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응접실에는 긴 소파 두 개가 탁자들 사이로 해서 마주보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화초가 담긴 화분이 하나, 재떨이, 담배, 메모철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왼편 구석에 텔레비전이, 그 위에 인형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부엌입구의 벽에는 9시를 가리키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다. 내 시계를 보았다. 1시 20분, 벽시계는 오래 전에 죽었던 게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집이 빈 집일 가능성은 더욱 많아진 것이다.
  나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플래시를 켜서 신발을 확실하게 살펴  보았다. 슬리퍼가 한 켤레, 운동화가 한 켤레, 그리곤 없었다. 신장도 열어 보았으나 낡은 구두가 몇 켤레 있을 분이었다.
  나는 부엌 바로 옆방으로 가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분명히 빈 방임에 틀림없었다. 안방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차 행동이 대담해지기 시작하면서 내 발소리가 또박또박 크게 틀렸다. 마지막으로 화장실 옆방으로 향했다. 역시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어느 방부터 할 것인가를 소파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면서 생각했다. 역시 안방부터 해야 될 것 같았다. 담배를 끄고 나서 안방 손잡이를 돌렸다. 움직이지 않았다. 윗주머니에서 만능열쇠인, 내 재산목록 1호를 꺼내서 들렸다. 어김없이 열렸다. 플래시를 켜고 쭉 둘러보았다.
  정면에 자개능이 놓여 있었고, 왼쪽으로 화장대 그리고 그 옆에 병풍이 처져 있었다. 화장대 서랍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화장대서랍, 장롱서랍을 정신없이 뒤졌다.
  비닐백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지그시 짓눌렀다. 눈짐작으로 삼백만원 상당의 현금과 수표, 다이아, 루비스타, 백금반지, 황금열쇠 등 정말 처음 대하는 횡재였다. 안방을 끝내고 다른 방은 대충 뒤졌는데, 화장실 옆방은 빈방이었고 부엌 옆방은 대학생 방이어서 거기서는 카메라 한 대 밖에 소득이 없었다. 이제 2시가 조금 넘었다.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누웠다. 비닐백의 무게만큼이나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현금과 수표는 추려서 윗도리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수표가 섞여서 그런지 삼백여 만원의 부피치고는 너무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석이 들어 있는 비닐백은 둘둘 말아서 바지주머니에 넣고, 카메라도, 돈병철도 부럽지 않았다. 용길이 녀석이 알면 무척이나 원통해 할 것이다.
  병신새끼! 제 복을 제가 찼으니 할 수 없지. 그래도 몇 만원 정도는 친구의 의리로써 던져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50만원으로 앰프기타를 한 대 사서 무교동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형호한테 일자리 하나 구해 달라고 해야겠다. 참, 저번에 2년 6개월 먹고 들어갔을 때부터 연락이 끊긴 미옥이한테도 찾아 가야겠다.
  그래서 진절머리 나는 무허가 하숙집을 떠나 어디 조용한 곳에 방을 얻어서 살림을 차려야겠다. 여기서 생각이 멈췄다. 그리고 또 무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담배를 한 대 들었다. 그렇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돈 좀 부쳐드려야겠다. 아니다. 그러면 들통나기가 쉽다.
  아버지 성격에 고발하실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는 내 놓은 자식이니 취직해서 번 돈이라고 해도 믿지 않으실 것 같았다. 집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몇 번이나 다짐하면서도 그러면 그럴수록 고향의 부모님, 동생,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서울로 도망쳐 오지만 않았어도, 오순도순하게 꽁보리밥에다 김치 한 가지를 놓고 먹더라도 마음만은 지금보다 편했을 것이다. 집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담배를 재떨이에 힘을 주어 비벼 껐다. 지금은 골치 아픈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있다는 것, 나에게는 과분한 목돈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3시 27분.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손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남들처럼 떳떳하게 땀을 흘려서 돈을 벌고 효자노릇, 훌륭한 아버지, 남편 구실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젠 감옥살이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미옥이가 보고 싶어졌다. 미옥이는 내가 무교동에서 기타칠 때 사귄 기집애였다. 이마가 시원스럽게 되었고 웃을 때는 보조개가 살며시 들어간게 보기 좋았다.
  내가 미옥이 때문에 잠시나마 도둑질을 그만둔 적도 있었다. 미옥이는 자기 나이 또래 밖에 안되는 계모가 안방을 차지할 날 가출을 애서 뭇 남자들의 희롱을 감수해야만 했다. 내가 두 번째로 감옥살이를 한 것도 미옥이 때문이었다. 술 취한 미옥이 손목을 잡고 여관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는 남자를 보도블럭으로 머리통을 까고 1년 2개월을 살고 나왔다.
  미옥이는 자기 때문에 내가 감옥살이를 하는 게 미안했던지 면회도 자주 오고 출감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내가 세 번째로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는 소식 한 장 없었지만 그래도 밉지 않았다. 손목시계가 4시20분을 가리켰다.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되었다. 증거가 남을 만한 건 없나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다.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현관 쪽으로 걸어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여전히 별이 없는 하늘이었다. 정원을 쭉 훑어봤다. 몇 시간 전에 빈 집 정원에서 조바심을 타면서 떨었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정말 잠복처럼 가슴 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잠복 한번 하고 나면 온 몸에 맥이 풀린 게 십년은 족히 감수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내 자신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여전히 빨래는 널려진 채로 미풍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 때, 시커먼 물체가 앞을 가로 막았다.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 했다. 자세히 보니 용길이었다. 순간 “이 도둑놈새끼!” 하는 소리와 함께 방법대원의 곤봉이 날아왔다.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직사각형 하늘이, 푸른 죄수복이, 어두컴컴한 감방이, 버림받은 얼굴들이, 미옥이의 얼굴과 함께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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