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方法論(방법론)의 대두 절실
文學(문학)은 餘技(여기)아닌 表現(표현)의 意志(의지)에서 나와야

  韓國文學者(한국문학자)들이 역사적ㆍ사회적인 면에서 孤山文學(고산문학)을 논하지 않고 무조건 孤山文學(고산문학)을 斗護(두호)하고 나서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음은 두고두고 매우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詩歌文學(시가문학)전반에 긍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에는 시초부터 그 方法論(방법론)을 달리하여 고찰 되어야 할 필요성이 강열하게 요청되고 있다.
  여기서는 古典(고전)의가치는 오직 歷史的(역사적) 운영을 극복하고 현대에 얼마나 뿌리를 내리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孤山文學(고산문학)에 대한 우리세대의 반응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음을 밝혀둔다.
  李朝時代(이조시대)의 精神的(정신적) 最高槪念(최고개념)은 儒敎(유교)로 도금된 決定論的(결정론적) 思考方式(사고방식)이었다. 決定論的(결정론적) 思考方式(사고방식)은 동양의 기본音(음)이었고 그만큼 당대를 산 사람들의 존재이유를 고고히 해주었다는 강점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自我(자아)의 개발과 現實意識(현실의식)을 부정하고 創造意志(창조의지)와 생활감정을 극도로 억제한 倫理思想(윤리사상)에 떨어진 弱體性(약체성)도 함께 지니고 있었던 터였다.
  그시대에 일가를 이루었던 文人(문인)들은 그러한 사고방식에 더욱 충실하였으며 詩歌文學(시가문학)의 정상을 점했던 尹孤山(윤고산)도 이에 예외일 순 없었던 모양이다. 決定論的(결정론적) 사고방식이 낳은 倫理思想(윤리사상)이란 결국 <心(심)의 思想(사상)>이며 이는 自然(자연)에의 歸依(귀의)이기도 하여 孤山文學(고산문학)의 全篇(전편)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품(遣懷謠(견회요), 雨後謠(우후요)등)까지가 자연에의 귀의를 성공적으로 표출했다고 보기에는 상당한 양보가 있어야할 것이다. 그의 만년작품(夢天謠(몽천요), 山中新曲漁父四時詞(산중신곡어부사시사)등)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한 자연에의 沒我(몰아)는 초기작품에서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초기의 한 작품인 遣懷謠(견회요)는 세상일을 무관심한 태도로 은퇴생활을 하겠다는 걸 읊은 작품인데 거기에는 弱者(약자)의 체념과 회한이 배후에 주요한 톤으로 닉닉하게 깔려있다. 政街(정가)에서 본의 아니게 물러나 불의와 권세에 대항해서 우러난 눈물겨운 한탄조의 노래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에 와서이다.
  時調(시조)의 일반적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연에의 귀의가 孤山文學(고산문학)에서는<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에서 성공적으로 창출되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다.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는 자연과 인생을 제재로 하여 기왕에 산재했던 漁父歌(어부가)를 우리네 생활감각에 충실하게 다져놓은 작품이다. 그의 그러한 업적은 이전에 있었던 추상적인 漁父歌(어부가)를 환골탈태했다는데 있다기보다는 詩(시)가 詩(시)이기 위한 속성, 독특한 개성 속에 전통을 포섭하고 나아가서는 시대의 감성을 그 극에까지 밀고나갔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자연에의 귀의는 극치를 이룬다. 叙上(서상)에서도 약간 언급된 바 있지만 李朝(이조)의 美意識(미의식)은 自意識(자의식)을 완전히 마비시킨 데서 오는 <心(심)>의 평화를 누리려는데 있다. 이것은 자연에의 귀의에서만 가능했다고 <心(심)>의 평화를 孤山(고산)의 詩調(시조), 특히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에서 그絶調(절조)를 이룬다. 春詞(춘사) 第四聯(제사연)(우난 거시 벅구기가~온갇 고기 뛰노나다.)에서 孤山(고산)의 마음은 明鏡止水(명경지수)가 되어 봄에 대한 自意識(자의식)은 죽어버리고 만다.
  이처럼 자연을 관조하여 <心(심)>이 평화를 획득했을 때 時調(시조)는 <興(흥)>을 주었다. 孤山(고산)은 자연 속으로 매몰되어 감정의 마비와 동시에 의식도 취해 버린다. 그리하여 孤(고)와 自然(자연)은 하나가 되어 이미 自然(자연)은 孤山(고산)의 對象物(대상물)이 아니다. 孤山(고산)은 자신과 自然(자연) 사이에서 莊周(장주)의 胡蝶夢(호접몽)의 경지에 이른다. 여기서 자연은 시적 소재인 동시에 주제의 역할을 한다. 물론 時調(시조)의<自然(자연)>은 의식의 對峙物(대치물)이라기보다는 마음의 轉位物(전위물)로서의 자연인 점에서 西洋(서양)의 Nature와는 그 개념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서양의 자연은 언제나 무릎 아래 있었고 동양의 자연은 언제나 머리 위에 있었다. 전자는 從(종)으로서, 후자는 主(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時調(시조)의 自然(자연)은 倫理面(윤리면)에 있어서는 최고 槪念(개념)으로서, 예술에 있어서는 美(미)의 대상으로서 그 가치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李朝(이조)의 藝術(예술) 특히 文學(문학)이란 다분히 形而上學(형이상학)에 가까웠다는 點(점)이다. 그러한 相關關係(상관관계) 속에서 李朝人(이조인)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에서 본 바와 같이孤山(고산)이<自我(자아)>를 부정하고 그것을 자연에 예속시켜 얻은 황홀한,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어지럽게 하는 마음의 평화는 우리를 끝없이 담금질하고 있다. 이처럼 李朝(이조)의 美的理想(미적이상) 즉 無我(무아)의 평화에 충실하였던 孤山(고산)이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美的趣向(미적취향)에 국한된 자연을 통하여 자신을 극복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퍽이나 당황하게 한다. 그게 한갓 餘技(여기)의 思想(사상)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질타하기 이전에 그런 극복의 문제가 오늘에 까지 전승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이 사뭇 새삼스럽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그걸 포기한 마당에 살고 있다.
  최고개념이 상실되고 모든 가치가 제각기 독점권을 주장하는 혼돈의 시대에 처해있다. 意志(의지)가 自然(자연)에 흡수되길 희망하여 자신을 극복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만큼 우리들의 감각에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孤山文學(고산문학)의 한계가 있으며 또한 여기에 우리세대의 고민이 있기도 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藝術(예술)이라고 할 때 認識(인식)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認識(인식)에 의학 藝術(예술)은 餘技(여기)일 수 없으며 엄숙한 生(생)의 意識(의식)에서 발상되는 시련에서 비롯된 ‘藝術的現實(예술적현실)’이다. 時調文學(시조문학)의 일가를 이루었던 孤山文學(고산문학)은 분명히 이러한 藝術的(예술적) 産物(산물)이 아니다. 사실 孤山文學(고산문학) 뿐만 아니라 李朝(이조)의 藝術(예술)을 언급하려면 오늘의 藝術(예술) 자체에 대한 개념을 잠간 유보시켜야할 것이다.
  특히 어느 사이 서구적인 藝術觀(예술관)에 젖은 우리가 李朝(이조)의 時調文學(시조문학)을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는 틀림 없다. 時調(시조)에는 作家(작가)의 使命意識(사명의식)이 없고 認識(인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한 때 진정한 藝術(예술)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으로는 藝術(예술)이란 有識(유식)학 사람의 한가한 감정 따위를 토로하는 매개체일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人間(인간)의 內面意識(내면의식)과 感性(감성)의 총화인 상상력이 生(생)을 체험하고 나아가서는 생을 언제나 새로운 의미로 전개 시켜줄 수 있는 작품은 자연과 일체가 되길 거부하고 오히려 자연을 확대하고 연장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이러한 발언이 여타의 反論(반론)을 유발할 위험스런 여지도 다분히 내재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孤山文學(고산문학)이 음악성, 감각적인 요소 그리고 문학의 순수성을 성공시켰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쇼펜하우어의 말이 등장되어 孤山文學(고산문학)이 옹호되는 이론적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그러나 이 말은 예술의 이상을 표백한 말이기는 할지언정 문학의 이상을 확 들어낼 만한 말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문학을 그 장르적 성격에 있어서 음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음향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과,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은 그 인스트루먼트에 있어서 이미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철저하게 감각적인 음향으로 이루어진 음악과 감각적인 동시에 개념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이 각기 그 감상가들에게 주는 質料(질료)나 효과에 있어서 판이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孤山文學(고산문학)을 철저하게 부정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것은 시대적 배경은 상이하나 생활감정을 같이 하고 있어 상호작용에 의해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詩文學(시문학)이 李朝(이조)의 그것과 결별한 이때 孤山文學(고산문학)이 얼마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또 그것의 전승을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꽤나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李朝(이조)의 시인들이(詩作(시작))에 표현의 意志(의지)에서가 아니라 여기의 사고로 임했다는 사실을 엿보아버린 우리세대는 심한 저항감을 어쩌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세대가 孤山文學(고산문학)뿐만 아니라 우리네 詩歐文學全般(시구문학전반)에 부딪쳤을 때 상대적으로 일어나는 우리들의 감성의 반응인 것이다. 본고에서 문제로 등장시키고 싶어했던 점은 李朝(이조)의 詩人(시인)들이 시의 당위성에 충실치 못했던 점을 꼭 꼬집자는데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文學(문학)이 餘技(여기)가 아니라 表現(표현)의意志(의지)에서 나와야한다고 배워버린 우리세대가 餘技(여기)로 씌어진 李朝(이조)의 時調(시조)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에 있었다.
  孤山文學(고산문학)이 그리고 우리네 詩歌文學(시가문학)이 전승될 수 없는, 그리하여 박제가 됐다는 풍설을 믿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들 손에서 이미 떠나버렸다는 낭설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네 古典文學(고전문학)에 그 많은 저항감을 느껴야만 하는가? 저쪽의 잘못인가? 이쪽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 무엇의 잘못인가?
  古典(고전)을 先代(선대)의 유산이라는 단하나의 가난한 이유 때문에 무조건 斗護(두호)하고 나서서 우리 세대를 오도하고 당황하게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슬프게 하는 方法論(방법론)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것이다. 무릎을 두들겨가며 <얼씨구 좋다!>하는 인상비평의 시대는 폐기되었다. 우리의 정신유산이 도둑맞기 전에 새로운方法論(방법론)의 대두가 재삼 절실하게 요청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들의 치부를, 아픈 데를 은닉할 필요는 없다. 치부가 진정 내 것일때 우리는 차라리 따뜻한 애정마저 가질 수 있잖겠는가?
  화학자 ‘르샤트리’는 <화학평형에 있어서 촉매는 평형상태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평형이 될 때까지 속도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시킬 수 있다>라는 법칙을 세웠다.
  古典(고전)과 우리세대를 묶는데 있어서 그 속도를 빠르게는 못할망정 느리게 하는 인상비평은 사라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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