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국제문화를 적절히 소화 수용

승탑과 따뜻한 人間愛(인간애)의 대화 나눠
鐵(철)다량사용, 무늬 裝飾(장식)도 두드러져
부석사, ‘統一(통일),기념비’적 성격 띄어
불국사.석굴암은 당대 최고의 걸작품
上代(상대)…장엄, 中代(중대)…명쾌
下代(하대)는 현란하고 섬세해

  통일신라시대는 태종무열왕부터 문무와에 이르는 7세기의 3‧4분기에 이루어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統一帝國)이자 문화의 황금기였다. 이렇게 고구려‧백제 등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통일제국에 알맞은 새로운 통치 원리가 필요하게 된다. 새로운 체제는 진골을 중심으로 한 최고 권력층이 고구려‧백제의 잡다한 유망민(流亡民)을 규합하고 나아가 통일전쟁 과정에서 빚어진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막아 일사불란한 통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즉 반도 동쪽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던 작은 나라 신라는 일약 몇 갑절이나 작은 나라 신라는 일약 몇 갑절이나 광대해진 영토, 급격히 불어난 방대한 국민, 여기에 잡다해진 이민족(異民族) 의 혼재 등으로 자칫하면 통일제국이 붕괴할 위험까지 안고 있었는데 이러한 난제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 진골을 중심한 국왕의 전제왕권의 확립이라는 말이다.
  이 전제왕권은 이를 뒷받침해 줄 사상적인 원리가 필요하게 된다. 그 원리는 바로 앞 시대부터 신라를 지탱해 주던 불교 바로 그것이지만 그러나 통일제국에 알맞은 새로운 불교이어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불교는 종파불교(宗派佛敎)였다.
  종파불교라는 것은 자기 종파의 교리가 다른 여러 종파의 갖가지 교리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자기네의 우루한 교리를 중심으로 다른 잡다한 종파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통일 전제왕권의 지상 목표와 일치하는 원리였다. 따라서 종파 불교의 이론은 통일 제왕권을 뒷받침해 주는 불교로 급격히 부상하게 된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렇게 사회가 정비되고 국력이 크게 신장함에 따라 신라문화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화려한 국제적 대제국으로 번성한 당문화(唐文化)를 직수입하였고, 서역과 인도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페르시아 문화까지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제 신라는 국제적 문화가 화려하게 꽃 핀 대왕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수도 경주는 국제도시로서 번영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문화를 적절히 소화‧수용한 신라는 신라 독자의 화려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때가 신라로서의 문화의 황금기였던 셈이다.
  이때의 화려한 미술은 본질적으로 종파불교의 미술이었다. 당대의 국민들을 그들 교리로써 강화시키고 통일시키면 그 교재는 바로 이러한 불교미술이었던 것이다. 화엄종, 신인종, 법상종 같은 종파불교들은 제 각기 거대한 사찰들을 조성한다. 의상(義相) 스님은 그의 화엄종 본찰을 태백산 기슭에다 세웠고, 명랑(明朗)은 신인종의 도량을 경주의 남산기슭에 세웠으며, 법상종은 역시 경주에 그들의 사찰을 세우게 된다.
  특히 부석사나 사천왕사 같은 것은 통일제국을 성취한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당대에 세워진 이를 사찰들은 전대의 황룡사나 홍룡사 같은 엄청난 규모의 거찰들은 아니고 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품격을 갖춘 그런 사찰이었다.
  또한 이들 사찰에 봉안된 불상이며 탑도 마찬가지로 세련된 날씬함을 한결같이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리나 봉덕사 성덕대왕 신종(奉德寺 盛德大王 神鍾) 황룡사 대종 같은 공예품들은 그 신묘한 소리로 당대의 민심을 매혹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특히 경주 남산의 성지(聖地)를 중심으로 수많은 석불상(石佛像)들이 조성된 것은 당대의 불교미술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세련된 구도, 우아한 형태, 긴장된 선 등 이상주의를 지향하는 사실주의 미술양식이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일 것이다. 즉 종파불교는 바로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던 불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라라는 현실사회를 불국(佛國)이라는 이상사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만큼 자신에 차 있었고 그 만큼 신라를 자랑스레 생각했던 것이다. 이 점은 감산사(甘山寺)의 미륵과 아미타불상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감산사는 물론이고 미륵과 아미타불상은 김지성(金志誠)이라는 육두품귀족(六頭品 貴族) 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 조성한 간절한 염원의 소산이다.
  육두품이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상류층에는 끼일 수 없는 제한된 신분이었으므로 결국 좌절과 실의가 남달리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즐겨 불교의 귀의했고, 따라서 김지성처럼 전 재신을 희사해서 불사를 일으키곤 했을 것이다.
  감산사의 미륵 아미타불상들은 각절한 김지성의 원망(願望)이 알알이 베어 있는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불상들은 세련된 구도와 우아한 형태, 팽팽한 긴장감이 잘 나타나 있는 이상적이고 사실적인 양식의 불상이다. 바로 당대 육두품의 이상과 좌절이 이런 양식에 철저하게 베어 있는 것이다.
  최하류층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교미술의 제작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의상스님의 제자인 진정법사(眞定法師)는 그의 전 재산인 다리 부러진 솔 하나를 선뜻 절 창건에 보시하고 출가한 분이었고,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金大城)의 전신(前身)도 모량리(牟梁里)의 몹시 가난한 빈민이었는데 그의 전 재산인 밭 한 띄기를 역시 홍룡사의 불사에 선뜻 보시해서 후에 김대성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말은 이제 빈민층에게도 불사 즉 불교미술의 제작에 적극 참여하게 된 사회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불사 붐은 물론 당대를 대표하는 국왕 중심의 진골 귀족에게는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작품은 따라서 이들 계층에게서 주한 것들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바로 8세기 중엽 진골 귀족들의 절실한 소망에서 이룩한 것으로, (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조성했다는 이 불국사와 석굴암이 당대의 최고 걸작품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세와 현세의 부모는 무열왕계의 金氏王族(김씨왕족), 다시 말하면 당시 최고의 집권층인 진골 귀족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찰들은 당시 왕가 내지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룩한 셈이다. 김대성이 돌아가자 국가에서 완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왜적을 진압하기 위해서 동해구(東海口)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토함산 정상에 석굴암을 조상했다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사업(事業) 임을 분명히 해 주고 있다. 사천왕사는 서해로 쳐들어 온 당군을 막은 기념으로 세워졌고, 원원사나 이 석굴암은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진압하고자 세운 것으로 아마도 통일 후 이러한 호국의 진찰(鎭刹)을 요충지마다 세워 적의 침입에 단단히 대비하였던 것 같다. 당시 진적(鎭敵)의 종파불교인 신인종(神印宗)이 이러한 사찰을 조성하고 있었다.
  신인종은 바로 항마(降魔) 특히 해적(海敵)을 진압하고 항복받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불교이다. 석굴암의 본존대불(本尊大佛)은 바로 항마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왜적의 진압을 상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석굴암의 전체 구도는 엄격한 균제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형태는 인체의 현실성을 보이면서도 아직도 佛(불)의 이상이 강하게 나타난 모습이 역연하고, 힘차며 긴장된 선과 명쾌한 부조의 아름다움은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이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이상적 사실주의의 아름다움을 결정(結晶)시킨 당대 최고의 걸작으로 보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석굴암의 미술은 따라서 삼국시대의 장엄한 아름다움과는 얼마나 현격한 차이인가. 여기에 표현된 힘은 역강(力强)한 힘이 아니라 명쾌한 힘이며, 웅장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산뜻한 아름다움이며, 고졸한 품격이 아니라 세련된 품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신라 전기(前期), 즉 신라중대(新羅中代)는 이와 같이 상류층이나 중류층이나 하류층이나 모두 이른바 불사인 불교미술의 조성에 적극 참여하는 국민적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대 불교 미술의 수준은 바로 이러한 국가 전체의 저력에서 나온 것으로 석굴암은 바로 그 결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라 하대(下代)는 무열왕계의 진골귀족(眞骨貴族)을 중심으로 한 시기이다.
  왕권 세력이 붕괴되고, 중앙 귀족의 내분이 격화되면서 지방 세력들이 크게 진출하는 시기이다. 9세기가 되면 이제 지방을 중심으로 호족(豪族)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된다. 바야흐로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이를 지방세력들은 그들의 영역에다 다투어 사원을 세운다. 불상을 조성한다, 탑을 만든다는 등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경주를 중심한 예부터의 신라영토 일원에만 사찰이 세워지던 것이 이제 전국적으로 사찰이 세워지게 된다. 이들 사찰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소외받던 선종에서 세운 것이다. 선종은 지방 호족들에게는 구미에 알맞은 불교였다. 즉 마음 한번 잘 닦으면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지위가 낮거나 높거나 아무 상관없이 누구나 깨닫게 되고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선종의 교리야말로 신분이나 가계에 관계없이 중앙 귀족이건 국왕이건 무엇이나 될 수 있기를 갈망하는 지방호족들에겐 그 이상 알맞은 교리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호족들은 유명한 선승(禪僧)들을 다투어 모셔왔고, 그들을 위해서 절들을 크게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의 불교미술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불교미술의 재료가 철(鐵)을 많이 사용한 점이다. 특히 철불들은 선종사찰을 중심으로 많이 만들게 되는데 보림사의 철불, 실상사의 철불 봉암사의 철불, 도피안사의 철불 같은 것은 당대를 대표할 그런 불상들이다. 
  둘째로, 모든 불교미술에 장식성이 부쩍 줄게 된 점이다. 탑이건 불상이건 종이건 또는 어디건 간에 무늬가 많아지고 치레가 풍부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식성이 풍부함에 따라 섬약해지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가령 탑에는 기단에도 안상(眼象)무늬나 십이지장 또는 기타 무늬들을 새기고, 답신부에는 사방불이나 사천왕상이나 기타 조각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불상에도 대좌나 광배에 갖가지의 화려하고 섬약한 무늬들을 새기고 있으며, 종(鍾)에도 보다 풍부한 무늬들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비로자나 불상들을 많이 조성한 점이다. 비로자나들은 원래 화엄종의 주존불이었는데, 하대 신라가 되면 화엄종뿐만 아니라 선종에서도 주존불로 삼고 있었다. 그것은 선종의 교리가 화엄종의 교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종의 교리는 화엄종의 교리를 크게 도입하였고, 화엄종은 선종의 수행방법을 크게 받아들이게 되어 화엄종과 선종의 통합운동, 이른바 선‧교일치(禪敎一致=統合(통합))운동까지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상이 당대 불상조성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림사의 비로자나철불, 동화사의 비로자나 석불, 부석사의 비로자나 석불, 축서사, 도피안사, 불국사의 비로자나불상 같은 것은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불상인데, 모두 비로자나 불상인 것이다. 비로자나불의 성행은 이제 한 호족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되겠다는 염원이 서서히 싹트게 된 사실과 맞아떨어지게 된 때문일 것이다.
  넷째로, 승탑(僧塔), 이른바 부도(浮屠)와 탑비(塔碑)의 성행을 들 수 있다. 9세기 후기가 되면 선종을 신라사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한 주역들인 초기 선승(禪僧)들은 서서히 입적하게 된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자 그들의 제자들은 다투어 스승들의 업적을 금석(金石)에 새기고 묘탑을 화려하게 꾸미게 된다. 이것은 외면적인 치레나 신앙을 그렇게도 반대하던 그들의 주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화엄종의 교리를 도입해서 ‘見性成佛(견성성불)’의 선리(禪理)를 이해시키고자 하던 그들이고 보면, 교종들이 즐겨하던 예불적인 신앙을 도입한다 해서 모순된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예불적인 신앙을 그들 선종을 일으킨 조사스님에 예경하는 것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즉 그들 문파(門派)의 용성을 불력(佛力)보다 조사력(祖師力)을 빌어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더구나 문자에 의하지 않고 그들 선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청각적인 교재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식한 사람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그들을 선종으로 이끌어 들이는 데는 이 이상의 무기가 없었다.
  비석에 새긴 조사스님의 업적은 유식한 사람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으며, 탑의 현란한 아름다움이라던가 비(碑) 머리의 용트림이나 대좌의 거북 조각이 꿈틀대는 신비감은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조사스님의 무언의 말씀을 이해시키는데 얼마마나 좋은 교재였을까?
  이 무언의 말씀은 결코 사람을 압도할 위용은 없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나 눈짓 한번, 미소 한번으로 서로 간에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알지 못한 때 (不知不識間)에 문득 깨닫도록 하는 그런 교육방법 조사스님의 묘탑이나 비석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승탑을 보면 따뜻한 인간적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그러나 이 대화는 소박하긴 하지만 무궁무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절묘한 지붕 끝,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나로는 비천, 의호해주는 사천왕상이나 팔부중, 현란하고 섬세한 갖가지 주의, 우람한 사자들, 이들을 바치는 소용돌이치는 물결무늬나 구름, 이를 해치고 꿈틀대면서 상승하는 용들, 그리고 전체가 8각을 중심구도로 해서 절묘한 굴곡을 이루는 탑 형태를 다양한 방법으로 갖가지 근기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려면 이들 선사들의 묘탑이나 비석에 재현하려 했던 것이다.
  다섯째로 이러한 불교미술들은 인적이 드문 산간이나 벽지에서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 불교 미술들을 그 지세에 맞추어서 현실적으로 조화시켜 나갔다. 현실감이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하던 당대의 사상경향 때문일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불교미술의 특성은 上代(상대) 中代(중대) 下代(하대)에 따라 각각 달라지기 마련이다.
  상대 신라는 장엄한 아름다움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중대 신라는 세련되고 명쾌한 아름다움이 당대를 압도했으며, 하대 신라는 현란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던 시대였다. 이것은 불교 미술을 조성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라의 불교 미술은 마침내 모든 백성들에게 작용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조성되는 찬란한 황금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