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피플이 되지 않는 법

 
지하철 객실에 올라 둘러본다. 형광등 아래 수 없이 떠 있는 얼굴빛은 하나같이 시체 빛이다. 눈언저리만 천연색의 반사광에 번득인다. 도대체 몇 명이나? 하나, 둘, 셋 두 자리 수에 접어들며 헤아리기를 포기한다. 너무 많다. 신문을 읽고 있는 한 인간 그리고 이제 막 책을 꺼내려는 나란 인간, 단 둘을 제외하곤 객실 안은 그들뿐이다. 스마트폰에 잠식당한 우리네 현실을 우회적이지만 섬뜩하게 돌아보게 하는 소설, 스티븐 킹의 ‘셀 Cell’은 2006년경 중앙도서관에 제 자리를 잡았다.

천부적 이야기꾼이라는 작가의 명성 탓에 잠깐 동안 인기도서란을 차지했을지 모르지만, 근래 4-5년간은 찾는 이 없어 버려진 ‘외톨이 책’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장르문학을 다소 경시하는 국내 풍토도 이유겠으나, 무엇보다 작가에게 늘 따라붙어 소수 마니아층의 읽을거리라 편견을 갖게 하는 ‘공포소설의 제왕’이라는 수식 탓도 없지 않다.

아무튼, 이 외톨이 책을 다시 들춰보자는 이유는 무얼까? 엄밀히 말하자면 ‘셀 Cell’에는 스마트폰이 등장하진 않는다. 주로 인간의 ‘시각’을 소진하는 스마트폰(smart phone)이 아닌 ‘청각’에 의존하는 셀룰러폰(cellular phone)이 대상이니, 펄스라는 인류대재앙이 보는 것이 아닌 듣는 전화통화행위를 통해 발발하는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 클레이튼 리델이 보스턴 공원 근방에서 목격하는 펄스의 시작, 즉 전화통화음에 감춰진 특정 신호가 인간의 뇌를 말끔히 지워버려 발생하는 재앙을 생생히 전하며 시작한다. 뇌가 포맷되어 원초적 광기에 사로잡힌데다 초능력까지 겸비한 절대다수 ‘폰피플 무리’에 맞서며 아들의 생사확인을 위해 떠나는 고단한 여정길이 펼쳐진다.

셀룰러폰이 재앙의 근원이 된다는 발상에서는 기술 지향적 문명발전에 대한 의구심을 떠올려보거나, 이성이 지워진 폰피플의 잔악한 행태 속에서 인간정신의 근원을 짐작해 볼 수도 있을 테다. 참혹하게 그려낸 스티븐 킹 식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암울해할 수도, 단순히 인간과 좀비 간의 흥미로운 한판 대결을 즐겨볼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셀 Cell’이 울림을 갖는 부분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접하게 되는 일상에 대한 돌아봄에 있다. 어떤 책이 자신과 사회, 사상 등에 대한 돌아봄을 담고 있지 않겠냐마는, 그 대상이 그저 고개만 들면 접하게 되는 더군다나 일체의 고민 없이 습성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네 일상이라면 울림의 여파는 남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셀룰러폰으로 나누는 전화통화가 생소하던 때를 넘어서, 스마트폰에 코 박고 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 행위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이전에 마치 들숨날숨을 내쉬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 버렸다. 나서서 경고하는 이 하나 없기에 자연스럽게 그리 되어 버렸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펄스와 같은 파괴적인 대재앙까진 아니더라도 이 집단 전염병의 결말엔 무언가 흉측한게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짐작되지 않는 그 파국을 피해가기 위해서 스마트폰 들여다보기를, 전화통화하기를 삼가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극소수가 되겠지만 인간의 본성을 유지하고, 살아남은 자만을 위한 집결지에 모이기 위해서라도 들고 있는 그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 한 권을 펼쳐보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셀룰러폰과 스마트폰은 다르지 않냐 는 지적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아무튼 오늘도 나는 지하철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예비 폰피플 무리’ 사이에서 책을 읽거나 멀거니 사색이라도 즐길 테다. 책이라도 없다면 두 손은 어느 순간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더듬고 있을 테니 여러분들도 지금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와 책 한 권 챙기길 바란다. 폰피플이 점령한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