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찾아라!
“이 봐, 이번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우리대학의 상징물인 코끼리상을 특집으로 내는 게 어떨까?” / “예?”
이렇게 나의 ‘코끼리 찾아 삼만리’는 시작됐다.

▲정각원 앞 계단에 있는 코끼리상

아기코끼리는 어디에?
‘중간고사는 다가오고, 실종된 코끼리는 찾아야 하고, 어떡하지? 아…. 코끼리상이면 학교의 시설물이니까, 분명히 동대신문에 실렸겠지.’
일단 사진이 첨부된 관련기사를 찾았다. 역시! 관련 내용이 동대신문 1971년 5월 24일자(486호) 1면을 장식하고 있다.
‘지혜와 용기로 동국을 상징하는 코끼리상이 정문 진입로 운동장 옆에서 제막...<중략>’
‘또 뭐가 있지? 그래 학교의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동국대 요람!’
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하니 코끼리는 1998년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았다.
신문기사와 요람을 보고 궁금증이 더 깊어갔다. 당시 총 580만 원의 건립비용을 모금해 제작했는데, 그 중요한 코끼리상이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늘로 승천했나? 아니면 걸어서 학교를 나가버렸나?

코끼리상에 대한 비방
다음날. 학교 시설을 관리하는 행정부서를 찾아가니, 담당직원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동대신문사 박소현 기자입니다. 특집기사를 위해 우리대학 상징물인 코끼리상의 소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지금 정각원 앞에 있어요. 원장 스님의 요청으로 정각원 계단 중간으로 옮겨져 있지요.”
실제로 정각원의 44계단 중간 지점에 흰 코끼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코끼리가 40여 년 전 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우리대학 상징물이었구나. 팔정도 아기 코끼리와 유사한 크기의 정각원 코끼리는 흰색으로 곱게 새옷을 입고 있었다.
“정각원장 스님, 정각원 계단 중간에 놓인 코끼리는 어떻게 이곳으로 왔나요?”
“코끼리 상 제작당시 참여했기에 잘 아는데, 동국인 모두 큰 뜻을 모아 코끼리상을 제작했지만,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게 안타까워서 정각원에 모시게 된거지!”
스님은 코끼리상 제작시기에 불교대 학부생으로 동참했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궁금해 제작 배경을 물었다.
“나야, 여기 동대신문에서 기자가 왔는데 그 백상에 대해서 알고 싶다네!”
대답 대신 스님은 현재 분당 원명사 주지스님으로 계신 원명 법사(송열군 1970년도 불교대 학생회장)에게 전화 연결을 했다.
“아아, 그게 1971년도 졸업생들이 기념으로 제작했어요. 그때 황수영 교수를 비롯한 감수위원들이 학교의 상징을 코끼리로 결정해서 조각가 함인균씨가 만든 거지요. 백상은 불교와 지혜의 상징으로, 용맹을 의미해 우리학교 상징으로 딱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어요.”
그렇다면 탑신 위에 있던 코끼리상이 왜 지상으로 내려왔을까싶어 정각원장 스님께 물었다.
“제작 후 별말이 다 나돌았어. 지상 동물인 코끼리가 공중에 있는 것, 그리고…”
“혹시 ‘발정났다’는 루머 말씀인가요?”
“그렇지, 코끼리가 코를 치켜세울 땐 발정났거나 화가 났을 때라는데, 발정은 암컷의 경우 그런 것이고, 우리 코끼리는 수컷이야!”
‘두산백과’를 찾아보니 스님의 말씀이 사실이었다.
신문기사와 동국대요람으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코끼리상. 결국 코끼리 제작 현장에 있었던 정각원장 스님을 만나서야 실마리가 잡혔다. 그 외 관련 담당자들의 기억을 통해 조각조각 퍼즐이 맞춰졌다. 코끼리상의 삶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다.

▲1971년 건립 당시 코끼리상(좌)과 1998년 코끼리상 자리를 대체
한 불심탑(우)의 모습.

코끼리 상의 동국대 유람기
코끼리상이 석주 탑에 조성됐을 때부터 1998년 끌려 내려올 때까지 코끼리는 현재 백년비 자리에 있었다. 그가 떠나고 처음으로 옮겨진 곳은 명진관 옆 우체국 위의 공터. 자신의 자리에는 卍(만)자를 형상화한 조각품이 대체됐다. 곧 그는 현재 신공학관 자리의 공대 건물 뒤 기숙사 근처로 옮겨졌다. 영 모양새가 이상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테니스장에 딸려있는 창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2009년 3월 남산학사 착공에 앞서 테니스장을 허물다 코끼리가 발견됐다. 다시 갈곳을 잃은 코끼리는 애물단지처럼 남산학사 건축 현장을 떠돌기 시작했다. 개인집 담벼락에도 잠깐, 공터에도 잠깐. 남산학사가 완공되자 남산학사 출입구(충무로역방향) 언덕에도 소품처럼 서있었다. 지난해 여름 비가 무지막지하게 퍼붓던 그 때, 코끼리가 산에서 쏟아져 내린 흙탕물에 의해 옆으로 기우뚱하고 쓰러지게 되었다. 그걸 본 건설관리 관계자는 코끼리를 학군단 옆 공터로 자리 잡아 주었다. 생뚱맞게 자리한 코끼리상을 우연히 본 정각원장 스님은 한눈에 자신이 제작에 참여했던 코끼리상임을 알아봤다. 스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정각원 계단 자리로 옮겨오도록 했다.

① 현 백년비 자리로, 코끼리상이 처음 세워진 곳.
② 명진관 우체국 위의 공터, 코끼리상이 내려와 정착한 자리.
③ 현 신공학관 자리로, 코끼리상이 추방된 곳.
④ 현 남산학사 자리로, 기숙사의 탄생을 지켜보며 수해를 겪은 곳.
⑤ 현 정각원 자리로, 법타 스님이 코끼리를 발견해 데려온 곳.

40여 년에 걸친 코끼리의 방랑기를 엿보았기 때문일까? 정각원을 나오는 길 다시 만난 코끼리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무관심속에 방랑했던 코끼리상은 우리에게 늘 가까이 있었다. 마스코트로서 학교 엠블럼에 그려져 있고, 동국대 100주년 기념 스티커에도, 중앙도서관 엘리베이터 문에도 코끼리가 있다. 우리대학 대표 응원단 이름도 백상응원단이고, 심지어 학교 후문 고깃집 이름도 백상이다.
연세대의 독수리도, 고려대의 호랑이도, 건국대의 황소도 다들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고 굳건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대학의 첫 상징물이었던 코끼리상의 지나온 시간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잊혀진 20세기의 상징인 정각원 코끼리상 대신, 21세기 우리대학의 상징으로 팔정도 가족 코끼리상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 동국인의 상징으로 자리했던 흰 코끼리가 힘겹게 제 자리를 찾았으니 그에게도 관심을 기울여 주자. 이제 동국인들의 애정을 보여줄 일만 남았다.

도움을 주신 분들 : 건설관리팀, 정각원과 정각원장 법타 스님, 국제선센터 김영수 과장, 그리고 최근 정각원으로 코끼리를 직접 옮긴 이우영님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