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힘으로 허구적인 삶을 벗어나다

“내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라는 어느 학승의 말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인은 생각 없이 사는 삶에 익숙하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어느새 미디어와 언론이 제공하는 판단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 결과 스스로의 가치 판단 기준이 사라지고 삶은 위태로워진다. 고뇌의 두려움을 넘어서야 잡념과 허구로 뒤엉킨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불필요한 사념과 집착이 사라져 마음이 빈 경지를 뜻한다. 일상의 생각이란 그만큼 복잡하고 번거로우며 이해와 시비의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잡념이 사라진 상태가 무념무상의 경지이다. 이웃에 대한 절대적 사랑이나 생명에 대한 자비심은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여러 종교의 수행은 그 경지를 목표로 삼고 있다.

무념무상과 비슷한 철학용어로 판단중지(判斷中止, Epoche)가 있다. 판단이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를 중지해야한다는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이다. 사물의 본질과는 무관한 다양한 판단으로 인해 불필요한 혼란이 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즐겁게 팽이놀이를 하는 어린이는 그 팽이의 재질이나 값어치나 놀이의 의미를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몰입과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판단이나 사물에 대한 분석적 이해 또는 깊은 생각이 불필요하다는 비약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성자(聖者)도 철인(哲人)은 물론 바보도 아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뇌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소위 생각 없는 사람이 된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다는 이야기다. 옳고 그름, 좋고 싫음,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다. 성인의 무구함이 아니고 생각 없음이 깊어지면 극단적 사이코패스 또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 소시오패스, 치매의 경지에 닿을 수 있다. 생각은 중요하고 깊은 사유는 반드시 필요하며 고뇌할수록 윤리적 삶에 가깝게 다가설 것이다.

학습이란 판단의 기준을 배워가는 일이다. 더러 집단의 가치관과 도덕을 주입하는 부작용은 있을 수 있으나 공부를 통해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갈까를 배워가게 된다. 어떤 이는 그 결론으로 박애(博愛)를 목표로 삼기도 하고, 누군가는 경제적 성취나 사회적 성공을 최고 가치로 삼아 살아간다. 대부분은 개인적 욕망과 도덕적 가치를 적당히 섞어 삶의 좌표로 삼는다. 그런데 그 적당함이 언젠가 무너지는 시기가 온다. 왜 사는 것인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혼란과 갈등이 닥친다. 때에 맞게 가졌어야할 고민과 생각이 생략된 채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생각 없음은 시장에 나가봐도 쉽게 볼 수 있다. 옷가게엔 드라마 주인공이 입었던 옷임을 광고하고 있고, 악세사리 하나에도 유명인의 이름과 사진이 걸렸다. 자기에게 어울리는지를 생각하기보다 누가 입었던 것인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됐다. 그렇게 수백억 수천억의 시장에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몰린다. 값비싼 등산복이 고등학교 교복처럼 유행하고, 또 그 유행의 거품이 꺼지자 반값에도 팔리지 않는다. 세상은 자신의 옷을 입기보다 남과 다르지 않게 살 수 있기를 꿈꾼다. 아마 허상 속의 우상이 지옥으로 간다면 다들 따라 갈 판이다.

실제로 그런 세태를 교묘히 주도하는 세력이 있다. 세상과 사회와 사람들의 신념을 좌지우지하려는 이들.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그들의 수단은 미디어(Media)다. 쏟아내는 오락거리를 통해 통속적인 위안을 주고 상품을 광고하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은밀하게 끼워 판다.

뉴스는 세상을 이해하는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기보다 불안과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 신문과 방송만을 보고 있자면 세상이 왜 진작 망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미디어가 만든 판단과 생각을 받아들인다.

어느새 일개 기업의 흥망은 공동체의 일로 치부되고 있다. 언론에 돈을 쥐어주고 그렇게 말하도록 시켜왔다. 정치는 자기 이익을 대변하는 장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 대한 미움의 표현이 되고 말았다. 실체 없는 가공의 무리를 미워하고 공격한다. 권력을 나눠주며 그리하도록 이끌어왔다. 나찌와 전체주의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기술은 점점 세련돼가고 교묘해졌다.

미디어, 특히 언론의 죄악은 그들이 전면에서 세상을 좌지우지해왔기 때문이다. 한때 진실의 기준이며 사실의 전달자였던 언론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다. 초라한 가면조차 벗어던졌다. 이해관계의 중립자가 아니라 이익의 당사자가 되어 사실을 호도하고 진실을 은폐한다. 그들의 가장 큰 패악은 사실과 거짓을 뒤섞어놓아 더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들이 보여주는 대로 따라간다. 이유는 단 하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착을 떠난 무념무상이 아니라 생각 없이 사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저 남과 다르게 사는 일을 두려워한다.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 텔레비전 속에 나오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며 산다. 생각이 없으니 행복해졌을까.

몇 해 전 티베트국립불교학연구소(IBD, Institute of Buddhist Dialectic)의 학승에게 어떤 공부가 가장 어려운지를 물어 보았다. “생각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많은 경전과 책을 외우는 것 보다 내 힘으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가장 힘들다” 의외였지만 수긍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힘을 갖기 위해서다. 고뇌와 번민을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의 어려움을 넘어야 잡념에 뒤엉킨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스스로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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