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부 가작이석


  커튼 자락을 비집고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노란 색깔의 커튼이 달빛을 빨아들여 더욱 밝고 포근한 느낌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나뭇가지가 그 위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고 그것은 거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귓전을 간질일 때, 그것들은 균형을 잃고 난무했다. 바람이 잤다. 창가에 비친 나뭇가지들은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숙(淑)은 유리창으로부터 시선을 떼었다. 벌떡 일어나 창 앞으로 다가선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커튼을 젖히고 유리창을 힘주어 밀었다. 드르륵하는 소리가 제법 날카롭게 귓전을 후렸다. 이어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바람이 얼굴과 목에 부서졌고, 그래서 숙은 어느덧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센티’한 생각 의에 찢기는 듯한 가슴을 읽어야했다. 거의 원에 가까운 달이 숙의 그런 감정을 더욱 강한 힘으로 불어 넣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숙은 어느덧 아주 먼 옛날 애기 같은 기억 속으로 말려들어 갔다. 그러면서도 몇 시간 전의 일이 왜 아주 먼 옛날 애기 같이 느껴지는 지는 도시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기억을 모았다.
  오늘도 淑(숙)은 영희(英熙)와 같이 지냈다. 그런데 같이 지낸 것이 딴은 그들에게 커다란 불행을 수반했다.
  숙과 영희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어깨를 맞대고 같이 앉았다. 언제부터인지 숙과 영희는 학급 친우들에게 <한쌍>으로 변신을 했고 특히 <미상록>내에서는 남편과 아내로 불렸다. 숙이 남편이고 영희가 아내였다. <미상록>은 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들이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하여 모여진 단체였다. C여고에서는 숙과 영희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숙이 영희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미상록>에 들어가고부터였다. 숙이 C여고에 입학한지 이틀이 되던 날 점심시간에 삼학년 학생들이 숙이네 교실에 들어왔다. 그중 한 학생이 능숙한 말솜씨로 교단에서 <미상록> 소개를 했는데 무척 좋은 곳이라고 그림 공부를 하려면 언제든지 자기를 찾아오라는 것이 그가 입술에 올린 말의 전부였다.
  그날로 숙은 삼학년 언니를 찾았고 그 이튿날 열리는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숙은 영희를 알게 되었다.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점에서 무척 반갑기도 했지만 영희의 그 예쁘장하고 무엇을 찾는 듯한 서글서글한 눈매가 그의 마음을 끌어 더욱 다정한 기분이 되었다. 그날부터 숙은 영희네 집을, 영희는 숙이네 집을 자기 집 드나들듯 했다. 숙 자신도 그것을 늘 느껴 왔지만 영희는 계집애로서 갖춰야 할 것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게 생긴 것이라든지 가늘고 은근한 목소리 말고도 무엇인가를 찾고자 생각을 더듬는 듯한 눈이 그랬다. 그에 비하면 숙은 너무도 내보일 만한 것이 없었다. 별나게 못생긴 것도 아닌데 탁한 음성, 얼굴에 도사려든 깨알만한 점들-동무들은 농담조로 그것을 파리똥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파리가 앉는 것도 몰랐느냐면서 졸음파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숙을 그늘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숙은 늘 말이 없었고 우울이 침체되어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영희에게만은 그런 표정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 년이 넘도록 둘은 사이를 좁혔다. 때로는 서로의 기분이 이상해져서 말도 않고 떨어져 있곤 했지만 그 상태는 사흘을 넘지 못했다. 서로 이해를 하고 서로 아끼려고 애썼다. 그것은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여자의 본능에서만은 아니었다. 어느 때는 서로 찾아가다가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둘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더욱 뜨거운 정을 전하곤 했다.
  그러던 며칠 전이었다.
  상록에서 미술전시회를 했는데 동인들 모두의 작품을 걸어놓았다. 물론 숙과 영희의 작품도 걸려 있었다. 그림도 영희 것과 숙의 것은 나란히 걸어주었다. 그래서 둘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시장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특히 고등학교 학생들이 더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 둘은 작품 앞을 돌아다니며 약간씩의 설명을 해주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영희에게 말을 건네었다. 같이 손을 잡고 다녀도 그들은 꼭 영희를 상대로 얘기하곤 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그런데 숙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되어가는 것을 의식했다. 갑자기랄 것도 없지만 여하튼 숙의 마음이 이상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정말 숙은 자기의 작품이 영희의 것만 못하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영희의 작품 앞에서 더 많은 얘길 했고 암시적으로 더 낫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숙은 그것을 영희의 얼굴을 봐서 그러는 것일 거라고 속단해버렸다. 전시장 문이 닫힐 때 까지 숙은 영희에게 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숙은 뒤로 영희의 발걸음을 의식하면서도 계속 침묵을 끌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뱉듯 던진 말은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영희야, 오늘은 그냥 돌아가줘!”
하고 그 자리를 뛰다시피 빠져왔다. 그리고 어디론가 계속 달렸다. 영희의 그림자가 까맣게 멀어진 곳에서 숙은 가쁜 숨을 몰았다.
  숙은 창문을 닫았다.
  눈에는 이슬이 빛을 냈다. <따지고 보면 영희에겐 아무 잘못도 없는데…> 생각하며 이불 위로 벌렁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내일쯤 영희를 보면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 다짐도 해보았다.
 “찌르릉…”
  전종이 울었다. 숙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전종이 울리는 곳에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 벨소리가 고요한 침묵을 깨뜨려서 보다도 어쩌면 영희가 찾아왔을지도 모를 거라는 예지 때문이었다. 벨 소리가 다시한번 울렸고 숙은 문을 박차고 대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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