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哲學(철학)’ 體系的(체계적)으로 展開(전개)
戰後(전후)의 狀況(상황), 沈默(침묵)과 思索(사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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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과 죽음과 無(무)와 존재의 철학자 Heidegger는 該著(해저)의 제2편 제1장 제52절에서 인간존재 곧 현존재의 종국으로서의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자기적인(곧 본래적인)다른 존재자와는 몰교섭한, 확실한, 그러나 언제 올까 모르는 곧 그러한 것으로서 부정한(곧 무규정적인)넘어설 수 없는 가능성이다”라고 주장했다. 위의 죽음에 대한 실존론적-존재론적 개념은 이를 확실성과 무규정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죽음은 확실히 찾아온다. 하지만 당분간은 오지 않는다”라고 ‘세상사람(das Mann)’들은 말한다는 것이다. 이 ‘…하지만’을 가지고 ‘세상사람’들은 죽음의 確實性(확실성)을 부인하려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상사람’들은 ‘죽음은 모든 瞬間(순간)에 可能(가능)하다고 하는’ 죽음의 確實性(확실성)의 특질을 굳이 隱蔽(은폐)하려든다. 그런데 죽음의 確實性(확실성)과 죽음의 ‘언제가 될지?’의 無規定性(무규정성)과는 밀착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죽음의 가장 自己的(자기적)인 可能性(가능성)의 性格(성격) 곧 確實(확실)하면서도 無規定(무규정)한, 곧 어떠한 순간에도 可能(가능)하다고 하는 性格(성격)이 日常性(일상성) 속에서 隱蔽(은폐)되어있다’라고 Heidegger는 말한다. 日常性(일상성)속의 ‘세상 사람들’은 이 엄연한 죽음의 사실 앞에서 눈을 가리거나 도피하려고 한다는 倫理的(윤리적)․批判(비판)이다.
  다시 말하길 현존재는 그가 실존하는 한 사실적으로 죽는 죽음을 향하여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는 頹落(퇴락)(Verf allen)이라고 하는 그릇된 방식, 곧 죽음을 隱蔽(은폐)하려고 하는 방식에 있어서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내부에서 여러 모든 만나는 존재들 틈에 끼어 頹落的(퇴락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고향상실성으로 부터의 도피 곧 죽음에의 가장 자기적인 존재에 대한 실증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세상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頹落(퇴락)한 존재방식이라고 고발하는 Heidegger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實存的(실존적)인 自覺(자각)이야말로 人間(인간)의 自己存在(자기존재)를 全體的(전체적)-本來的(본래적)(곧 根源的(근원적))으로 부각시키는 根據(근거)인 것이며, 그 가장 自己的(자기적)인 存在可能(존재가능)에 눈을 뜰 때, 現存在(현존재)는 참된 自己(자기)로서 존재할 각오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을 깨달은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차이 속에서 現存在(현존재)의 本來(본래)의 모습과 頹落(퇴락)한 모습 곧 ‘세상사람’과를 구별 할 수 있다. 現存在(현존재)의 존재는 확실히 未完結(미완결)이긴 하지만, 그러나 他者(타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 때 얼마나 죽음이 불가항력적으로 사람을 엄습해 오는 것인지를 이해하고, 죽음이 現存在(현존재)의 各自性(각자성)과 實存(실존)에 얼마나 깊게 뿌리를 박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면서, 그처럼 특이하고도 진지하게 죽음의 哲學(철학)을 일찍이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체계적으로 전개했던 바로 그 하이데거가 지난 5월 26일에 세상 사람들과 영원히 섞일 수 없는 영면의 세계로 갔다.
  죽음과 不安(불안)과 無(무)의 讚歌(찬가) 아닌 超克(초극)을 위한 一大(일대) 전환기적 고뇌의 哲學(철학)이 豫言(예언)한대로, 그러나 발음과 환희에의 아무런 조짐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21세기말적 深夜(심야)를 남겨둔 채 가버린 것이다. 전환기의 哲學(철학)은, 노상 전환기적 초극을 위한 것이건만 이렇다 할 局面(국면)전환의 기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20세기적인 역사적 현실과 밀착된 그긴 生涯(생애)가 Jaspers와 Russell에 뒤이어 고요히 막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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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대전 땐 25葳(위)로 學位(학위)를 받았고, 그 다음해인 75년엔 대학 강사 자격시험을 위한 處女(처녀)강의를 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私講師(사강사) 취직 논문을 썼는데, 여기에 結語(결어)의 章(장)을 새로 넣어 그 다음해에 上梓(상재)했으니, 27세의 일이다. 新(신)칸트學派(학파)의 젊은 旗手(기수)였던 에밀라스크(1878~1915)는 강단을 뒤로하고 조국방위에 나서 散華(산화)하고 야스퍼스(1883~1969)는 病弱(병약)으로 出征(출정)못하는 괴로움 속에서 精神(정신)병리학으로부터 철학에로의 방향전환을 시도하고 있던 이 미중유의 격동기에 하이데거는 그 선천적인 詩人的(시인적) 감각과 철학자다운 예지로 戰況(전황)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戰後(전후)가 휘몰고 올 새로운 역사적인 국면에 대하여 조용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前記(전기)의 私講師(사강사) 취직논문을 마지막으로 Heidegger講師(강사)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서 피나는 노력을 그레시아의 自然哲學者(자연철학자)들로부터 모교에서 가까이 모시던 Husserl(1859~1938)에 이르는 古今(고금)의 哲學思想(철학사상) 全般(전반)을 進體驗(진체험)함과 아울러 역사적 연구에 온통 쏟았다. 그의 은사였고 초기에 힘입은 바 큰 Rickert(1863~1936)的(적) 認識論(인식론)과 그 思想的(사상적) 根源(근원)인 Kant를 Aristoteles的(적) 第一哲學(제일철학)․形而上學(형이상학)․存在論(존재론)이라고 하는 그레시아 이래의 전통哲學(철학)의 主流(주류)에서 발견하고 또 그를 대담하게 形而上學者(형이상학자)로 규정하는 새로운 해석이 여기 젊은 Aristoteles學者(학자)에 의하여 시도되었던 것이다. (그의 主著(주저), <칸트와 形而上學(형이상학)의 問題(문제)>(1929)는 그 증거).
  1923년, 그러니까 그가 34세에 Marburg대학의 교수로 취임했을 때는 戰後(전후)의 混迷(혼미)와 곤궁이 도이취의 天地(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6년 뒤에는, 稀世(희세)의 정치깡패 Hitlerrk가 당당 제2당으로 진출할 만큼,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팎의 어수선함 속에서 Heidegger의 깊은 침묵과 사색은 10유여 년에 걸쳐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밖으로 作用(작용)하지 못할 때에는 안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아니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숨 막히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詩人(시인)이 아니면 哲學者(철학자)가 되어야만 했다. 1953년부터 60년에 이르는 韓國動亂(한국동란)의 아프레․겔을 경험한 韓國人(한국인)이라면 大戰後(대전후)의 도이취의 암담한 절망적인 분위기에 대강 짐작이 갈 것이 아닌가. 精神的(정신적) 故鄕(고향)을 상실한 역사이래의 혼란과 방황과 실의 속에서 뜻있는 이라면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은 결코 개념적 사유나 자연과학적 분석방법에 의하여서는 포착할 도리가 없는 氣分(기분)(Stimmung)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니, 이는 적어도 재래의 哲學的(철학적) 입장에서 무단히 無意味(무의미)하다고만 치워서는 안 될 그러한 것으로서 반드시 詩人的(시인적)인 體驗(체험)을 통하여 直視(직시)되고 全人的(전인적)인 觸覺(촉각)에 의하여 이해되거나 悟得(오득)되는 것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그것을 젊은 哲學者(철학자) Heidegger는 不安(불안)(Angst)이라고 했다. 不安(불안)은 공포와는 달라서 일정한 대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객관적이 아니다. 그것은 느끼는 이에게만 있다. 그래서 ‘어쩐지 不安(불안)하다’라고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Unheimlich)을 측량할 척도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냐면 그건 있다. 태양을 보듯 뚜렷하다. 이놈의 正體(정체)를 밝혀내야한다. 무섭다고 달아나기만 하면 더욱 뒤쫓아오는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不安(불안)은 죽음과 根源的(근원적)인 의미가 같다. Heidegger의 哲學(철학)에 있어서의 죽음의 主題(주제)는, 그의 말을 빌려 존재적으로 표현한다면, 戰中(전중)의 숱한 죽음과 戰後(전후)의 사라질 줄 모르는 죽음에의 위협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에 對(대)한 기대 속에서 살아온 도이취 민족이며 또 그 榮光(영광)이었는데, 지금 그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잃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더 큰 절망이 아닐 수 없었기에 그것으로부터의 대담한 탈출을 가능하게 하기위한 애국 哲學者(철학자)의 임무는 不安(불안)과 허무감과 죽음의 正體(정체)를 분석 해명하는 일 外(외)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독창적인 思想(사상)의 體系化(체계화)를 위한 1915년 이래의 10유여 년 Heidegger는 폐허가 된 硏究室(연구실)과 굶주린 生活(생활)의 소용돌이 속에서 Holederlin의 詩世界(시세계)를 通(통)하여 돌아가야 할 故鄕(고향) 또는 잃어버린 故鄕(고향)의 아스라한 모습을 더듬어 볼 수가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Seinund Zeit>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잉태되고 장구한 진통 끝에 해산된 것이고 보면 어찌 이 冊(책)이와 역사와 세계와 도이취의 아프레․겔을 外面(외면)하고 딴전만을 부릴 수 있는 노릇이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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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대체 <存在(존재)와 時間(시간)>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책의 맨 첫머리에서 인용된 Platon의 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있다’고 하는 문제 곧 ‘存在(존재)의 意味如何(의미여하)의 물음을 새삼스럽게 제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Heidegger는 이를 위하여 存在(존재)와 存在者(존재자)(存在物(존재물), 存在事物(존재사물), 삼라만상)를 엄밀히 구별하고, 存在者(존재자)로 하여금 存在可能(존재가능)하게 하는 存在(존재)(Sein)를 비단 ‘存在者(존재자)의 (그)存在(존재)’뿐 아니라 ‘存在一般(존재일반)’또는 ‘存在(존재) 그 自體(자체)’를 그 <意味(의미)>에 있어서 포착하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철학이 그 첫날부터 줄기차게 물어온 ‘존재의 의미’를 (그것이 자만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문에 부쳐오기 일쑤였던 이른바 ‘존재망각이라고 하는 근본경험’에 입각하여) 아주 새로운 視角(시각)에서 문제 삼음으로써 ‘존재일반의 의미’를 밝히는 존재론의 수립 곧 새로운 형이상학의 부흥에 기여를 해보자는데 그 첫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당장에 ‘존재일반의 의미’의 전면적인 해명에 나서려는 것이 아니고 ‘당장’은 ‘존재의 의미에의 물음’을 묻는 올바른 물음의 방식을 전개함으로써 ‘존재일반의 의미를 해명하기위한 地平(지평)(視域(시역))을 개척하는 일’을 뜻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1卷(권)에 뒤이어 續卷(속권)을 내놓겠다던 約束(약속)을 끝내 저버린 이면의 이유 속에는, 1927년의 出刊(출간) 이후의 도이취 및 전 유럽의 역사적 상황과 저자 자신의 심경이나 사상 경향의 변화 또는 유럽의 정신세계에 있어서의 危機意識(위기의식)의 高調(고조)와 그 반영이라고 하는 갖가지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들어있을 것이 분명하거니와 결국은 ‘存在一般(존재일반)의 意味(의미)’의 해명이라고 하는 궁극적 과제는, 그 뒤 산발적으로 밖에는 다루어지지 않고 만 것이다. 이 또한 20세기적 思想(사상)의 運命(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存在(존재)에의 물음의 超越的(초월적) 地平(지평)’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실마리로 존재자의 <存在(존재)>(Seindes Seiendes)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人間存在(인간존재)라고 하는 ‘現一存在(현일존재)’(Dasein)를 내놓고는 다른데서 찾을 길이 없다. 왜냐면 ‘存在一般(존재일반)의 意味(의미)’를 물으려고 할 때, 먼저 어떠한 의미에서든, 존재이론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실마리로  삼지 않고서는 안 될 판인데, 이를테면 우리는 곧잘 “여기에 원고지가 있다”든가, “오늘 날씨가 좋다”든가 라는 표현을 통하여 실은 ‘存在(존재)가 무엇인지?’를 모르면서도 여기에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하고 있음을 말하여 주고 있는 以上(이상) Heidegger 표현에 따르면 “現存在(현존재)야 말로 존재하면서 무엇인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하는 方式(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存在理解(존재이해)”라는 것이 “現存在(현존재)의 存在規定(존재규정)”인 이상, 存在(존재)를 이해하고, 더욱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유일한 존재자로서의 現存在(현존재), 곧 우월한 존재자로서의 現存在(현존재), 곧 우월한 존재자로서의 人間存在(인간존재)의 존재이해의 構造(구조)를 분석해나가면, 所期(소기)의 <存在一般(존재일반)의 意味(의미)>를 해명할 수 있는 地平(지평)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래 “存在(존재)에의 물음” 그 자체 속에 이미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 <存在(존재)>가 포함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묻는 우리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존재를 어떠한 형태로나마,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므로, 물을 수조차 없는 (現存在(현존재) 以外(이외)의)듯 존재자와 구별하여 우리 인간을 특히 현존재(현재-여기에 <da>-있다<sein>라고 하는 존재 곧 Dasein이다)라고 부르고, 現存在(현존재)의 존재방식, 곧 現存在(현존재)의 존재를 특히 實存(실존)이라고 이름 하여, 現存在(현존재)를 실마리로(제1편 ‘現存在(현존재)의 豫備的(예비적) 分析(분석)’)이를 實存(실존)의 방향으로 밀고가면, 다시 말해서 現存在(현존재)의 實存的(실존적) 分析(분석)을 감행하면 거기에 現存在(현존재)의 존재규정으로서의 관심(Sorge)이 얻어지고, 이를 根源的(근원적)으로 추구해가면(제2편 ‘現存在(현존재)와 時間性(시간성)’)존재의 의미로서의 시간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現存在(현존재)의 實存論的(실존론적) 分析(분석)’ 곧 基礎的(기초적) 存在論(존재론)이 <存在(존재)와 時間(시간)>에 있어서의 당면의 과제이거니와,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철두철미 人間學(인간학)이며 人間形而上學(인간형이상학)이며, 또 難解(난해)한 人間存在論(인간존재론)이다. 그 난해성 때문의 비난과 영광의 비밀은 도이취 말의 煩瑣(번쇄)한 言語解釋學的(언어해석학적) 분석의 天才性(천재성) 속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적 고뇌의 철학의 共感(공감)은 단지 머리로써만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랜 삶의 연륜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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