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 교수
“나는 종문(宗門)의 사람이 아니다.”, “나는 종문 밖의 사람이다.” 우리에게 민예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이런 말을 거듭하고 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책에서이다.

다 알다시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은 불교의 말이고, 그 중에서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함으로써 정토(淨土)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정토신앙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의 의미를 천착하고 해설하는 데에는, 불교 안의 사람이라야 할 것이다.
아니, 불교 안에서도 정토신앙을 하는 종파에 소속한 사람이라야 가장 적격자일 것이다. 특히 스님이라야 더욱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하는 ‘종문’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나 카테고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종문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정토신앙을 고취하는 특정 종파에 소속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려주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다. 과연 그의 이야기는 놀라운 상상력과 놀라운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참으로 그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렇게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종문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싶다.

비단 종문 안의 사람으로 야나기 무네요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원효스님, 보조지눌스님, 만해스님 같은 분은 다 종문 안의 사람이 아니다. 어느 한 종문에 매이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이 ‘문(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속한 모든 인연이 다 문이다. 혈연, 지연, 학연도 다 문이다. 그러므로 ‘문’ 안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존조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문’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한계로서 작용한다. 우리가 ‘문’ 안의 입장에 서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우리에게 어느덧 ‘문’은 하나의 ‘벽’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문’ 안이 아니라, ‘문’ 밖으로 나가서, 문 밖의 입장에 서서 문 안의 일을 다시금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운 창조력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우리가 속한 그 ‘문’ 역시 좀 더 건전하고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같은, 문 밖의 사람들에게 끌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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