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한국정치의 회고와 전망

여야 과감한 체제개편이 선결과제
민중정당결성 움직임은 지배구조의 변화예고
선거에 미친 언론의 부정적 역할 간과 못해
혁신정당의 출현은 한국 정치의 파행성을 극복할 수 있어


  Ⅰ. 1987년 政局(정국)의 회고
  온 국민을 개탄과 분노, 그리고 희망으로 들끓게 했던 1987년의 韓國政治(한국정치)도 대통령선거의 허망한 결과를 끝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1987년은 무엇보다도 이 땅에 묻혀있던 모든 과제들을 낱낱이 부각시킨 그리하여 민주화의 길이 얼마나 지난한 길인가를 보여준 한 해였다.
  1987년 한국정치 변화의 근원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공권력의 고문시비는 끊이지 않았고 고문이 사법적인 인권영역을 넘어서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급기야는 현정권의 도덕성, 정통성 문제로까지 확대시켜 범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했던 사건은 1986年(년) 6月(월)에 있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더불어 박군의 야만적인 고문에 의한 죽음이었다.
  이로 인해 정부, 여당은 온국민의 분노와 저항, 그리고 이것에 기반을 둔 야당과 民族(민족), 民主煽動勢力(민주선동세력)의 공세로 개헌정국에서 불리한 위치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고문치사사건을 규탄하는 2.7, 3.3 범국민대회가 막강한 공권력에 의해 원천 봉쇄된 데 이어 분열공작에 말려든 신민당이 분당을 하게 되자 정부 여당과 군부의 강경세력은 합의개헌 실패의 책임을 양 김씨에게 전가시키고 4월13일 改憲(개헌) 조치를 단행하여 장기집권의 본색을 드러냈다.
  군부독재정권의 장기집권음모가 노골화되자 이에 대항하여 국민대중의 반발의식은 표면화되었고 민족, 민주운동 세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호응이 급속도로 확산됨으로서 그 대중적 토대가 더욱 견고해졌다.
  한편 美國(미국)은 현 정권이 강경조치가 한반도내에서의 자국이익을 근본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서 對(대)韓(한)定策(정책)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교수, 종교인, 변호사, 문인 등 사회 각 분야에서의 호헌조치에 대한 반박성명과 농성이 대중의지지 속에서 확산을 거듭해 가는 가운데 발생한 범양사건,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은 박군 고문치사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부산 형제복지원사건과 함께 현 정권에 대한 의혹과 불신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反(반)군부독재 민주연합전선인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그 주위에는 광범위한 국민 대중이 모여들었다.
  6월10일 집권 민정당은 국민의 염원을 무시한 채 잠실 체육관에서의 차기대통령 후보로 노태우씨를 지명하고 독단적 정치 일정을 강행하였다. 이에 맞서 국민운동본부와 야당이 주도하는 호헌 규탄 국민대회가 무장경관의 철저한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 現代政治史(현대정치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은 중대한 전환기로 기록될 6월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6.10대회는 이후 명동시위로 이어지면서 6.18최루탄추방운동, 6.26 평화대행진 등으로 함께 열기도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갔다. 특히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맨 이한열군의 모습은 항쟁의 불꽃에 기름을 붓는 작용을 하였다.
  대규모 시위가 연일 되풀이 되는 가운데 경찰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령 등 비상조치를 둘러싸고 정부 여당과 군부의 강‧온파 간에 내부갈등이 조성되고 있었으며 자국의 이권유지에 심각한 위험을 감지한 미국은 民衆革命(민중혁명) 및 군부의 계엄발동 그 어느 쪽도 반대하면서 한국 민중의 민주화열망을 체제내로 수렴, 가시적인 민주화(民主化)조치를 취할 것을 정부 여당에게 요구하였다. 공권력과 물리력의 한계(限界)를 절감한 정부, 여당도 마침내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한 6.29선언을 내놓게 되었다.
  6.29선언의 본질은 그 후의 대통령 선거에 비추어 볼 때 군부 독재정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공격자세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부분적인 양보를 통해 야당과 민족, 민주 운동 세력의 분열을 유도하고 국민대중으로 하여금 행동을 지연시키거나 자기편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선거국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6.29선언 특히 직선제는 국민대중의 가열찬 투쟁에 의해 얻은 성과물이었으며 군부독재정권의 패배였다는 점에서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 즉 權力構造(권력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양적으로는 변화시켜 보다 많은 민주적 권리를 쟁취할 가능성을 만들어 낸 것은 승리를 위한 교두보 하나를 쌓아올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월항쟁의 주역은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민주운동세력이었지만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국민대중에 정확히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6얼항쟁으로 6.29선언을 쟁취한 뒤 이번에는 노동자의 대규모 파업 투쟁이 전개되었다. 전 산업에 걸친 노동자의 대투쟁은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가 잠재적인 형태로 존재해 오다가 6월 민중항쟁에 자극을 받아 거의 동시적으로 표출되었다.
  7~9월의 노동자 투쟁은 관제언론의 비난과 왜곡보도, 국민대중의 냉담으로 시들해지고 말았으나 그 투쟁은 광범위한 노동자를 단련시키고 노동자의 정치적 의식과 조직, 그리고 연대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Ⅱ.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한국 정치의 현실태
  많은 희생 끝에 이룩된 6월 민중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었고 열기에 찬 선거전을 거쳐 12월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민의 오랜 소망인 군정종식과 정권교체가 무산되는 허탈한 좌절의 순간이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차기정권의 담당자를 결정하는 단순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87,88년 전환기의 한가운데에서 61년 5.16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등장한 이래 어언 26년 동안 독재에 의해 유린되었던 정치질서를 회복하여 다시 말해 군정을 종식시켜 자주적이고 민주화된 새 시대를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그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현정권이 임기동안 쌓아온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친 치적들에 대해 국민이 심판을 내린다는 점에서 그 부차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국면에서 보여준 각 후보자들의 정치적 언동들을 볼 때 각 후보자들은 이번 선거의 위와 같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망각하지 않았나 싶다.
  정부, 여당은 전례 없는 금품과 ?권을 동원하여 유권자의 표를 끌어모으기에 바빴고 야당 후보에 대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흑색선전을 퍼부었다. 그리고 투, 개표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정의 사례가 야당과 민족·민주운동세력에 의해 밝혀짐에 EK라 이번 선거가 부정·조직선거였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야당의 과오는 더욱 결정적이었다. 양 김(金)씨의 개인적인 집권욕 때문에 후보단일화는 무산되었고 그것이 바로 민주화와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욱이 유세과정에서 야당 후보들은 현 정권의 임기동안에 있었던 미해결된 대형의혹사건들에 대해서 최소한의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당의 선거 전략에 휘말려 들어간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양 김씨의 이제까지의 투쟁은 진정 民主化(민주화)와 國民(국민)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국민을 볼모로 하여 집권을 위해 투쟁하여 왔다고 유추해석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야당은 보수정당으로서의 한계(限界)가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 대통령 선거기간 중 기존 제도권 언론이 수행한 부정적 역할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그 부정적 역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선거 쟁점의 초점을 흐려놓았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의 최대쟁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군정종식과 민간민주정부의 수립이었으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기에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이번 선거의 이러한 쟁점과 의의를 부각시키는 커녕 아주 교활하게 희석시켜 -예를 들면 1노3김 4자대결의 정치쇼로 지면장식, 1212사태에 대한 흥미위주의 보도, 지역감정을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보도, 군정종식을 안정·혼란쟁점으로 대치-국민의 민주화 의지를 왜곡시키고 권력의 횡포를 방조하는 반언론적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 언론은 민정당의 재집권을 크게 도왔다고 할 수 있다.
 
  Ⅲ. 88정국 전망
  이번 대통령 선거의 가장 중요한 결과적인 의미는 政權(정권)의 正統(정통)성 시비가 일단 잠정적으로는 결말이 났다는 점이다. 즉 2월의 정권교체는 대다수 국민의 열망에 反(반)하는 여권 내의 변화이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정권담당자의 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 법률적 정통성을 인정받았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군정 종식과 정권 교체를 바라는 유권자의 64%가 야당 후보를 지지, 전 국민의 정치의식과 신념에 걸맞은 정통성을 획득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노 체제는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앞으로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가시적인 민주화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체제 개편이 예상된다. 그 와중에서 온건과 강경파간의 내부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이 있다.
  민족, 민주 운동세력에 대한 대응도 과거처럼 집회의 원천봉쇄나 무더기 구속보다는 民族(민족)民主(민주)운동세력의 핵심 부분만큼은 강하게 대처하는 유화와 강경의 양면정책을 구사할 것이다.
  한편 정권교체의 숙원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야당권에도 개편의 바람이 일 것은 자명하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아무리 대통령 선거의 결정적 패배 요인이 부정선거였다고 할지라도 선거무효 투쟁의 국민대중적 명분이 될 수 있는 후보단일화가 양 김씨의 집권욕에 의해 무산되었다는 사실이 더더욱 중요하다.
  부정선거규탄이 국민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후보단일화를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6.29 노태우 선언을 쟁ㅎ취할 수 있었던 힘은 국민대중의 호응과 투쟁에의 대대적인 참여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 김씨는 위와 같은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이번이야 말로 양 김씨가 항상 강조하는 국민의 뜻을 받들어 자진해서 퇴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양 김씨의 당내 비중을 놓고 볼 때 만약 양 김씨가 퇴진하게 되면 야당은 공중분해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나 이것은 인맥을 중심으로 한 계보정당의 폐단인 것이며 따라서 좀 더 긴 안목으로 볼 때 양 김씨의 퇴진과 당의 철저한 개편만이 야당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며 그래야만 참신하고 진실된 건실한 야당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민족·민주 운동 세력을 보자
  1987년 민족민주운동세력에게는 아주 교훈적인 한해였다. 특히 6월민중항쟁과 대통령선거는 크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겨 주었다.
  첫째, 단결은 곧 승리이며 분열은 곧 패배라는 것이다.
  둘째 모든 투쟁은 정확히 국민대중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6월항쟁에서 직선제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단결하여 국민대중과 함께 투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거 국면에서 민조·민주운동세력은 후보단일화 추진 하, 김대중씨 지지파, 독자적인 민중후보 추대파 등으로 사분오열하여 선거에서 패배를 자초하고 말았다. 민주화 운동권이 무엇보다도 선결적으로 풀어야할 과제들을 망각하고 보수 야권과 더불어 올바르게 처신하지 못함으로써 국민대중의 실망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민주운동세력은 선거 국면에서 나뉘었던 다양한 견해들을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여 다시 하나로 뭉쳐 그 순수성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민주운동세력 특히 재야세력의 개편이 야당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국민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부정선거규탄운동은 아무 소득 없는 자기 출혈이라는 것을 충고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혁신 정당의 진로를 생각해보자.
  대통령선거전이 부정·부패·타락선거의 조잡한 선거전이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각 정당이 제시하는 정강·정책의 내용이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정강·정책의 유사성은 각 정당들이 보수정당으로서 그 존립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적 대립이 없는 사회에서의 선거는 부정·부패·타락선거의 개연성이 매우 높으며 인물 중심의 선거전이 되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런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정당의 기치를 내걸고 나온 민중후보 백기완씨가 대학로 유세에서 20만 이상의 청중을 동원했다는 사실은 아주 고무적이다.
  백기완씨의 출마를 계기로 태동하기 시작한 민중의 정치세력화, 즉 민중정당결성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보수정치세력이 지배해온 한국의 정치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올 것임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우선 진보세력을 부정적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며 진보세력이 정치구조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막는 여러 가지 비민주적(非民主的)요소들을 척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 현재와 같은 상황 하에서 혁신정당의 결성은 무너지기 십상인 것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라도 고도의 산업사회로 된 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혁신정당의 출현은 바람직하며 보수혁신의 대결만이 파행적인 한국정치를 극복하여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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