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부 당선작

  하필 주어진 제목이 돌일까? 돌중에서도 많은 종류가 잇겠지만 나는 깊은 산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벼랑을 이루다 싶이 놓여 있는 바윗돌을 들고 싶다.
  바위-하면 왠지 묵직한 암정감이 찾아든다. 어쩜 그것은 돌의 묵묵함과 무게에서 오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근자에는 그 바윗돌의 일편을 캐내어 마당귀나 혹은 정원에 놓고, 물을 주고 이끼가 자라게 하여 운치 있는 풍경을 즐기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한가하고 여백 있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네의 흐뭇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기야 금강석이나 ‘루비’ ‘사파이어’도 돌이긴 하지만 역시 돌의 제멋이란 한적한 오솔길 사이에 아무렇게나 자연 그대로 놓여 있어서 피곤에 지친 행인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거나 다람쥐들이 뜀박질을 할 수 있는 자연 속에 있는 것 이래야 제멋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해 전에 학교에서 속리사로 가을 소풍을 간 일이 잇다. 그 때 미륵불의 왼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깎아지른 듯 도사린 바위를 보고 감탄한 일이 있다.
  백 육십 센티 가량의 내 키 보다 서너 배는 넉히 될 수 있는 높이였는데 그 바위 위는 묘한 바위들이, 엉겨 붙어 묘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더욱이 나의 눈을 자극한 것은 그 험한 돌의 사이에서 자란 한 그루의 소나무였다. 비록 크고 굵게는 자라지 못했으나 돌에서 자란 이 보잘 것 없는 소나무가 나에게는 어쩌면 그렇게 대견스럽고 신기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돌은 어쩜 생명을 기르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딱딱한 속에서 어쩌면 그런 생명의 꽃이 필까? 나는 한동안을 움직일 줄 모르고 서있었다.
  그 바위돌이 땅 위로 솟아 나오기까지는 지하에서 얼마나 고된 진통을 겪었을까? 실로 바윗돌은 무한한 고통과 진통을 겪다가 드디어는 땅위로 폭발되어 솟은 것이니 그래서 더욱 사람들은 바위의 의지를 또는 묵묵한 침묵을 높이 사주기 위해서 그에 대한 시를 읊고 가사를 짓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윗돌은 굳센 의지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흔히 도를 닦는다. 참선을 한다고들 하지만 꼭 참선의 경지에 들고 싶은 이는 심심산곡으로 들어가 보라. 거기서 그대는 참선의 경지에서 한 치도 뒤지지 않고 천년을 살아온 돌 앞에 설수 있을 지니, 아마도 그대는 거기서 깊은 참선의 경지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햇볕 아래서 있으라면 우리는 단 오 분도 못되어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윗돌은 그 볕을 온 종일 받아들여 자신을 활활 태우고, 그리고는 식혀버리고, 이 짓을 반복한다. 마치 숙명인양.
  우리 사람에게도 마음속에 돌의 의지가 필요 하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쉬이 마음이 동요 하거나 혹은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될 것이다. 그 돌도 하찮은 자갈이나 모래 같은 것보다는 묵직하고 큼직한 바윗돌-그런 것이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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