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심포지엄 발표요지

인간의 고통은 錯觀(착관)에서 緣由(연유)
自他分別(자타분별의) 矛盾(모순) 극복해야
緣起的(연기적) 存在(존재)로 ‘人間(인간)은 곧 佛(불)’

  ‘人間’(인간)을 救濟(구제)한다는 말을 뒤집으면 人間(인간)은 잘못 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人間(인간)에게 무엇인가 잘못 된 점이 없고서는 救濟(구제)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佛敎(불교)는 性惡說(성악설)도 아니고, 原罪說(원죄설)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人間(인간)은 누구나 본래 佛(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人間(인간)이 본래 佛(불)’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드리기에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괴로움이 너무 절박하다. 뿐만 아니라 밤낮 是非(시비)만 일삼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대로 佛(불)이라 한다면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만 같다.
  ‘人間(인간) 이 곧 佛(불)’이라는 말은 釋尊(석존)에 있어서 覺(각)의 內容(내용)이 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말도 釋尊(석존)이 깨달은 지리인 緣起法(연기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말은 人間(인간)을 緣起的(연기적) 存在(존재)로 본다는 말이다. 人間(인간)이 緣起的(연기적) 存在(존재)임을 안다면 人間(인간)을 佛(불)과는 다른 것으로 대립시켜보는 종래의 人間觀(인간관)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으며, 동시에 佛(불)을 人間(인간)과는 다른 것으로 보는 종래의 佛陀觀(불타관) 역시 버리지 아니 할 수 없다.
  人間(인간)을 떠나 따로 佛(불)이 있고 佛(불)을 떠나 따로 人間(인간)이 있다면 人間(인간)과 佛(불)은 영원히 둘로 대립되는 평행선일 뿐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 될 수는 없다. 원래 人間(인간)을 떠나 따로 人間(인간)이 없기 때문에 人間(인간)이 곧 佛(불)일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말에는 엄연한 사실대로 바로 보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착각에 대한 날카로운 批判(비판)의 뜻이 들어 있다.
  人間(인간)이 緣起的(연기적) 存在(존재)인 줄 모르기 때문에 人間(인간)과 佛(불)이 엄연히 둘로 보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말은 너무 심한 論理的飛躍(논리적비약)으로 밖에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人間(인간)과 佛(불)은 원래 둘이 아니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잘못 착각하여 이를 둘로 보았기 때문에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飛躍(비약)이 아니고 存在(존재)의 實相(실상)으로 돌아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말은 종래의 그릇된 人間觀(인간관)과 그릇된 佛陀觀(불타관)을 그대로 놔두고 人間(인간)과 佛(불)은 분명히 둘이지만 편의상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보는 착각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이러한 착각이 없는 사람에겐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말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말의 참뜻은 올바른 人間觀(인간관)을, 갖자는 데에 있다. 人間(인간)이란 세상 사람들이 이제까지 상식적으로 보아 온 바와 같이 相對的(상대적) 差別(차별)의 쇠사슬에 呻吟(신음)할 수밖에 없는 存在(존재)가 아니고 대립과 갈등이 없는 보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영원한 存在(존재)이다. 人間(인간)에게 분명히 이와 같은 肯定的(긍정적)인 영원한 面(면)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人間(인간)은 佛(불)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人間(인간)이 곧 佛(불)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法華經(법화경)에 나오는 窮子(궁자)의 譬喩(비유)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될 수 있다.
 富者(부자)집 어린 아들이 길을 잃어 거지가 되었다. 그 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거지는 옛날 자기 집으로 乞食(걸식)을 하러 왔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너는 거지가 아니고 내 아들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길을 잃고 헤맨 지 오래된 그 거지는 자기의 부모도 고향도 아무 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운 생각이 나서 이를 부인하고 도망가 버렸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方便(방편)을 써서 거지가 된 아들로 하여금 자기는 거지가 아니고 본래 부잣집 아들임을 깨닫게 했다.
  이 例話(예화)에서 거지가 된 부잣집 아들이 자기가 본래 부잣집 아들임을 깨달은 것은 자기가 본래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처음에 자기가 부잣집 아들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은 완전히 착각 때문이었다. 만일 여기서 거지가 된 부잣집 아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본래 부잣집 아들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전혀 딴 말이 되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人間(인간)이 곧 佛(불)은 아니고 노력하여야 佛(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로 보는 착각을 여의는 것일 뿐이며, 또한 이 노력은 우리가 지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前提(전제) 하여야 나올 수 있다.
 그리고 佛敎(불교)에서 말하는 緣起法(연기법)이 理解(이해)되고 ‘人間(인간)이 곧 佛(불)’임이 確信(확신)되지 않고서는 人間(인간)과 佛(불)을 둘로 보는 것이 錯觀(착관)임을 알 길은 없다.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왜 이렇게 괴로운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들의 괴로움은 모두 錯觀(착관)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의 괴로움은 理想(이상)과 現實(현실)이 乖離(괴리)하고, 目的(목적)과 手段(수단)이 矛盾(모순)되고, ‘너’와 ‘나’가 對立(대립)하고, ‘愛(애)’와 ‘憎(증)’이 갈등을 일으키는데서 비롯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二元的(이원적)인 모순의 갈등 때문에 언제나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다. 석존도 처음엔 生(생)과 死(사)의 모순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釋尊(석존)은 不生不死(불생불사)의 진리를 깨닫고 이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生(생)과 死(사)가 둘로 보이는 병도 人間(인간)과 佛(불)이 둘로 보이는 病(병)과 똑같은 錯觀病(착관병)이다. 이러한 착각병은 ‘나’만 利(이)롭게 하려는 利己的(이기적) 慾心(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釋尊(석존)이 修行(수행)을 할 때 옳은 일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보살行(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너’와 ‘나’를 둘로 보지 않고 언제나 일체중생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일체중생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 利己的(이기적) 私心(사심)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일체중생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自己(자기)혼자만 佛(불)일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이 佛(불)이 됨으로써만이 可能(가능)하다.
 오늘날 人間社會(인간사회)를 망치는 貪(탐)진騃(애)등 三毒心(삼독심)은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라는 平等(평등)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妄發(망발)이며 우리의 理想(이상)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大乘佛敎(대승불교)의 六波羅蜜行(육바라밀행)도 人間(인간)이 곧 佛(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釋尊(석존)과 같은 절박한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다. 生死(생사)문제와 같이 解決(해결)하기 前(전)에는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根源的(근원적)인 괴로움이 없는 限(한) 사람이란 언제나 피부적이고 현상적인 喜悲(희비)에 속고 살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괴로움은 아직 宗敎的(종교적)인 괴로움이라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現代人(현대인)은 非宗敎的(비종교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어떠한 性格(성격)의 것이건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自他分別(자타분별)의 二元的(이원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不二思想(불이사상)으로써만이 可能(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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