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디자인,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관문

 
북디자인을 가리켜 서양인들은 흔히 ‘텍스트’의 ‘집’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쓴다.
표지는 그 집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이고, 표제지는 ‘현관’이며, 장표지는 ‘방문’이라는 식으로. 책을 펼쳐드는 것은 베일에 가리워진 어떤 ‘집’으로 들어가는 행위이자,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관문’의 역할로 책의 표지를 설명한다.

동양에서는 사람의 신체 즉 ‘몸’에 비유를 든다. 내용은 ‘정신’이며, 이것이 깃들어 있는 ‘몸’을 짓는 일이
 
북디자인이며, 그것으로 인해 ‘책’이 완성되면, 그 책은 한 세계를 머금은 ‘생명체’가 된다는 인식이다. 오랜 시간 북디자이너로 지내면서 드는 생각은 ‘책’이라는 물건에서 어디까지가 ‘내용’이며, 어디까지가 ‘형식’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북디자인 과정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러하다. 출판사에서 기획중인 책에 대해서 디자인 작업이 가능할지 의뢰를 해온다. 대략의 설명과 기획의도를 듣고 이 작업을 맡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원고를 받는다. 텍스트로만 빽빽히 이루어진 원고뭉치를 읽는다. 주어진 것은 책의 제목, 저자 이름, 혹은 역자 이름, 출판사로고 그리고 ‘원고 뭉치’이다. 이때부터 ‘북디자이너의 독서’가 시작된다. 원고를 읽는다.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완전한 몰입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나의 역할은 원고를 ‘책의 꼴’로 완성해야 하는 일이다.

 
장표지가 필요하겠군, 일러스트가 있는게 좋겠어, 누구 그림이 좋을까, 앗,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책 크기는 신국판보다 작아져야 적당한 볼륨으로 밀도감이 들겠고, 대신 가벼운 본문 종이를 쓰면 되니까, 초판을 300부 찍는다고 했던가? 타이포그라피는 조금 단호한 표현이 어떨까, 이 느낌은 코발트블루보다는 세르리안블루에 가까운 슬픔이지 않을까, 과연 띠지가 필요할까, 제목이 글쎄….’

이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독서를 한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독서’가 아니다. 책이 완성되기 전 상황이므로 ‘원고 읽기’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독자가 만나는 것은 원고가 아니라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본다. 디자인된 책을 보고, 읽는다. 입체 사각형의 크기와 두께가 전하는 조형적 감성이 있다. 타이포그라피는 그저 글자였던 제목에 어투와 태도가 어울어진 목소리를 불어넣는다. 독자가 본문 속 저자의 첫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 세심하게 안내하는 수 많은 파라텍스트(paratext), 본문이 끝나고 이어지는 찾아보기나 서평과 판권 등은 책의 완결을 위해 편집자와 북디자이너가 함께 세운 질서와 체계이다. 내가 읽었던 ‘원고’와 ‘책’을 만난 독자의 ‘독서의 경험’은 같은 것일까? 책은 텍스트에 디자인이 결합된 감흥을 전한다. 책에서 중요한 것이 글자 혹은 문장이 아니라 책이라는 두께로 말하고 싶은 어떤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얼굴은, 눈빛은 표지가 된다. 드라마나 영화나 포스터가 아니라 굳이 책으로 엮는 이유는 책의 효과, 책만의 효과를 기대한다. 긴 호흡으로 그만한 두께로 전하고픈 세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책이 ‘책의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모든 책이 북디자인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세계’만의 고유한 눈빛과 표정이 빚어지고 그 감성이 질서있게 표현되고 독자에게 전해질 때라야 비로소 그 자리에 북디자인이 있었노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북디자이너 오진경

대표작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지음·문학동네) △공중그네(오쿠다 히데오·은행나무) △즐거운 나의 집(공지영·푸른숲) △우리는 사랑일까(알랭 드 보통·은행나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오픈하우스)

▲오진경 북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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