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자유화투쟁에서 비롯

戰後(전후) 大衆性(대중성)ㆍ政治(정치)色彩(색채) 농후하고
反美(반미) 鬪爭(투쟁)에까지 번지기도

一(일), 戰前(전전)
  일반 성인층이 시민혁명을 성공시켜 근대사회의 발걸음을 내디디거나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학생들이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 속에 뛰어 들어야할 막중한 사명을 띠게 된다.
  영광스러운 사명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커다란 희생을 가져 오기도 한다. 일본에서도 학생운동은 사회개혁을 위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는 후진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일본의 대학생의 정치 참여의 활동은 대학자유수호운동 대학자치의 운동과 긴밀히 결합되어 발전해 내려왔다.
  대학은 학생들의 학문의 조국이다. 학문의 조국을 수호하는 투쟁이 그들의 조국을 수호하는 운동에로 연결된다. 그 점에서 한국학생운동과는 약간의 차이가 엿보이는 듯하다.
  일본의 대학은 본래 국가발전의 지적 원동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국가권력과 영합하여 그 시녀로서 봉사했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을 거쳐서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결부되어 제국주의의 교활한 모방자로 나서게 될 무렵부터 대학은 국가권력과 대립하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독자적 위치와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귀결으로 일본은 세계 제국주의자의 대열에 넓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따라서 대학은 더욱더 그 자치를 위해 국가 권력과의 날카로운 대립, 항쟁의 마당에로 나서게 되었다.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일본에는 공산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쳐 왔으며 학생운동도 역시 그러한 색채를 띠게 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대륙에의 침략을 도모하려는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은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하기 이전까지 국내 사상통일을 한 정지작업을 거의 깨끗이 끝마치었다.
  공산당은 지하에 숨었다가 다시 그곳에서 숨을 못 쉬게 되어 일망타진이 되었다. 남아있는 소수의 지식인이 이른바 지식의 사양족으로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자기네들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서글프게 느끼었다.
  군부가 영도권을 잡은 정부는 자유주의자의 최후의 한사람까지 적발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톨스토이의 ‘카츄사’에 나타난 형법이론을 강연했다는 죄목으로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 경도제대 법학교수 ‘다끼가와사건’, ‘파시즘’과 ‘마르키시즘’을 동시에 배격하면서 암흑 속에 자유주의의 등불을 한 개라도 비추어 주려고 하던 동경대학 사회정책학교수 ‘가와이교수 추방’ 등으로 학원 내에서 자유주의는 완전 소멸되었다.
  ‘다끼가와’교수 파면으로 반발한 경도제대 사건 때 법학부교수의 총퇴진으로 문교부당국의 탄압에 맞섰던 대학자치의 정신, 이에 동조한 학생들의 운동은 오늘날 대학 및 학문의 자유를 위한 교수 및 학생의 공동투쟁의 아름다운 투쟁의 기록으로서 일본에서는 중고등학교 일반사회 교과서에서 사진까지 넣어서 해설되고 있다.
  대학 및 학문의 세계에서 자유의 등불이 꺼져버리려고 할 때에 그것을 되살리면서 학생들에게 정신의 고향을 안겨주려고 발버둥질 치던 동경대학 ‘가와이’교수의 추방은 곧 일본에 있어서 대학의 자유의 막이 굳게 닫혀지던 그날이었다. 관념철학의 독단론을 배척하면서 넓은 시야에서 철학의 방향을 모색하던 경도대학 ‘니시다’박사의 門下生(문하생)중 뛰어난 수재였던 ‘미끼 기요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문학평론을 거쳐 나중에는 古典(고전) ‘휴머니즘’에로 복귀하여 ‘니시다’철학을 정확히 해석하여 지식인의 가슴에 삶과 지혜의 양식을 공급하여 군부독재의 암흑기에 신호등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해방 전에 검속되어 유치장에 구류된채 방치되었다가 해방 후 얼마 안 되어 옥사하였다. 일본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의 한 표본이 아닐 수 없다.

二,(이) 戰後(전후) 
  그러나 암흑은 언제까지나 암흑대로 버틸 수는 없다. 태양은 다시 떠오르는 법이다.
  해방이 된 것이다. 고귀한 지성인들의 희생을 추도하는 구슬픈 만가 속에서 광명을 향한 의지의 물결은 치솟기 시작했다. 젊은 사자들은 다시 대학의 자유를 지킬 방어진을 튼튼히 구축했다.
  戰前(전전)엔 공산주의적 색채를 띤 학생운동의 막이 닫힌 뒤에 자유주의적인 그것이 뒤를 이어 시대적으로 선후로 계승되었던 것이 戰後(전후)에는 그 두 갈래의 운동이 동시적으로 병행해 나서게 되었다. 더구나 戰前(전전)에는 일본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국가의 대열에 끼어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식민지적 백성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적 색채를 가진 학생운동의 물결을 더욱 발전시키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1948년 9월에 ‘젠가꾸렌’이 결성되어 美日(미일)안보조약에 대한 반대투쟁, ‘아이크’ 일본방문반대 등 노골적 反美(반미)운동에로 번져갔다.
  1933년에는 대학자치의 ‘심벌’처럼 평가되었던 경도대학 ‘다끼가와’교수는 해방 후 경도대학에 복귀되어 나중에는 총장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도대학에 천황이 방문했을 때 천황을 못나가게 길을 막고 데모를 한 데모학생들의 세계관으로 볼 때 과거의 ‘다끼가와’교수는 이미 보수주의자로 보이었고 과격한 학생들이 ‘다끼가와’ 총장을 구타한 형사문제가 생기어 총장은 학생들을 고소하여 그들을 철창에 가두게 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학생운동이 戰前(전전)ㆍ戰後(전후)에 뚜렷한 ‘이데올로기’적 변모를 체험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주는 사건으로 흥미가 있다.
  1950년대에는 민족독립, 전쟁반대 등의 정치적 성격을 띤 학문자유 및 학원자치를 구호로 하던 학생운동이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나가와’사건, 원ㆍ수폭실험반대투쟁을 중심으로 더한층 政治性(정치성)을 농후하게 띠게 되었다고 월남전쟁의 가열화 양면 외교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 한일국교정상화 등을 고비로 일본정치의 방향이 동요를 보이기 시작하자 혁신계 학생운동은 그 단말마적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1970년의 ‘미ㆍ일안보조약’ 개정을 향한 반대 투쟁에 더욱 가열한 양상을 첨가해 갈 것이다.
  한편 근대정치는 대중정치로 전환된 까닭에 학생운동도 이에 적용하게 되었다. 초기의 소수의 엘리트운동의 성격은 오늘날 이미 시대착오적이라고 배척되고 대중정치 시대에 적용키 위해 대중운동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허나 금년 2월 11일 해방 후 처음으로 건국 개천절을 기념했으며 이것은 국가주의 사상의 발전을 암시하며 학생운동의 앞날에 또 하나의 먹구름장이 밀려오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동양평화의 구호는 또 다시 살아올 것이며 국가주의의 재생을 구실로 충분히 작용할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을 신앙처럼 믿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구체적 경우 그러한 경우가 역사상에서 흔히 있었다. 일본이 동양에서 국가적 힘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국내에 있어서 사상과 그 실천의 양면에서 행동통일의 정비가 요구된다. 그런 방향에의 신호가 곧 개천절의 복귀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대학자치와 학문의 자유를 기점으로 싸워져온 일본의 학생운동이 다시 살아날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 앞에서 어떠한 투쟁방안을 세울 것인지 흥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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