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숙인 그저 심신이 괴롭다고 찾아온 겁니다. 연숙일 보내주십시오. 스님!”
  “학생, 나도 잘 알아요. 저렇게 젊고 예쁜 아가씨가 웬일로 예에 찾아온 걸까, 나도 걱정했고 돌아가도록 타일렀다오. 그래두 하 애걸을 해서 있게는 했지만 저렇게 긴 머리채가 그대루 있잖수.”
  그는 스님의 말씀은 귀담아 듣지 않은듯 연숙일 향해
  “숙이, 바보 같은 짓이야, 이건”
  “아아!” 잠자코 있던 그녀는 말끝을 잇지 못한채 푸른 대문 쪽으로 뛰쳐갔다. 그 뒷모습이 흐느끼는 듯 두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숙이!”
  그는 다급하게 부르짖으며 그를 뒤로 쫓았다. 어딜 가는거야, 가면 안돼, 그는 달려가는 것이었다. 진작 불공을 끝내고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주지스님도 혜은스님과 함께 그들을 따랐다.
  푸른 대문에 딸린 구석방에서 연숙이는 흐느끼고 있었다. 괴롭고 착잡했다. 어떻게 처신해야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흔들리고 있는 자기를 가누지 못해서였다.
  기석이는 안마당에 선채 그녀를 부를 뿐이었다. 들어가 그녀를 잡고 울어버릴까 하는 충동도 느꼈지만 참고 있었다. 참는 게 아니라 안절부절했다.
  그의 옆에는 여승과 행자들이 자꾸 모여들었다. 마루와각방의 형광등이 빛을 내어 안마당은 밝았다. “연숙이, 이리와요, 주지스님께” 당황해 하던 모습과는 달리 혜은스님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을 가다듬는지 한동안 잠잠하다가 커다란 창호지문을 밀며 나왔다. 잠시 주춤하다가 높은 마루를 내려서서 주지스님 앞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합장했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긴 머리칼이 한 켠 눈가를 가리웠고, 다른 쪽 눈 언저리는 퉁퉁 부어있었다.
  멍하니 서있던 주지스님이 연숙의 손을 잡으며
  “자아 일어나요.”
  하면서 붙잡아 일으켰다. 그녀는 힘이 모두 빠져 버린듯 비틀거렸다. 오랜 정적을 깨뜨리는 스님의 발소리가 천상에서 울리는 게시처럼 느껴지는 기식이었다.
  “그렇게 울 수 있으니 바깥세상으로 나가야지. 자신이 불우하다고 괴롭다고 무작정 여길 찾아오다니-” 하며 이어서 “이 숙연스런 절은 그저 괴롭다고 찾아오는 걸 허용하지 않아요. 여긴 현실도피처가 아니니까” 한손을 연숙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연숙이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자 스님은 다시 말을 계속 했다.
  “연숙이라고 했지? 이 청년 같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그런 괴로움을 잊게 해줄 거요.”
  기석인 움찔 놀랐다. 괴로움을 잊게 해줘? 찾아왔으면서도 꼭 어쩌자는 결심이 서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눅진해있는 피로가 풀려질 순 없는 거야, 고는 다시 지난주 공원에서의 기억으로 돌아가 그녀와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이었다.
  “여길 찾아온 결심만큼 나가서 살아가시오”
  쟁쟁하게 울리는 스님의 말에 그는 퍼뜩 절에 와 있는 자신으로 돌아왔다. 연숙의 얼굴엔 눈물이 그쳐있었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빛은 여전했다.
  둘이는 청량사를 나왔다.
  골목을 휩쓰는 싸한 바람이 바바리깃을 울렸다.
  그는 연숙으로서는 언제나처럼 불전에 합장할 수 없다고 새삼스레 느껴졌다. 이제 그 악몽처럼 목덜미를 휘어잡던 절의 분위기는 가셔졌다해도 나약한, 세상을 알아버린 연후의 그들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믿어졌다.
  골목을 벗어나 청량리 로타리에 나서자 연숙이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석이씨, 다시 이 거리로 되돌아 왔지만 마음은 예전대로에요” 그는 헉헉거리며 바삐 돌아가는 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장해 나 자신을 알어버린 오한과 남과 화합할 수 없는데서 오는 전율을 느낄 뿐이에요. 나는 끝내 피해 달아나야 하는 거죠” “...” “이제부턴 번호가 다른 차를 타요 아주 영영-.” 그는 그 말이 삼류 애정영화의 한 ‘씬’으로 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질주하는 차들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쫓고 다시 또 쫓고 있었다. 나도 그 마음의 병처럼 평행선을 긋고 있는지도 몰라, 그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저속에 묻혀버리는 거야.” 하고는 “연숙이 나와는 그만 이래두 말야.” 그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과 걸어보긴 할 꺼에요. ㅎ허지만 나는 언제나 타인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타인...” 더 이상 이을 대화를 잃었다. 기실 애써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건너편 인도의 푸른등이 켜지자 차량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난 저쪽 편 23번을 타야해요” 건너는 사람은 그녀뿐일 것 같다.
  그는 언젠가 지독하니 추운 겨울밤 ‘고오’ 푸른등에도 길을 건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데도 ‘버스’는 그대로 정지해 있었고, 그는 ‘버스’안에서 불현듯 울컥 울음을 씹던 일이 떠올랐다. (연숙인 얼마나 외로울까?) 그는 또각또각 포도를 울리는 ‘하이힐’의 ‘리드미컬’한 음향에 귀를 기울인 채 서있었다. 이내 빨간 불이 켜지고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발하며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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