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압과 봉건적 권위에 저항

中國(중국)은 中國(중국)인의 中國(중국)旗幟(기치)들고
절박한 現實打開(현실타개)로 끝나

  5ㆍ4운동은 中國(중국)의 學生運動(학생운동)을 대표하며 나아가 그것은 근대세계의 學生運動(학생운동)사상 규모에 있어서나 한民族國家(민족국가)의 歷史(역사)를 劃期的(획기적)으로 발전시킨 推進力(추진력)에 있어서 그 類例(유례)를 찾기 힘들다.
  5ㆍ4學生運動(학생운동)은 단순한 하나의 學生運動(학생운동)이 아니다. 弱小民族(약소민족)의 일원으로서 帝國主義(제국주의)侵略(침략)자의 侍女(시녀)화 내지 諜者(첩자)화할 것을 끝내 거부하고 분연히 일어선 民族的(민족적) 抵抗運動(저항운동)이다. 이는 마치 도도히 흐르는 냇물과 같아서 그 이전까지 있었던 洋務運動(양무운동)ㆍ維新運動(유신운동)ㆍ義和團運動(의화단운동) 등을 포함하는 산만하고 多岐(다기)한 민족운동의 支流(지류)들을 모두 흡수하였다.
  그것은 또한 민족운동인 동시에 文化革命(문화혁명)이다. 이 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 陳獨秀(진독수)의 말과 같이 “奴隸的(노예적)ㆍ保守的(보수적)ㆍ退嬰的(퇴영적)ㆍ鎖國(쇄국)적ㆍ虛文(허문)적ㆍ空想的(공상적)” 인 것을 배격하고 “自主的(자주적)ㆍ進步的(진보적)ㆍ進取的(진취적)ㆍ世界的(세계적)ㆍ實利的(실리적)ㆍ科學的(과학적)”으로 中國(중국)인의 封建的(봉건적) 思考方式(사고방식),生活方式(생활방식)을 뜯어고치는, 말하자면 精神改革(정신개혁)運動(운동)이었다. 5ㆍ4문화혁명이라 부르는 所以(소이)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5ㆍ4운동의 意義(의의)는 두 가지의 내용 즉 外壓(외압)에 대한 民族的(민족적) 抵抗(저항), 그리고 封建的(봉건적) 權威(권위)에 대한 新世代(신세대)의 挑戰(도전)으로 규정 되는 바 당시 中國(중국)의 歷史(역사)적現實(현실)을 직시하는 한 그것은 中國(중국)民族(민족)의 소망의 전부임을 알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 운동의 성격을 보다 명료하게 理解(이해) 把握(파악)하기위하여 먼저 그 時代的(시대적) 背景(배경)을 살피고 登壇(등단) 및 經過(경과)를 개관해보아야 할 것이다.
  1914년 ‘발칸’半島(반도)에서 들린 한방의 총성은 中國大陸(중국대륙)으로부터 列强帝國主義(열강제국주의)자의 침략을 잠깐 멈추게 했다. 이 기회를 재빨리 포착한 日本(일본)은 聯合國(연합국)에 합세, 對獨宣戰(대독선전)을 함으로써 中國(중국)에 있어서의 獨逸(독일)勢力(세력) 범위인 膠(교)州(주)灣(만)ㆍ靑(청)島(도)를 자기 몫으로 하는데 성공하고 다시 中國(중국)을 半植民地(반식민지)화하는 소위 21개條(조) 제출하여 袁世凱(원세개)정부로 하여금 强制(강제) 承認(승인)케 하였다.
  한편 中國(중국) 內部事情(내부사정)은 분열을 極(극)하여 袁世凱(원세개)의 帝制運動(제재운동), 張勳(장훈)의 復辟運動(복벽운동)에 이어 北方(북방)軍閥(군벌)攻防(공방)時代(시대)를 연출하고, 南方(남방)에는 孫文(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非常國會(비상국회)가 열림으로써 南北(남북)이 대립하고 그것은 다시 南(남)은 남, 北(북)은 북으로 分裂相(분열상)은 爭(쟁)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西洋(서양)列强(열강)의 침략이 완화된 틈을 타 中國(중국)의 資本主義(자본주의)는 步(보)登(등)展(전)하게 되고, 그것은 상대적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無産階層(무산계층)의 힘을 육성시킴으로써 5ㆍ4운동의 社會經濟的(사회경제적) 기초를 마련케 된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와 같이 안으로는 對立抗爭(대립항쟁)을 極(극)하고 밖으로는 日帝侵略(일제침략)의 격화는 歷史發展(역사발전)에 ‘브레이크’를 가하는 듯 하였으나 새로운 社會經濟的(사회경제적) 成長(성장)외에도 일부 進取的(진취적) 先覺者(선각자)의 등장은 中國歷史(중국역사)를 암흑에서 光明(광명)에로 이끄는 媒介者的(매개자적) 存在(존재)가 된다. 北京大學(북경대학)의 機關紙(기관지) ‘新靑年(신청년)’을 中心(중심)으로 모인 陳獨秀(진독수) 胡(호)適(적) 李(이)大(대)劉(류) 魯(노)邊(변)등이 그들이다. ‘新靑年(신청년)’은 계몽사상지로서 全國(전국) 靑年(청년) 學生(학생) 및 一般(일반)知識人(지식인)에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바 그것은 두 가지 점 즉 하나는 科學(과학)과 民主主義(민주주의)의 제창이요 다른 하나는 白話文運動(백화문운동)이다.
  이러한 啓蒙的(계몽적) 役割(역할)은 全國(전국)各處(각처)에 새思想(사상)을 담은 新聞(신문), 雜誌(잡지)등이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게 하여 民衆(민중)의 自覺(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革新力(혁신력)의 성장을 저해하는 保守陣營(보수진영)은 어느 사회고 존재한다. 買升(매승)軍閥(군벌)政權(정권) 및 그 追從者(추종자)는 學院彈壓(학원탄압)을 가하여 1919년初(초) 北大學長(북대학장) 菜元培(채원배)와 文科科長(문과과장) 陳獨秀(진독수)를 물러나게 한 이른바 北京(북경)大學(대학)事件(사건)이 발생하였다. 1919년初(초)의 일이다.
  이 무렵 또 國外(국외)에서 學園(학원)을 자극하는 報道(보도)가 속속 들려왔다. ‘러시아’ 10月(월)革命(혁명)을 비롯하여 ‘터키’ ‘이질’ 및 우리나라의 3ㆍ1운동 등 弱小民族(약소민족)의 獨立運動(독립운동)에 관한 소식과 美國大統領(미국대통령) ‘윌슨’의 民族自決(민족자결)原則(원칙)의 발표는 救國一念(구국일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에게 무척 고무적이었다. 1918년 日本(일본)은 中國(중국)으로 하여금 러시아 軍政權(군정권)을 파괴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편의를 제공해야한다는 內容(내용)의 ‘日華(일화)共同防衛(공동방위)軍事協定(군사협정)’이라는 密協約(밀협약)이 체결되었는데 이것이 中國(중국)의 日本(일본) 留學生(유학생)들간에 알려지자 즉각 그들은 抗議集會(항의집회)를 개최하는 한편 學業(학업)을 포기하고 급거 귀국하여 北京學生(북경학생)들과 합세, 全國的(전국적) 學生(학생)組織(조직)에 착수하게 된다.
  한편 1919년 초부터 파리義和會議(의화회의)에서 소위 二十(이십)一(일)個條(개조)를 위시한 中國(중국)측의 요구가 완전히 묵살되자 駐佛(주불) 파리留學生(유학생)들은 그에 抗議(항의)하는가하면 그 소식이 本國(본국)에 전해지자 全國(전국)의 국민을 분노의 도가니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歷史的(역사적)인 5월 4일 아침 北京大學(북경대학)을 중심한 學生(학생) 五十(오십)여명은 擧國的(거국적) 反帝(반제)民族運動(민족운동)의 횃불을 들게 된 것이다. 그들은 ‘中國(중국)은 中國(중국)인의 中國(중국)이다’ ‘二十(이십)一(일)個條(개조)를 廢止(폐지)하자’ ‘파리義和條約(의화조약)을 拒否(거부)하자’ ‘밖으로 國權(국권)을 찾고 안으로 國賊(국적)을 타도하자’ 는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市街行進(시가행진)에 들어가 總統部(총통부)에 대한 請願(청원)과 日本公使館(일본공사관)에 대한 示威(시위)를 하기도 하였으나 경찰과 충돌하자 對日(대일)賣國奴(매국노)의 邸宅放火(저택방화)와 毆打(구타) 등 暴力行事(폭력행사)로 突變(돌변)하였다. 示威(시위)도중 수십 명의 학생이 체포되고 北(북)大學生(대학생) 1名(명)이 死亡(사망)하자 학생 측은 組織的(조직적) 計劃的(계획적) 大衆運動(대중운동)으로 方法(방법)을 定(정)하고 곧 北京(북경)中等學校(중등학교) 以上(이상)의 學生(학생) 聯合會(연합회)를 結成(결성)하고 學生代表(학생대표)들은 京鄕(경향)相互(상호) 연락하여 6月(월)16日(일) 上海(상해)에서 全國學生(전국학생)聯合會(연합회)가 발족되었다.
  이리하여 全國(전국)의 학생들은 都市(도시)나 農村(농촌) 방방곡곡에 救國運動(구국운동)의 선풍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대한 광범한 民衆(민중)의 同情(동정)과 지지, 賣國外交(매국외교)에 대한 분노는 燎原(요원)의 불길처럼 全國(전국)에 만연되어 급기야는 商人(상인)의 罷市(파시), 勞動者(노동자)의 罷業(파업)등의 有産(유산), 無産階級(무산계급)의 積極的(적극적) 參與(참여)로서 擧國的(거국적) 民衆運動(민중운동)으로 擴大(확대)되었다. 
  이에 당황한 政府(정부)는 탄압수단을 버리고 學生要求(학생요구)에 응하여 賣國(매국)巨頭(거두) 三人(삼인)을 파면하고 ‘파리평화조약’ 조인을 취소할 것을 약속하고, 6월 28일에는 그 뜻을 世界(세계)에 通告(통고)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學生運動(학생운동)은 여기서 그 集中的(집중적) 要求(요구)가 관철되어 일단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5ㆍ4運動(운동)의 발전에 따라 新文化運動(신문화운동) 또한 海浩(해호)와 같이 전국의 民衆(민중)속으로 스며  들었다. 비록 이를 계기로 하여 社會主義(사회주의)勢力(세력)이 현저히 대두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胡適(호적)을 대표로 하는 民主主義(민주주의)를 옹호하는 靑年學生(청년학생)들은 당시의 新思想(신사상)인 존ㆍ듀이의 實用主義(실용주의)哲學(철학)을 내세우고 議會政治(의회정치)를 내세움으로서 一般(일반)大衆(대중)은 白話文使用(백화문사용), 舊禮敎(구예교)의 反對(반대), 新思湖(신사호)의 紹介(소개)等(등)에의 한 新文化(신문화)創造(창조)에의 탄탄대로가 개척되게 된 것이다.
(四(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學生(학생)들이 내건 ‘中國(중국)은 中國(중국)인의 中國(중국)’이란 平凡(평범)한 眞理(진리)앞에 知識人(지식인) 商人(상인) 勞動者(노동자)등 各界各層(각계각층)은 階級(계급)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擧國的(거국적) 大衆運動(대중운동)으로 발전, 승리의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며 대중운동의 승리는 孫文(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다음단계의 革命(혁명)勢力(세력)으로 하여금 그 可能性(가능성)을 시사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5ㆍ4運動(운동)을 통하여 그들 학생은 知性(지성)과 젊음과 주어진 조직을 百分(백분) 驅使(구사)하였다. 그들의 知性(지성)은 中國(중국)의 公職(공직)을 ‘밖으로는 帝國主義(제국주의), 안으로는 封建主義(봉건주의)’로 規定(규정)하고 그에의 抵抗(저항)에 젊음과 조직을 아낌없이 불태웠다. 어느 學生運動(학생운동)도 그렇듯이 그들이 이 운동을 추진해, 나감에 있어 未來(미래)보다 現實(현실)이 더욱 중요하였다.
오직 절박한 현실을 타개해 갔을 뿐이다. 外壓(외압)의 抵抗(저항)과 權威(권위)에의 반항 그것만이 그들이 意識(의식)한 使命(사명)의 전부였기에 그 履行(이행)은 그들이 취할 唯一(유일)한 方法(방법)이요 그 自體(자체)는 곧 目的(목적)이었다. 여기에 5ㆍ4學生運動(학생운동)의 歷史(역사)성이 內在(내재)하며 이것이 또한 中國(중국)의 歷史(역사)를 발전적으로 추진한 原動力(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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