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연구소’ 학술세미나


  淨土思想(정토사상)의 淵源(연원) 및 그 中心思想(중심사상)
  楊白衣(양백의) <中國(중국) 文化大(문화대)>
  淨土(정토)라는 말은 불교공유의 보통명사로서 단지 彌陀佛土(미타불토)의 서방극락세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大小品(대소품) ‘般若經(반야경)’에서는 여러모로 아축 佛淨土(불정토)를 서술하고 있으며 이은 불경 중 他方淨土思想(타방정토사상)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佛敎史(불교사)를 말할 때 아미타불의 名號(명호)를 불러서 西方淨土(서방정토)에 往生(왕생)산다는 것은 印度(인도)에는 증빙할만한 자료가 없다. 최초 전해진 아미타불 신앙은 一無量壽經(일무량수경) 中(중)에 최고의 3가의 번역이 있는데 내용은 대개 ‘아축佛國經(불국경)’과 같아서 稱名念佛(칭명염불)로 往生(왕생)하는 思想(사상)은 없던 것이 魏譯(위역)(252)에 이르러 큰 변화가 생기는데 自力修行(자력수행)의 윤리요소를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稱名(칭명)을 더하고 信心(신심)에 의지하여 아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淨土(정토)의 중심사상을 말할 때는 반드시 무엇이 易行道(역행도)이고 難行道(난행도)인지 판별해야 하는데 世親(세친)은 淨土論(정토론)에서 五念門(오념문)을 닦아 성취하면 비로소 安樂國(안락국)에 태어난다고 하였는데 曇鸞(담란)이 憶念稱名(억념칭명)만을 주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易行道(역행도)를 급히 닦으라고 권해서 이 말을 했을 것이나 실은 이것은 浮土正因(부토정인)이 아니니 이에 對(대)한 분별로서 大寶積經(대보적경)에는 중생을 위하는 것이 難行道(난행도)이니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보살도를 닦아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하여 手足頭目等(수족두목등)을 보시하는 것이고 또 莊嚴佛國(장엄불국)이 易行道(역행도)이니 반드시 手足頭目(수족두목)을 보시할 필요는 없다.
  보살은 큰 마음을 가지고 上求下化(상구하화)하므로 자비가 제일이 된다.
  그러므로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에는 염불의 목적은 見佛(견불)에 있고 見佛(견불)의 要(요)는 見佛心(견불심)에 있다.
  佛心(불심)은 바로 無緣(무연)의 慈悲(자비)로 중생을 攝化(섭화)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淨土(정토)의 正因(정인)이 되는 것이다.

  淨土思想(정토사상)에 있어서 韓國(한국)과 中國(중국)의 關係硏究(관계연구)
  深具慈孝(심구자효) <日本(일본) 佛敎大(불교대)>
  新羅(신라) 淨土敎(정토교)에는 隋(수) 慧遠(혜원)의 淨土(정토)思想(사상)을 발전시킨 것으로 원효, 法位(법위), 義寂(의적) 등이 있고 또 하나는 唐(당) 玄奬(현장)의 淨土(정토)思想(사상)을 발전시킨 圓測憬興等(원측경흥등)이 이에 속한다는 二流(이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선각자들의 연구인데, 이러한 分類(분류)는 전체적으로 볼 때는 論旨(논지)가 명쾌하지만, 개별적으로 검토해 보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로 신라에 있어서 慧遠系(혜원계)의 정토교가 수립되는 근거는 일본 道光(도광)의 無量壽經鈔(무량수경초)에 인용되어 있는 新羅諸師(신라제사)의 說(설)이 慧遠說(혜원설)과 같다고 하는 그의 기술방법에 영향을 받아서 된 것이다.
  둘째로 惠各復元本(혜각복원본)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法位(법위)와 慧遠(혜원)의 說(설)이 합치하는 내용은 매우 적다.
  셋째로 慧遠系(혜원계)에 대해 현장 • 慈恩(자은)을 唯識系(유식계)로 하여 대비하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으니 혜원의 정토교는 唯識思想(유식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唯識浮土敎(유식부토교)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여러 문제가 있어서 종래의 연구에서는 법위의 설에 대한 구명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玄義三門分別(현의삼문분별)’에 있는 내용으로서 혜원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淨土思想(정토사상)을 수립했는지 구명해 볼 때, 결론적으로 법위의 정토사상은 그 기본을 親光(친광)등의 ‘佛地經論(불지경론)’에 의하고 있다. 佛地經論(불지경론)에도 十八圓滿(십팔원만)이라는 완전한 형태의 정토가 보이는데, 법위는 현장이 번역한 ‘佛地經論(불지경론)’에 唯識的(유식적)인 정토가 설해져 있는 것을 알고 전면수용해서 ‘無量壽經(무량수경)’을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法位(법위)는 唯識家(유식가) 이고, 淨土思想(정토사상)에 있어서도 唯識系(유식계)로서 玄獎系(현장계) 가운데에서 뛰어난 人物(인물)임에 틀림없다.

  三國時代(삼국시대) 미타신앙의 수용과 전개
  金煐泰(김영태) <東國大(동국대)>
  미타신앙을 우리민족이 언제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관한 분명한 기록은 現存史料上(현존사료상)으로는 볼 수 없다.
  다만 신라의 미타신앙관계 자료만이 적지 않게 보이므로 이를 근거로 고구려나 백제의 미타신앙을 미루어 살펴볼 수 있고 또 麗濟(여제)의 佛敎信仰(불교신앙)은 통일 후 신라에 흡수되어 민족불교의 신앙세계를 형성하였으니 신라 미타신앙의 특성은 결국 우리 민족 초기 정토사상의 수용전개에 이르는 그 전반에 걸친 특징적 성격을 총망라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특징은 첫째, 현실 위주적 성격이었고 둘째, 善因善果(선인선과)의 신앙성격을 볼 수 있으며 셋째, 小聚兼修(소취겸수)의 往生信仰(왕생신앙)이고 넷째, 신라정토에의 강한 후원적 신앙성격을 들 수 있다.

  新羅時代(신라시대)의 淨土敎學(정토교학)
  蔡印幻(채인환) <東國大(동국대)>
  7, 8세기 시대의 中國淨土敎(중국정토교)는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을 중심으로 하는 淨土敎(정토교)였음에 대하여, 신라시대의 淨土敎(정토교)는 ‘無量壽經(무량수경)’과 ‘阿彌陀經(아미타경)’을 중심으로 하는 淨土(정토)였던 것이 뚜렷한 特性(특성)이다.
  新羅(신라)의 淨土敎學(정토교학)은 無量壽經(무량수경)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討究(토구)되었는데 그중 重要(중요)한 문제는 48願(원)의 分類方法(분류방법)이나 別時意(별시의)의 문제, 正定聚(정정취)의 해석에 관한 문제, 聲聞(성문) 二乘(이승)에 대한 문제 등이 있으며 이 중 48願(원)에 관계되는 문제를 보더라도 48願(원)의 各願(각원)에 대하여 낱낱이 그 願名(원명)을 釋名(석명)하고 있으며, 또한 願(원)과 誓(서)의 二義(이의)를 세우고 있음을 볼 수가 있으니, 이러한 노력은 일찍이 있어서의 淨土敎學硏究(정토교학연구)의 높은 수준을 가늠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高麗時代(고려시대) 禪師(선사)의 淨土觀(정토관)
  權奇悰(권기종) <東國大(동국대)>
  高麗(고려)의 禪師(선사)들은 他方彌陀(타방미타)와 稱名念佛(칭명염불)을 수용하여 自性(자성)(心(심)) 彌陀有心淨土(미타유심정토)의 淨土觀(정토관)으로 발전시켰고, 念佛修行(염불수행)에 對(대)해서도 知訥(지눌)의 定慧念佛(정혜염불), 普愚(보우)의 公案念佛(공안염불), 懶翁(나옹)의 無念念佛(무념염불)의 특징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懶翁(나옹)의 경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후대에 이를수록 他方彌陀(타방미타)와 稱名念佛(칭명염불)이 入根人(입근인)을 위해서 수용되어지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高麗(고려) 天台(천태)와 密敎(밀교)의 淨土思想(정토사상)
  徐潤吉(서윤길) <東國大(동국대)>
  天台宗(천태종)에서는 了世(요세)의 백련결사를 기점으로 天台念佛(천태염불)의 사상아래 下根衆生(하근중생)을 구제하려는 淨土信仰(정토신앙)이 발전하여 貴族佛敎的(귀족불교적) 成格(성격)과 함께 淨土往生(정토왕생)의 순수한 정신이 지켜왔다.
  밀교에서의 淨土(정토)사상은 天台(천태)와는 달리 수행공덕과 신앙목적이 당래왕생보다는 현생에서의 질병퇴치, 부귀장수 등을 갈구하는 면으로 기울어진다. 이때의 정토신앙은 천태와 밀교의 부수적인 신앙으로 정토신앙이 본래의 특성이 발휘되지 못한 점이 있었다.

  著書(저서)를 通(통)해 본 朝鮮朝(조선조)의 淨土思想(정토사상)
  李智冠(이지관) <東國大(동국대)>
  조선조 박해를 면치 못했던 불교는 회심곡 • 서왕가 • 정토찬 등 많은 가요작품에서 염불을 통한 구제사상과, 월니석보와 구운몽 등등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윤회 사상과 극락왕생을 갈구하는 서민들의 종교적 타력의 미타신앙이 주로 조선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작품속의 염불을 주로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있어 알기 쉽고 민중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사원경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어 포교에도 효과적이었다.

  萬日念佛會(만일염불회)의 成立(성립)
  睦楨培(목정배) <東國大(동국대)>
  新羅初期(신라초기) 몇몇 貴族(귀족), 왕실중심의 불교가 미타신앙으로 인하여 대중화하게 된다. 개인的(적) 미타신앙으로부터 時代(시대)가 흐름에 따라 집단적 신앙으로 발전되어 가는 중에 지금의 건봉사를 중심으로 신라 文化(문화)가 한창일 때 758年(년)에 만일 念佛會(염불회)가 發微和尙(발미화상)에 의하여 정수와 노력이라는 결사를 조직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만일회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1927년 圓翁德性(원옹덕성)이 化主(화주)가 되어 5회 萬日會(만일회)를 계승하였다.
  이러한 만일회 결사는 시대를 따라 오늘날까지 미타신앙의 진폭을 크게 넓혀주었다.

  念佛儀禮(염불의례)를 通(통)해 본 한국의 淨土信仰(정토신앙)
  洪潤植(홍윤식) <圓光大(원광대)>
  신라시대의 염불의례로서 自修的(자수적)인 것은 集團的(집단적)인 것의 두 가지 양식이 있었던바 이것이 형식화 될 가능성이 있었으니 그 참 뜻을 잃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집단적인 의례로 변천 과정에서도 상호 유리를 막으려 하였다. 신라시대의 왕성한 정토사상에 관한 연구는 고려시대에는 관무량수경에 의한 관념염불이 성행하여 형식화에 흐르게 되니 새로운 전환점이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모색되었다.
  조선시대의 염불의례는 집단적 • 음률적 밀교적 염불 등으로 특징지어지며 칭명염불로 전개되어 구체적 人間(인간)의 관심사와 결합되어 전승이 쉽게 되었다.
  신라의 수행적 신앙적인 결합, 고려시대의 禪的(선적) 입장에서의 의례, 조선시대의 他修的(타수적)인 염불의례는 진언을 겸한 밀교적 성격의 의례 등 특색 있는 주목을 이루어왔다.

  韓國(한국)의 淨土美術(정토미술)
  文明大(문명대) <東國大(동국대)>
  淨土信仰(정토신앙)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이것을 형식화시킴으로서 더욱 가까이 대할 수 있었다. 三國時代(삼국시대)의 淨土美術(정토미술)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고구려의 아미타 금동 삼존불 立像(입상)에 無量壽像(무량수상)을 조성한 것과 백제의 것으로 현존하지 않는 아미타불상, 고 신라시대의 몇몇 가지에서 희미하게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존 불화는 없고 대표적인 佛國寺(불국사)의 아미타상을 비롯하여 여러 종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가장 정토신앙이 신봉되어 태반이 아미타불상과 무량수전과 같은 건축과 불상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한 사찰 내에 여러 신앙이 공존되어 회화, 조각, 불탑 등이 복합된 것을 알 수 있다.

  韓國(한국) 淨土敎(정토교)의 受容(수용)
  坪井俊映(스보이 준에이) <日本(일본) 佛敎大(불교대)>
  일본의 平安時代(헤이안시대) 중기 (10세기)에는 벌써 일본에 정토사상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도작, 선도 등의 저작에 대해 주석을 가한 번연이 정토교의 교지를 조직화하여 신라 경흥스님의 법상에 관한 많은 저술과 ‘정토교 釋書(석서)’는 日本(일본)에 정토사상이 전해진 10세기 平安時代(헤이안시대) 이후 많은 영향을 끼쳤다.
  日本(일본) 淨土宗(정토종)의 開原祖(개원조)인 법연은 중국의 선도가 설하는 本願念佛(본원염불)의 祖術者(조술자)로 자처하여 선도의 교의를 사상 형성에 크게 드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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