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부 당선작


  파아란 하늘이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빠끔히 열려 있다. 경이는 아까부터 텅 빈 교실 한구석에서 무엇인지 썼다가는 찢어 버리고 또 다시 쓰는 것을 되풀이 한다. 책상위엔 구겨진 휴지 조각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에이, 개 아니면 친구가 없는가베, 나도 친구는 많단 말여. 그만 둘까부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자꾸만 경이의 마음을 괴롭히지만, 경이의 손은 재빨리 종이위로 간다.
  첫 강의 지리한 수학시간을 끝맺고 쉬는 시간을 알리는 두부 종이 요란히 울린다.
  저쪽 편의 미애를 보니 자리는 뜨지 않고 엉킨 털실을 열심히 풀고 있다. 아마도 오늘 수예 시간에 손가방을 뜰 실인가 보다.
 (그 궁뎅이 정말 되게 무겁네. 은제 변소에 가려구 저러지? 씽, 오늘도 못 주겠구만)
  반에서 호박이라고 불리는 경이의 땡그란 얼굴에 울컥 화가 치민다.
  서울에서 새로 편입해 온 미애가 어쩐지 경이는 사귀고 싶었던 것이다. 벌써 며칠 전부터,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망설이던 편지에는 경이의 땀이 밴 손때가 까맣게 묻어있다. 변소에 가면 쫓아가서 주려는 경이의 애타는 마음을 미애는 어쩌면 그렇게도 몰라줄까. 야속하기만 하다. 생전 물이란 것은 먹지도 않는지 변소에 가는 적이 별로 없다.
  가늘게 째진 미애의 눈이 점점 그 윤관을 잃어가는 졸린 오후. 창 너머로 훤히 보이는 아스팔트 거리도 크게 하품을 하는 듯 하다.
 “강 미애!.”
  아까부터 눈에 불을 켜고, 누군지 무섭게 노려보던 쥐방울 선생이, 드디어 탁한 목소리로 조용한 교실을 흔들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미애는 깜짝 놀라 토끼눈을 해 가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조냐? 그 쬐그만 눈이 아주 없어지면 우쩔려고....”
  한쪽으로 몰린 시골 아이들의 눈망울들이 한꺼번에 폭소를 터뜨린다.
  파랗게 보이는 칠판위엔 어느새 허연 백묵글씨로 가득 차 꿈틀 거린다.
  얼굴이 빨개 가지고 고개를 떨구는 미애가 어쩐지 딱한 생각이 들은 경이는 소리를 꽥질렀다. 왠지 딱한 생각이 들은 경이는 소리를 꽥 질렀다. “선상님이여! 좀 날씨가 더워서 그러는디 뭘 그러시기요 좀 봐 주이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자신도 모를 지경이다. 쥐방울의 심술덕이 웃을듯 말듯 씰룩거리더니, 이내 까만 눈썹을 무섭게 치뜨면서 소리를 지른다.
“뭐라꼬! 선상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여. 고얀놈 같으니… 너희 둘은 다 복도에 나가서 바깥이나 감상햇.”
  떠들썩하던 교실 안이 갑자기 잠잠해진다. 이거 잘 됐구만 그려. 히히, 이런 때 편지를 주지은제 줘.
  미애와 같이 나란히 벌을 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다. 다 떨어진 운동화 늘 질질 끌면서 경이는 태연하게 복도로 나간다. (아이, 챙피해, 잰 어쩜 저렇게도 비위가 좋을까.)
가득 들은 눈물을 삼키려고 애를 쓰며 미애는 억지로 낭하로 나왔다. 자기들만을 바라보는 아이이 얄밉기까지 하다. 저쪽에서 쭈그리고 서 있는 경이가 기다렸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던진다. “애........., 내 옆에 스거레이. 우리 더운데 애기나 하재.”
  경이가 치맛자락을 끄는 바람에, 미애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경이의 옆에 선다. 아직도 시간이 끝나려면 멀었나 보다. 교실에선 가끔 가다가 아이들의 합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와 고막을 울린다.
 “난 졸려서 혼났데이. 니도 그렇재? 저놈의 쥐방울 선생 꼴도 보기 싫데이.” 때묻은 경이의 손이 슬그머니 미애의 손을 꼭 잡는다. 경이의 손이 뜨거워서인지, 미애의 손은 유난히도 차가운 것 같다.
  미애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경이의 빨개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쩐지 마음이 흐뭇하다. 가끔 가다 애들을 잘 웃기는 경이가 처음부터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미애는 생각해본다. 주머니 속에 들어간 경이의 손이 자꾸 움직이는 걸 보면 무엇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것 같다. “내가 말여, 이 편질 줄 테니까 이따가 변소에 가서, 너 혼자만 봐라, 잉. 꼭 너만 봐야 한대이.” 며칠간을 주머니에서 지낸 편지가 오랫만에 주인을 찾는 반가운 광경이다. 새카만 때도 아랑곳 없이 미애는 속의 궁금하기만 하다.
  다시 경이는 주머니 속에서 까맣게 그을린 누룽겡이를 꺼내더니 “딱!”
 소리를 내면서 반으로 가른다. “이거 묵으라. 고소 할끼다. 히히-”
 미애의 입에 누룽겡이 한 조각이 들어가면서, 고소한 맛이 고른 치아 속으로 스며든다. 볼을 재빨리 움직이며 맛있게 먹는 경이를 보면 누구든지 군침을 삼킬 만 하다.
  요란한 종소리가 노랗게 졸고 있는 오후를 깨워 준다. 교실 문이 삐걱 열리며, 방울 선생이 요란하게 슬리퍼를 끌며 둘 앞으로 다가선다.
 “니네들, 내가 마음이 좋아 특별히 봐 준데이. 다음부턴 절대 조심해 알았재?”
  허연 침이 마구 미애의 머리카락에 이슬처럼 매달린다. 키 큰 소나무가 열을 지은 노란 황톳길을 걷고 있는 미애의 입가에선 자꾸만 기쁜 웃음이 흐른다.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도 느끼지 못하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아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본다.
“미애야, 난 네가 참 좋아. 나 너랑 사귀어도 되겠지. 우리 앞으로 영원한 친구가 되자. 네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비록 내 얼굴이 못난이 같기는 해도 사귀어 보면 그렇지도 않아. 미애야! 앞으로 너한테서 화려한 서울애기도 듣고 싶어. 우리 앞으로 진실한 우정을 나누자.”
  코를 찌르는 변소의 고약한 냄새도 아랑곳없이 기쁜 가슴을 억누를길 없어 연방 웃던 편지의 내용. (나는 이제 다정한 친구가 하나 생겼어. 앞으로 진실한 우정을 나누어야지. 경인 참 좋은애야.) 동전처럼 동그란 경이의 익살스런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멀리서 경이가 미애를 부르는 것만 같아, 지나온 산길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어디선지 알 수 없는 새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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