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개살구’를 중심으로

수동적 運命(운명)수용태도가 비극적 運命(운명)의 온실
살구나무…비극 잉태하여 파괴시키는 自然(자연)의 순환 역할
삶을 회복시키는 根源的(근원적)인 사랑이 하늘
소문은 異質(이질)要素(요소)에 응하는 수동적 수단
-時間(시간)에 결과 맡기는 마을사람들의 낙천적 성격-

  ①주인공들 (형태·서울집·재수)
  형태와 서울집과 재수 사이의 비극은 운명적이다. 여기서 서울집과 재수가 불륜관계를 맺는 것은 그들의 처지와 심정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울집을 보면, 남의 첩이되어 낯선 곳에 와서 갇혀 살게 된 것을 슬퍼하기는 하나 그런 운명을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산다. 이 여자가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스럽고 낙천전인 것으로 되어 간다.
  서울집이 온지 일 년쯤 된 어느 날 밤, 그녀가 달아난 줄 알고 형태와 마을 사람들이 찾아 나갔다가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서울집의 운명이 그 자신에게나 소설의 분위기로나 그렇게 비극적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형태가 초조해하는 모습, 형태를 아니꼬와 하는 마을 사람들도 그를 동정하여 등불을 들고 열심히 찾아다니는 모습, 결국 목욕을 하고 있는 여자를 찾은 형태를 두고 돌아오는 마음 사람들의 희희낙낙한 분위기는 서울집의 운명에 더욱 낙천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이 일은 못된 형태의 마음마저 누그러뜨려 감시를 소홀하게 하여 재수와 서울집이 가까워지게 한다.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니고 아들이었던 것은 형태의 단속에 다른 사람들은 그 집에 접근할 수 없었던 탓이다. 목욕사건이후 서울집을 믿는 마음의 틈으로 재수가 스며든 것이다. 이 결절정적인 비극의 발단도 극히 자연스럽다.
  한편 형태는 벼락부자가 되어 살구나무집을 짓고 첩을 얻게 된 것이 그의 처지나 성격으로서는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은 일들이다. 애초에 그가 벼락부자가 된 것은 그릇된 개화(일제 식민지)의 먹인데, 이것이 그 비극의 발단이었든지, 그보다 더 먼 뿌리가 있었든지 간에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일단 수동적이다.
  그 행동은 비록 선하지 않으나 그 선하지 못함의 근원이 그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그릇된 흐름에 있다. 그는 그러한 시대의 물결을 타고 있을 뿐이다. 재수는 그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으나 그의 행적과 처지로 보아 아버지의 재물의 덕에 얹혀 수동적으로 사는 유형의 인물이다. 아버지의 그늘에 눌리어 아내도 없이 혼자 사는 젊은 남자가 그 아버지에게 마음이 없는 젊고 예쁜 첩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형태의 그늘에서 산다는 공통점이 자연스럽게 이들을 맺어준 것이다. 이런 운명을 재수로서는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 주인공들은 그들의 비극적 운명 속에 빠지는데 그들의 성격과 행동의 수동성이 거기에 자연스러움을 부여한다. 운명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그 비극적 운명의 온실이 된다.
  ②개살구나무
  개살구나무는 처음에는 비극을 감싸 기르는 역할을 한다. 사람 뿐 아니라 하늘마저 엿보지 못하도록 집을 감싸서 그곳에서 서울집과 재수의 불륜이 이루어지는 온신 역할을 한다.
  살구나무에 가려져 있는 예쁜 첩의 비밀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먹음직스러운 살구의 맛과 같은 것으로 연상한다, 곱으로 그 비밀을 폭로시키는 역할을 한다. 살구를 훔치러갔던 금녀가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 소문의 발단인 것이다. 요컨대 살구나무는 비극을 잉태하여 길러서 익혀 파괴시켜 버리는 역할을 한다.
  이 나무가 표상하고 있는 것은 자연과 시간이다. 자연 속에 독하고 해로운 것, 부자연스런 것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곪아 터져 원래의 건강한 자연으로 회복된다. 개살구나무의 역할은 이러한 자연의 회복력이다.
  여기서 사건의 함께 살구가 익어가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고 강조되는데 이것은 사건 전개의 力動(역동)을 자연 즉 살구나무에서 얻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건 전개의 역동뿐 아니라 인물들의 성격 행동조차 이 나무의 성격과 흡사하다. 마치 살구나무가 이 소설속의 등장인물의 하나같은 느낌마저 준다.
  ③마을 사람들
  마을 사람들은 이 비극에 직접관계 없다. 주인공들의 운명의 배경이 되어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존재하고 사건이 폭로되자 추문으로 존재하고 나중에는 불륜의 상처를 삭이는 시간으로 존대한다.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그들의 비극의 증인이 됨과 동시에 윤리기준이 되고 私心(사심)없는 관관이 된다.
  형태네 살구나무집같이 유별난 것은 당연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킨다. 그 유별남이 자연스럽고 선한 것이 아닐 때 사람들의 호기심은 탐색가, 사냥꾼의 눈이 된다, 이때 호기심은 인간의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자기보호 본능의 발로이다.
  살구나무집이 주는 인상은 결코 다정스러운 것이 아니다. 어딘지 이질적이고 위험해보이며 더구나 부도적한 장소이다. 거기다가 그것은 사람들이 보거나 드나들지 못하도록 감추어져 있다. 그 집을 보는 사람들의 눈초리 속에는 꼭 그 비밀을 헤집어 맛을 보고야말 것 같은 잔인성이 감추어져 있다.
  작가는 그 살구나무가 참살구가 아니고 개살구임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날밤 금녀를 끌어낸 것은 살구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바로 그 호기심인 것이다.
  호기심이 비밀을 폭로시켜 소문으로 만든다. 그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자연과 시간의 질서 위에 삶을 실어 살아가는 수동성이 그들 생활의 본질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그 장면을 본 금녀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마음이 웅켰으나 시간이 지나 아침이 되자 마음이 누그러져 자연스럽게 입을 연다. 말을 해 갈수록 점점 대담해진다.
  금녀의 마음에는 사심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런 끔찍한 임을 알고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런 이변을 다른 사람과 같이 알고 있어야지 혼자 속에 담아 두었다가는 병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행동을 보면 금녀의 몸속에 피와 같이 흐르고 있는 시간이 느껴진다. 금녀는 그 시간의 흐름을 억제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마음이 가는대로 자기를 맡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막상 형태에게는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려한다. 오히려 그를 동정하여 그 일이 그의 귀에 들어 갈 것을 꺼려한다. 누구보다 그 일을 고소하게 생각하는 큰마누라에게조차 그런 역학을 시키지 않는다. 결국 형태가 읍내에서 예정보다 빨리 돌아옴으로써 스스로 목격하게 되는데, 의심 많은 그의 성격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여기서는 아주 우연한일같이 보인다. 마치, 아무도 그 일을 형태에게 발설하지는 않았으나 소문이 소리 없이 그의 마음을 끌어 그 장소로 데려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여기서 우리는 소문의 생생한 본질을 볼 수 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의 질서를 깨뜨리는 이질적인 요소에 대응하는 수단이 소문이다. 직접적으로 어떤 작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비밀을 폭로시킴으로써 그 이질성을 깨뜨려버린다. 마치 心霊医術師(심령의술사)가 아무 도구도 없이 손으로 수술을 하듯 병이 숨어 있는 곳을 파헤쳐 백일하에 드러내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종적이 없다. 소문은 그 이질적인 요소를 일상적인 생활 속에 흡수해버리거나 제거해버리는 수단이다.
  소문은 자연스럽게 때가 무르익어야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격은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이다.
  이 소설에서도 금녀가 그 사실을 폭로하기 전에 이미 살구나무집에 대한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 사실, 즉 소문의 근원인 사건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자 않는다. 그냥 소문으로서 있을 뿐이지 사람들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은 없다. 그러다가 살구가 무르익어 터지듯 그날 밤 금녀에 의하여 비밀이 터져 나오자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소문은 社會化(사회화)의 성격을 띤다. 이때까지 사람들의 생활로부터 가려져 있는 것이 사람들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소문이 잔인성을 띠는 것은 비밀의 폭로라는데 있다.
  그러나 그것도 설익은 것의 폭로가 아니므로 잔인성속에도 따뜻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 이 애정은 때가되어 자연스럽고 저절로 터져 나오도록 기다려주는 사람들의 수동적자세의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형태에게까지 그 비밀이 밝혀지자 소문의 역할은 끝난다. 이제 사람들은 그 비극을 삭히는 시간의 뜻을 띠게 된다. 형태의 큰마누라는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기여에서 그 일이 사라지면 재수의 죄도 벗어나리라 믿고 아들을 마을에서 떠내 보낸다. 형태도 그 마음의 상처와 수치가 시간이 지나 가을 찬바람이라도 불 때면 풀리리라 생각한다.
  이런 의식 속에서 서울 집에 대한분도 풀리기 시작하고 다시 그를 향한 열정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최면장을 밀어내고 면장자리를 빼앗으려던 욕심이 오히려 시들해진다. 시간 속에서 상처받아 사나와졌던 그의 영혼이 카타르시스 되어 간다.
  이러한 형태네 집안의 비극이 불륜의 죄가 되어 심재하는 곳은 마을 사람들의 기억속이라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그들의 공동의식 속에 길러온 자연스럽고 소박한 도덕의식이 재수와 서울집의부도적한 행위에 대한 민감한 판단기준이 된다.
  이것은 민중들의 자기보호본능의발로이기도 하다. 자연부락의 민중들은 그들의 공동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 사회에 끼어든 닻선 것을 호기심과 소문으로 그 음습하고 부정한 부분을 밝혀내어 사회화시켜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수치가 되게 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벌은 수치심이다.
  죄를 벗는 길은 그 일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끼얹혀진 해로운 정서(아마도 그 역시 수치심일 것이다)를 푸는 것이다. 이 소설속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으로 그 방법을 삼고 있다.
  이 시간의 흐름이 카타르시스로서 실현되는 곳이 바로 마을 사람들의 의식과 기억속이라 형태나 형태의 마누라가 시간에 대하여 의심하지 아니하고 으레 세월이 흐르면 다 잊혀 낫게 되리니 하는 믿음의 근거는 그들까지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즉 민중의 선량하고 낙천적인 성품에 두고 있다. 소문과 호기심으로 보인 그들의 잔인성은 오히려 선을 지향하는 본성의 다소 단호한 표현일 뿐이다. 그 길은 근원은 결국 애정인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들의 본성이 믿음직스러운 것은 그들이 그들의 삶의 원천을 자연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④하늘
  이렇게 주인공들, 개살구나무, 마을사람들이 사건을 펼쳐가는 것을 지켜보는 하늘이 있다. 작가는 처음부터 살구나무집이 하늘 아래의 집을 강조함으로써 독자에게 하늘의 존재를 환시시킨다. 그 비밀이 발각되던 날의 하늘의 조짐은 모든 것을 하늘이 미리 예정하고 이끌어 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하늘도 엿보지 못하도록 감추어진 집속에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구나무에 가리어져 있는 그 집에 보내는 마을사람들의 눈초리는 하늘이 그 집을 보는 눈 그대로이다.
  금녀가 그 끔찍한 장면을 내려다볼때 하늘도 그의 어깨 너머로 같은 심정으로 내려다본다. 하늘은 사람들의 의식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그 세계를 두르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 소설의 모든 요소를 감싸고 스며들어가 비극을 삭이고 사람들의 삶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사랑인 것이다.
3,결론
  이 소설이 등장인물들의 운명에 대한 수동성은 원초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우리 조상들의 수동적인 삶의 태도의 근원도 하늘의 인간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可山(가산)의 이야기나 인물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깊은 의식 속에는 이들을 한없이 다정하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던 그리운 혈육을 만난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감정은 이런 느낌에마저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근원에서 멀어져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민족을 화합하는 힘인 정서를 더욱 메마르게 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의 의식의 자유마저 구속하고 있다. 사실은 이 형국을 만난 듯한 느낌이야말로 의식의 날카로운 대립과 분열, 그에 따르는 부자유의 고통으로 시달리는 우리 사회를 해방시킬 영원하고도 풍부한 생명의 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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