관심과 이해관계는 새로운 동북아시아적 정치환경을 만들 것이다.
  특히 중ㆍ소의 경제우선정책과 이데올로기를 분리한 국제관계는 정치분야를 제의하고는 2개의 한국정책(Two-Korea Policy)을 인정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새로운 긴장완화 역할을 하고 있다. 적어도 경제면에서는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지 오래다. 중공만하더라도 1983년 5월 중공민항기사건 이후 한국과 중공의 가시적 관계 개선과 86아시안게임으로 양국관계는 비공식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5월 중공은 한국과의 직접교역에 대한 양해를 북한으로부터 얻었다고 외신지에 알려졌다. 이는 한국의 경제활동이 새로운 정치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분석되며 한국의 중ㆍ소 관계 개선노력은 일본과 미국을 통한 새로운 정치 노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INF 폐기협정은 간접적인 한반도 긴장완화분위기 조성과 지정학적인 분위기 특성으로 지역분쟁의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고르바초프와 북한관계는 더욱 밀착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INF 협정으로 군사적 위협이 감소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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