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誌(외지)의 報道(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하버드’ ‘콜롬비아’ ‘캘리포니아’ 등의 主要(주요)大學(대학)에 설치된 ‘高等敎育(고등교육)센터’에서는 學生(학생)運動(운동)을 專門的(전문적)으로 功究(공구)하는 態勢(태세)를 갖추고 調査(조사)·觀察(관찰)을 통해서 各種(각종)의 經驗的(경험적)인 ‘데이타’가 提出(제출)되고 있고 작년가을에 개최된 美國社會(미국사회)學會(학회)에서는 일부러 이를 위한 硏究部(연구부)를 開設(개설)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活動派(활동파)學生(학생)의 出席(출석)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이제 ‘學生(학생)運動(운동)’은 하나의 새로운 硏究(연구)分野(분야)로 登場(등장)되었고 연구내용도 최근 2年(년)來(내) 극히 科學的(과학적)인 信憑性(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소위 ‘活動派(활동파)’ 學生(학생)들이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대부분이 頑迷(완미)한 敎條主義的(교조주의적) 성격이 아니고 開放的(개방적)이며 너그럽고 유연한 個性(개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大學(대학)에서 政治的(정치적) 行動(행동)의 自由(자유)를 구하여 不法的(불법적) 連坐(연좌) ‘데모’를 통하여 그 結果(결과) 檢擧(검거)된 8백數(수)10名(명)의 소위 學生(학생)叛亂軍(반란군)이나 選拔(선발)徵兵制(징병제)도에 대한 大學(대학)의 協力(협력)에 抗議(항의)하여 농성을 감행한 ‘시카고’大學(대학)의 學生(학생)도, 더 나아가서 越南(월남)戰爭(전쟁)反對(반대)의 地域的(지역적) 組織化(조직화)運動(운동)에 挺身(정신) 하 고있는 名門(명문) ‘하버드’大學(대학)의 大學院(대학원)學生(학생)도 平均的(평균적)인 學生(학생)에 비하면 훨씬 ‘開放的(개방적)인 너그러운 마음’의 所有者(소유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調査(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行動派(행동파) 學生(학생)들의 實像(실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因襲的(인습적)인 道德主義(도덕주의)나 順應主義(순응주의)를 不正(부정)하고 旣存(기존)의 基本的(기본적) 價値觀(가치관)에의 철저한 懷疑(회의)에서 새로운 ‘解答(해답)’을 자기 나름의 知性(지성)에 의하여 索出(색출)하고 그것을 자기의 倫理的(윤리적)命題(명제)로 하여 行動(행동)으로 具體化(구체화)하려고 하는 ‘나이 어린 實踐的(실천적) 知識人(지식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을 抛棄(포기)하고 私生活(사생활)에 埋沒(매몰)되어있는 조용한 學生(학생)들이 實利主義(실리주의)의 길을 택하는데 대하여 活動派(활동파)의 學生(학생)들이 한층 낙관적이고 知性的(知性(지성)적)이며 또한 人道主義的(인도주의적)이었다는 점이 아울러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知性(지성)은 현재의 强制的(강제적)인 同調化(동조화) 경향을 內生(내생)하고 있는 “病(병)든 民主主義(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反對(반대)를 표명하면서도 民主主義(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며 더욱이 社會主義(사회주의)思想(사상)에 無(무)抑制(억제)적으로 同調(동조)하는 경향은 찾아볼 수 없고 “萬人(만인)이 決定(결정)에 참여하는 民主主義(민주주의)”라는 運動(운동) 스로간이 표시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입장은 인간이 인간을 疎外(소외)하는 일이 없는 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하는 낭만적인 꿈-直接民主主義(직접민주주의)의 實現(실현)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旣存(기존)의 體制(체제)나 秩序(질서)에 대하여 辛辣(신랄)한 批判(비판)을 加(가)하고 不條理(부조리)에 埋沒(매몰)되어 가고 있는 現實(현실)의 病(병)든 民主主義(민주주의)에 대하여 妥協(타협) 없는 挑戰(도전)을 試圖(시도)하고는 있으나 그들의 知性(지성)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주의나 思想(사상)의 無(무)批判(비판)적인 同調者(동조자)가 되지 않게 하며 性格的(성격적)으로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柔軟(유연)한 개성의 所有者(소유자)이며 보다 幅(폭)이 넓은 開放的(개방적)인 마음의 所有者(소유자)들이라는 點(점)에 우리는 크게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미국의 民主主義(민주주의)의 먼 將來(장래)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道德的(도덕적) 空白(공백)에 安住(안주)하여 ‘效率(효율)과 實利(실리) 信仰(신앙)’에 몸을 바치고 있는 現實主義的(현실주의적) 政治家(정치가)나 實業家(실업가), 出世主義(출세주의)나 榮達(영달)主義(주의)이라는 目前(목전)의 小利(소리)에만 汲汲(급급)한 官僚(관료)나 旣成世代(기성세대)에게 病(병)든 民主主義(민주주의)를 蘇生(소생)시키거나 보다 次元(차원)이 높은 民主主義(민주주의)의 開化(개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行動派(행동파) 學生(학생)들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그들에게 圓熟(원숙)한 知性(지성)인으로서의 행동을 기대할 수 없고 따라서 부분적인 脫線(탈선)마저 없지 않으나 한편 어디까지나 理念(이념)實現(실현)에 獻身(헌신)하고 있는 이들 ‘나이 어린 異議(이의) 申立人(신립인)’들 가운데 美國(미국)民主主義(민주주의)의 “正統的(정통적) 相續人(상속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點(점)에서 우리는 그네들의 學生(학생)運動(운동)을 注視(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대학생도 몇 차례의 試驗(시험)地獄(지옥)을 거쳐 오는 과정에서 萎縮(위축)될 대로 萎縮(위축)되고 우리의 가난한 살림살이와 旣成世代(기성세대)가 저질러 놓은 온갖 社會惡(사회악)에 젖어 그들의 知性(지성)과 方向感覺(방향감각)이 흐려지는 않았으며 出世主義(출세주의)와 就職(취직)主義(주의)에만 급급한 나머지 대의에 사는 幅(폭)넓은 開放的(개방적)인 마음과 展望(전망)적인 識見(식견)의 所有者(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目前(목전)의 小利(소리)에만 악착스러운 矮小(왜소)한 ‘小人(소인)’으로 타락하고 있지 않는가 諸君(제군)들이여! 가슴에 손을 대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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