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어리석음으로 영원을 잃어버리다

한 세대는 겨우 30년을 버티고, 인간이란 생명은 고작 그 세대가 세 번 지날 시간 동안만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한 세대에서의 지성의 몰락(沒落)은 수천 년 인류가 지켜온 가치를 부수고 농락(籠絡)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공동체와 그 속에 깃든 문화를 짓뭉개고 살아왔던 지난 세대의 형벌을 받고 있다. 그 결과로 물질적 풍요는 얻었으나, 그것을 먹고 힘내서 나아가야할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울산광역시 울주군 대곡리에 있는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 일부 모습.
그곳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고대 암각화. 모두 43마리의 고래, 바다 생물과 호랑이며 사슴 등의 그림 300여 점이 새겨져있다. 추정키로는 대략 3,000년 전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살던 이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남긴 것이라 했다.

울주까지 가서 본 것은 아니지만 30여 년 전, 그 그림들을 코앞에서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어미 귀신고래는 새끼를 등에 업은 채 바다 위를 헤엄치고 있었고, 향유고래며 흑등고래 바다의 포식자 솔피와 물개가 살아있는 동해를 볼 수 있었다.
배에 탄 고래사냥꾼들은 작살을 들고 생존을 위해 풍파와 싸우고 있었다. 바다가 반구대에서 더 멀리 물러난 후로 사람들은 바뀐 사냥감인 멧돼지며 표범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춤추는 자신들의 모습도 새겨두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들은 당시 동국대학교 대학원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렸고, 그런저런 인연으로 전면의 탁본은 대학 본관 입구에 걸려있었다. 덕분에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삼천년 세월을 넘어 인사하는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볼 때마다 감동을 넘어 전율과 영감을 받았다. 그려진 고래의 종류와 생태적인 특징은 그들이 생각보다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암각화를 다시 떠올린 것은 지금 그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 때문이다. 발견 당시 이미 세워졌던 사연댐 때문에 바위의 풍화가 가속되어 당장 보존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한 이야기도 들린다. 몇몇 그림은 벌써 희미해졌다 한다. 몇 해 전 수학여행차 들른 10대 학생은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기도 해서 걱정은 더 높아졌다. 반면에 훼손의 도가 그다지 깊지 않다는 항변도 있다.

암각화를 보전하기 위해 내놓는 처방들은 제각각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편은 댐의 수위를 낮춰 암각화가 수몰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나 울산의 식수 조달에 차질이 온다는 지적에 모두 달갑지 않게 여긴다.
암각화 앞에 물막이벽을 세우자는 주장도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바위를 수지로 덮거나, 전면을 고스란히 떼어내서 보존하자는 과격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보존 방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바위를 억지로 떼 냈다는 주장도 있고, 탁본과 모형제작을 위해 암각화에 상처를 주었다는 말도 들린다. 삼십년 인위적인 마멸이 삼천년 자연의 힘보다 더 컸다.

암각화는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됐고,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로 올라있다. 우리들의 보물일뿐더러 인류의 기억을 간직한 유산인 것이다. 단순히 바위 위 그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흔적, 역사, 감동, 그리고 미래의 나침반이 자취를 잃는 일이다.
정치, 경제적 이유, 문화적 광기, 현실적인 편리함 등으로 인류의 집단기억을 파괴하는 일은 일상이 되고 말았다. 불과 한 세대도 지탱하지 못할 이유를 들어 수천 년 역사, 삶의 흔적들을 기억 속에서 지우는 일이 유행한다.

종교와 문화, 권력의 우월함으로 배타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행히도 이 시대의 특징이 됐다. 울주의 바위벽에서, 위구르 신장(新疆)과 보스니아의 마을과 성소(聖所)에서 소멸 속으로 내몰리는 것들은 결국 약하고 가난하며 자신의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의 타시룬포 사원에서 벽 하나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황금빛 아름다운 그림의 흔적이 검은 칠 속에 희미하게 갇혀있었다. 인간의 지혜와 자비심을 표현한 거대한 벽화는 문화대혁명 시기, 역사의 반동과 봉건의 흔적으로 간주되어 검게 칠해졌고 그 위에 붉은 혁명의 구호가 적혔다.

불과 한 세대가 지난 후 그 야만의 흔적을 지우려 칠을 벗겨냈지만, 옛 그림을 되살릴 수도 참혹한 폭력을 감출 수도 없었다. 한때 무지한 권력을 휘둘렀던 자들은 아마 두고두고 교훈의 대상이 돼야할 것이다.
타시룬포의 황금빛 벽에 칠을 명령한 자나 물 부족을 이유로 반구대 암각화의 수몰을 지속하려는 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일깨우고 광기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은 지성이다. 대학이 세상에서 중요한 까닭은 바로 지성의 빛을 꺼뜨리지 않고 지켜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힘이 없다면 대학이 거리를 메운 고시학원과 취업학원 보다 나을 바가 없게 된다. 시대가 광기로 치달을 때 대학은 지성의 힘으로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요즘 그 목소리는 신통치 않다.
한 세대는 겨우 30년을 견디고, 인간은 고작 그 세대가 세 번 지날 때를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세대 지성의 몰락은 수천 년 인류가 지켜온 가치를 철저히 농락할 수 있다. 오직 잘 살아보자며 공동체와 그 속에 깃든 문화를 짓뭉개고 지내온 지난 세대의 형벌을 지금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쌀은 있으나, 그것을 먹고 힘내 살아야할 내일의 희망은 잃었다.

반구대 암각화가 보여준 것은 거친 생존의 환경 속에서도 기쁜 삶의 모습이었다. 고래와 사슴과 인간이 함께 살고 힘겨워도 춤추는 환희가 있었다. 생존의 방법을 가르치고, 서로가 먹이를 나누며 하늘 아래 몸을 낮추어 살아가는 공존의 방식이 담겨있다. 선대의 인류가 바위와 동굴 속에 그림을 남긴 여러 이유 중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의 뜻도 있었다고 한다. 자연과 세상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그 속에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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