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古家(고가).
  빛바랜 창호지를 透過(투과)한 햇살에 눈이 부시다. 밑창에 드리워진 처맛골의 그림자를 본다. 뚜렷한 굴곡이다. 이것은 몹시도 지루하고 의로웠던 지난날의 긴 旅路(여로)가 되어 내 人生(인생)이 숨 쉬는 이 작은 방의 창에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 아, 어쩌면 이건 또 다른 生(생)의 숨소리를 잉태하는 前奏曲(전주곡) 일지도 모른다.
  항상 음악이 나지막히 흐르고 드물게 담배연기 자욱한 내 삶이 숨 쉬는 조그만 방을 한 없이 사랑하지만, 봄의 유혹에는 한 마리 나약한 나비가 되어 나른다.
  그래서.  고궁처럼 조용한 뜨락을 나섰다. 밭마당가 화단 앞에 섰다. 하얀 사금파리에 햇빛이 반사되어 내 눈을 어지럽힌다.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저 사금파리가, 그 옛날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를…
  내가 서 있는 이 꽃밭이 한 없이 높게 보이던 어릴 적에, 간신히 화단을 기어올라 소꿉장난을 시작했었지. 무심코 풀뿌리 섞인 물기 오른 흙을 파다 지금과 비슷한 하얀 사금파리를 발견했었지, 그 때 난 하나의 환희를 맛보았었다.
  내 마음은 그 옛날의 重心(중심)으로 돌아간 걸까, 나도 몰래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그 때처럼 흙을 헤집는다. 조그마한 그렇게 견고하지 않은 돌을 들어 본다. 아, 난 또 다시 그 옛날과 같은 환희를 느낀다. 한 生命(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난초싹이었다. 제 빛을 잃은 채 한없이 나약하게 보였지만 그 한 생명에서 난 굳은 의지를 보았으며, 절망 할 줄 모르는 삶을 보았으며, 순수의 美(미)를 보았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려고 봄부터 소쩍새가 운다고 하던 詩(시)를 생각한다. 한 포기의 청초한 난초를 탄생시키려고 어느 겨울 날 눈밭이 정수리 위에 꽂힐 때도, 地上(지상)의 生命(생명)들이 얼어붙던 한파가 휘몰아 칠 때도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夢精(몽정)은 계속 되었으리라. 다시 나의 속은 그 生命(생명)위에 흙을 덮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順理(순리) 일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한 삶의 의지를 심어 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일어섰다. 어디선가 봄바람이 불어와 내 이마의 땀을 닦는다. 심호흡을 해 본다. 어슴푸레 봄의 체취가 묻어 있는 것 같다. 3월이 묻혀온…
  다시금 나의 발길은 봄의 유혹을 쫓는다. 뒷동산을 올랐다. 봄의 萊身(래신)을 생각하면서 양지 바른 언덕 기슭으로 갔다. 또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이번엔 아직은 빛바랜 잔디를 헤집는다. 또 한 번의 환희를 느낀다. 제법 길게 자란 한 무리의 달래 포기를 발견한 것이다. 시집간 누나를 생각한다. 떠오른다. 환영처럼 사라진다. 그 옛날 누나가 하던 것처럼 한 웅큼 달래포기를 캤다. 어쩔 수 없는 숙명론으로 내 행위를 合理化(합리화)하면서…
  어느새 내 발길은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오늘은 내 손으로 국을 끓여야지. 봄의 열기로 달래 국을 끓여야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지금 나는 조용히 내 밤에 安住(안주) 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나지막히 음악이 흐르고 있다. 난 이렇게 다짐해 본다. 먼 훗날 누구에겐가 豫言(예언)처럼 이야기 하리라고, 그리고 그 때부터 내 새로운 삶이 탄생되고 난 또 다른 날의 여로를 걸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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